225화
이전의 그 외진 숲속에 자리한 오두막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헨젤과 그레텔에게 죽은 마녀가 살 것처럼 외딴 오두막이었고, 주변에는 그저 나무밖에 없었다. 경비 시스템 따위는 없었고, 그런 게 없어도 아무도 찾지 않을 위치였다. 그러나 그곳에 이도하가 쳐들어갔고…. 그래서 이렇게 위치를 옮긴 모양이었다.
그 어떤 출입문도 통과하지 않은 인기척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을 감지해 내자마자 요란하게 알람이 울리고, 즉시 셔터가 내려가며 아마 꽤 대단하고 무서운 사람들에게 곧바로 알려지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곳으로. 그러나 우르슬라가 앉아 있는 것은 여전히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낡은 안락의자였다.
여전히 그녀는 한겨울의 어느 시간 속 같은 벽난로 옆에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도, 낡아 보이는 벽도, 그 벽에 가득한 책장도, 주변이 전부 그 숲속의 오두막과 같다. 창문이 없다는 것만 빼고는. 당장 등 뒤의 현관문처럼 생긴 문밖으로 나가면 온갖 최첨단 시설이 깔려 있을 곳에서, 이곳만 아주 옛날의 어느 시간에 멈춰 있었다.
이도하는 붉은 알람 아래 위화감을 가득 안은 채 조성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여긴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의 거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안락의자는 그녀가 아주 사랑했던 누군가가 좋아한 의자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마도 어느 겨울, 저 의자에 앉아… 그녀는 또다시 누군가를 잃었을 것이다.
우르슬라.
그녀의 앞에 다다른 이도하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끼익, 끼익, 안락의자가 흔들린다. 팔걸이에 놓인 주름진 손은 영락없는 노인의 것이었다. 무릎 위에 늘어진 푸석푸석한 머리카락도. 건드리면 그대로 내려앉을 것처럼 왜소한 어깨도. 깡마른 그녀의 무릎 위로, 천천히, 이도하의 손이 내려앉았다.
“…우르슬라.”
알람 소리가 요란하고, 붉은빛이 위협적이고 불길하게 번쩍이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미동이 없다. 고막을 두드려 대는 저 알람 소리 따윈 그녀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묻힌 이도하의 목소리 역시도. 그러나 이도하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우르슬라. 알람 소리에 묻혀 제 귀에조차 닿지 않는 이름을 달싹이며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무의식중에도 저를 두려워한 부모님이 저를 상식 안에 ‘가두었다’고 했던가, 주승현이. 인정하기 싫지만, 이도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갇혔다. 상식 안에.
그는 더 이상 상상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던 8살의 이도하가 아니었다. 그 이도하는 정말 뭐든 했다. 안 되는 건 없었다. 애초에 ‘안 되는’ 게 뭔지, 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8살 이도하였다. 모르는 게 많았기 때문에, 상상하는 모든 게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걸 잊은 채 평범하게 자란 이도하는 세상이 어떤 이치로 돌아가는지 아는 이도하였다. 겨울 다음에 봄이, 봄 다음에 여름이 오는 게 당연하며,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른다는 걸 너무도 당연하게 아는 이도하. 기억도, 특기도 제 안에 가두면서…. 그런 이치를 그냥 무시해 버리는 걸 어떻게 하는 건지도 그는 잊어버렸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고, 그림자에 남은 흔적을 읽어 내고, 사람의 기억도 읽어 내고…. 적어도 보고 겪어 눈으로라도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 그런 게 가능한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그게 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거나 겪은 다음에야 그 역시 할 수 있었다. 시오한은 그가 뭐든 할 수 있다 했지만, 정말 ‘무엇이든’ 가능했던 건 8살의 이도하였다.
지금의 제가 아니라.
그래서 이도하는 사람도, 자료 한두 개도 아니고 아이라라는 단위를 통째로 읽어 내는 미친 짓을 감행해야 했던 것이다. 뭐라도 알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게 뭐든 뭐라도 가능하게 만들 무언가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찾지 못하면 미국이든 스페인이든, 중국이든 이도하는 다 가 볼 생각이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이라를 통째로 읽어 들인 이도하는 오히려 깨닫고 말았다. 다른 방법 같은 건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얄팍한 희망은,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산산이 부서질 따름이었다. 세계 어디를 뒤져도 이도하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
이것 말고는.
“…도와줘.”
그녀의 무릎 위로 이마를 내린 이도하가 말했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저조차 제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도하는 다시 말했다.
“도와줘.”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를 동정한다. 그녀는 잃고, 잃고, 또 잃었다. 끊임없이 잃었다. 인소더블로 밝혀지기 전 우르슬라는 이미 연구원이었다. 시간에 간섭하는 제힘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자살한 동생을 살리느니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길 선택한 게 이 여자다.
그렇게 스스로를 베어 가며 견뎠지만…. 그래서 엘하시온의 죽음 앞에서 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엘하시온의 죽음을 돌이키려 했던 그녀가 얻은 건, 수천만 번 반복되는 그의 죽음뿐이었다. 엘하시온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그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되풀이해 지켜본 것이다. 그게 어떤 건지 이도하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해도, 그가 살아 있기만이라도 바라는 마음을 이도하는 죽고 싶을 만큼 이해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만둬야 해.”
내 계약주를 위해, 너의 계약주를 놓으라고.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속에 꽉 찬 것을 뱉어 내지 않으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낡은 무릎 담요 위로 점점이 눈물방울이 얼룩지는 것을 보며 이도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세계를 닫아야 한다. 이대로라면, 정말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을 이도하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리고 이도하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저로 인해서 또다시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걸 볼 수는 없다.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게 그대라는 걸 알 테니까.’
그가 말했듯 제가 좋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너져 내릴 그 세계 안에 그가 있기 때문에.
시오한.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와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다.
“당신밖에 없어.”
이 방법뿐이다. 아이라를 그렇게 다 헤집고도, 헤집고 나서야 남은 마지막 방법. 시오한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엘하시온이 그의 먼 선대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 자체가 앙그라엘의 끝과 이리스티리움의 시작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만두면 된다. 세계를 닫고도, 그녀가 엘하시온의 죽음을 돌이키지 않기를 선택하면 된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해밀턴 블랙이 죽어 세계가 닫힌다고 해도 시오한은 괜찮을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제발.”
그러니 이도하는 얼마든지 애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제가 얼마나 애원하든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
그 사람 말고는.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없는 텅 빈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그가 손을 뻗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헤치고,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에 닿는 순간, 물기에 젖은 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푸른 섬광으로 물들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와 번쩍이는 붉은 불빛, 진동하는 이명 속에 밖으로부터의 고함 소리도 섞여 든다. 쿵! 밀폐된 방 안으로 충격이 가해졌다. 치밀하게 조성되어 애초에 무언가가 스며들 틈새 따위도 없는 곳이지만, 저들이 이토록 여태까지 이 방 안에 조금도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도하가 그걸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방 안에는 이미 이도하의 힘이 가득 퍼져 있었다. 우웅- 이명이 울리며, 그 힘이 떨기 시작했다. 전염되듯, 우르슬라의 눈동자에도 푸른빛이 깃들었다. 그녀가 조금 고개를 들었다.
천 년 전의 오즈로 돌아가는 방법. 천 년 전이라고 해도 결국 오즈다. 정당하게 계약주의 마력을 이용하자면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야 하는 힘이니 계약주가 죽을 것이고, 멋대로 넘어가자면 또다시 세계를 부수게 될 것이다. 이도하가 에너젠의 수조에 저장되어 있던 마력을 이용한 건 시오한이 이곳에 넘어와 있던 덕분에 쓸 수 있었던 편법이었다. 저장된 마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무엇보다도 시오한이 없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쓸 수 없는 편법.
그러나 깨닫고 나니, 방법은 하나 더 있었다. 천 년 전의 오즈와 닿아 있는 이, 우르슬라가 여기 있었으니까.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곳으로 난 길이나 다름없다.
이도하의 섬광으로 물든 그녀가 이도하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 주변이 새하얗게 번졌다. 번쩍거리는 붉은 조명이 그에 쓸려 사라지고, 치솟는 이명에 알람 소리도 묻혀 사라진다. 일순 모든 게 사라졌다.
바람이 이도하를 스쳤다. 서늘한 냄새가 나는, 밤바람이다. 이도하가 눈을 떴다. 낡은 벽난로도, 텁텁하게 데워진 공기도 없다. 옥상에 선 그의 발밑으로 키가 작은 건물들이 무수히 늘어서 있다. 불이 꺼진 밤이었다. 꽉 찬 구름이 천장처럼 답답하게 밤하늘을 가려 빛이라고는 없었다.
그 아래, 깜깜한 밤에 파묻힌 탑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진리를 깨고 이치를 거스르는 방법을 연구한 이들이 세운, 마법사의 탑.
그 앞에, 마차가 서 있다. 뿔 달린 하얀 사슴의 문장이 빛도 없이 창백하게 도드라졌다. 기사 몇몇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이도하가 조용히 발을 옮겼다. 옥상 가장자리에 다다른 그가 시선을 내렸다. 혹시나 했지만,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밤이다. 불사를 꿈꾼 왕이 아들과 딸을 죽인 날. 앙그라엘의 이름조차 남지 않은 역사 속, 미래를 꿈꿨던 공작가의 장자가 스러진 날. 수없이 되풀이되었을 수많은 밤 중 하나.
이도하가 발을 내디뎠다. 저 탑 안에, 그가 있다.
엘하시온.
어쩌면 우르슬라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는, 유일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