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느슨한 바람이 불어 긴 코트 자락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서 있었던 게 고작 며칠 전에 불과한데 그사이에 날씨가 조금 더 훈훈해졌다. 그때는 참새가 짹짹 우는 아침이었고, 지금은 까만 밤인데도.
이도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사방에 빛이라고는 한 점 없었다. 달도 없는 하늘에는 별만 흐드러지게 흐르고 있다. 저 밖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건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처럼 마냥 예쁘다.
세상과 동떨어진 양 홀로 오도카니 서 있는 저 집처럼. 이도하가 발을 내디뎠다. 바스락, 이제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 풀들이 그의 발에 밟혀 누웠다. 헛간에는 불이 꺼져 있고,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으로는 은은한 불빛이 스친다.
그가 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그 빛은 깜빡이지도 않고 내내 그대로였다. TV 따위는 켜 놓지 않은 것 같았다. TV 같은 게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걸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탓에.
요즘 시대에 도어 록도 아니고, 정직하게 열쇠 구멍이 있는 문고리를 물끄러미 보던 이도하가 문득 픽 웃었다. 그가 낡은 문고리를 쥐고 서슴없이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삐걱- 신음 소리를 내며 그대로 열렸다. 이도하가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두고 있었고, 콧등에는 안경이 얹혀 있었다. 집 안에 커피 냄새가 잔잔하게 감돌았다.
<어울리지 않게 웬 안경.>
척척 걸어 들어간 이도하가 그의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앉았다. 해밀턴 블랙이 시선으로 그를 쫓다가, 예의 그 안경을 내려놓았다.
<이래 봬도 83세라. 눈이 어두워.>
<83세는 무슨 얼어 죽을. 천 살도 넘은 주제에.>
<합쳐서 그렇지. 이번 생은 83년을 산 게 맞아.>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끝나지 않은 시작’. 끝은 없지만 매번 시작을 하기는 하거든.>
<왜, 이름을 우로보로스로 하지 않고.>
꼬리를 문 뱀. 끝나지 않는 무한함의 상징. 푸른 눈동자로 빤히 이도하를 보던 해밀턴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았겠다, 하는 기색으로.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기다리듯 이도하를 보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표정 없이 그를 보고 있던 이도하가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아.>
그가 말했다.
<당신 말도 맞고, 주승현 말도 맞아. 좆같지만 사실이긴 하지.>
<유감이군.>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는 지껄이지 말고. 사실이라고 해서 내가 괜찮다는 말은 아니니까. 당신 정도 되면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라는 게 생기지 않아?>
<글쎄.>
손을 놓자, 해밀턴 블랙이 읽고 있던 책이 소리 없이 덮였다. 이도하가 흘긋 책의 뒷면을 바라보았다. 뭐 대단한 거라도 읽는가 했더니, 그냥 소설책이었다.
<인간은 봐도 봐도 알 수가 없던데. 어떤 때는 참 밉다가, 어떤 때는 또 안쓰럽고 불쌍하다가, 어떤 때는 또 사랑스럽다가. 하지만 그래서 더 잔인하고 원망스럽고, 그렇지.>
<그래서 혼자 평화로운가.>
지금 닥친 재앙으로 인해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특기자들도, 계약자들도 틀림없이 있을 텐데. 그가 ‘우리’라고 부르는 이들이.
<평화?>
물었던 그가 곧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밀턴 블랙이 까맣게 밤이 내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 그렇다기보다는, 사람이 죽는 게 참 별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이지. 자네 말대로 천 년을 살아 보면 많은 걸 겪게 되거든.>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당장 지금은 재앙 같고, 지옥 같고, 세상이 끝날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말이야. 이번엔 좀 경우가 다르지만.>
무심한 눈이었다. 사막을 굴러다니는 돌조각처럼.
<…저 사람들한텐 별일일걸.>
이도하가 말했다.
<당신 죽음도.>
<…그렇구나.>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몸을 늘어뜨린 해밀턴 블랙이 문득 테이블을 한번 쓸어 보았다. 제가 보던 책에 시선을 주었다가, 창가에 놓인 화분으로, 거미줄이 쳐진 천장으로, 잡다한 것들이 가득 놓인 부엌으로, 고양이가 졸고 있는 소파로 옮겨 간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에 잠깐 온기가 서렸다. 그가 다시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렇네. 좀 묘한걸.>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이상한 기분이야.>
<아쉬워?>
<…놀랍게도.>
그가 순순히 시인했다. 그건 그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감정인 양 생소해 보였다. 아니, 아주 오랜만에 상기하는 감정 같았다. 생각에 잠긴 것 같은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물 한 방울이 그에게 스며드는 것 같다.
무감각하고 무기질 같아 보이던 남자는 조금씩 더 부드러워졌고, 조금씩 더 연약해졌다. 겉모습이 명백히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저 마른 껍데기 같아 보였던 그에게 이제야 세월이 녹아드는 것처럼. 진짜 엿 같네. 이도하는 무심히 생각했다.
<놀랍게도, 미련이 생겨.>
<유서 남길 사람 따윈 없을 테고.>
<없지.>
<다행이네. 나도 그런 친절을 베풀 기분이 아니라.>
<어찌 결심했지?>
해밀턴 블랙이 물었다.
<뭘?>
이도하가 되물었다. 바람 소리도, TV 소리도, 새소리도 없이 냉장고가 웅웅 돌아가는 소리만 남은 적막 가운데 사뭇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선택이 아니었나. 자네의 계약주와 세계 중의.>
<아, 그거.>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나뭇결이 그대로 남은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진 각종 잡동사니. 책, 잡지, 신문. 이파리 끝이 조금 마른 화분.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제 숨소리를 듣던 이도하가 말했다.
<선택 안 하기로 했어.>
<…….>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해밀턴 블랙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들이 실수한 게 있어.>
이도하가 말했다.
<내 부모님의 머리를 건드리고, 기억을 건드리고…. 내가 평범하게 자라도록 한 거 말이야. 왜 그랬는지는 알겠거든.>
그들이 이도하에게 경각심 따윌 가르칠 수는 없었을 테니까. 8살의 이도하가 멋대로 계절을 바꾸고, 시간을 건드리고, 사소한 나비 따위라도 생명까지 만들어 내는 모습을 세상이 고스란히 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작 그 조그만 아이가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세상이 알았더라면, 그들이 원하던 그런 세상 같은 건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식이든 공존이든, 특기자와 비특기자가 서로 의식하지 않고 사는 평범한 세상 따위는. 저를 위해서였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저를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이도하는 알았다.
<근데 결국 마지막에 이런 선택을 하게 할 거였으면, 내가 평범하게 자라게 하지 말았어야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으로 키우지 그랬어. 세계를 구하는 게 내 사명이고,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라고. 사명감으로 가득하게. 그랬으면 기꺼이 희생했을지도 모르는데.>
<…….>
<이걸 뭐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또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주머니에서 손을 뺀 이도하가 식탁 위로 몸을 기대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해밀턴 블랙을 마주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아니면, 날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만들지 말지.>
<…자네의 그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그럴 수 있었겠지.>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시오한 오르페노스. 그는 모든 것이 변수였다. 애초에 그의 존재가 모든 것을 바꾸게 만들었다. 그가 이도하를 소환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유일하게 이도하를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이로 점쳐진 이였지만, 그럼에도 이도하를 부를 이유가 전혀 없는 이였다. 황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부족할 게 없었다. 인소더블은 가성비랄 것이 없는 존재다.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해 그에게 뭔가를 바랄 수도 없었다. 실이면 실이지 득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황제는 이도하를 소환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환으로 모든 목표를 이룬 것처럼. 해밀턴 블랙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가 인소더블을, 이도하를 소환했는지. 그의 얼굴을 본 이도하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러니 난 다 가져야겠어.>
<뭐?>
<다 가져야겠다고.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세계도, 시오한도, 무엇 하나도 놓지 않을 생각이다. 이도하가 일어섰다. 드르륵, 의자가 밀려났다. 해밀턴 블랙이 이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우웅- 바다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듯, 이명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도하의 동공 주변으로 푸른빛이 너울거리며, 까만빛을 삼키고 점점 번져 나간다.
<…무슨 짓을 했지?>
<부탁.>
해밀턴 블랙이 물었고, 이도하가 짧게 대답했다.
<애원. 해 봤나 모르겠네.>
우우웅- 이명이 짙어졌다. 사위가 흔들렸다. 이제 완전히 새파랗게 물든 눈동자로, 이도하가 해밀턴 블랙을 바라보았다. 해밀턴 블랙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탁, 애원.
동아줄을 잡는 심정이었다. 벼랑 끝에서 돌멩이를 붙잡는 심정이었다.
세계를 닫아야 한다.
결국엔 깨달은 그 벼랑에서 붙잡은 동아줄이자, 돌멩이.
우르슬라.
그래, 우르슬라를 찾아갔었다. 낡은 목조건물을 뒤흔들며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이명 속에서, 혼란스럽게 절 바라보는 해밀턴 블랙을 보며 이도하는 이틀 전을 떠올렸다.
옮겼구나.
이도하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붉은빛이 버럭 화라도 내는 것처럼 불길한 빛으로 번쩍거리고, 알람 소리는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 쥐어짜는 것처럼 높고 우렁찼다. 자박, 이도하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소리는 물론 제 생각도 들리지 않을 것처럼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제 심장 위로 내디딘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한 걸음이었다.
“…우르슬라.”
그의 앞에 앉은, 우르슬라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