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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23화 (222/250)

223화

총알은 이도하의 손안에서 흩어져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 사라져 버렸다. 진짜 총알이 아니라, 특기였다. ‘포식자의 엄니’. 가격당한 이의 기력을 빨아들이고 체력을 빼앗아 가는 힘이다.

조금 전 이 아이라 건물 전체를 포함해 그 안의 사람들까지 다 훑어 내다 반쯤 미칠 뻔했던 이도하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좀 더 굴리자 그는 이 특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화르르-!!

다시 화염이 덮쳤다.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이도하가 김윤혜를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떨어져 그대로 그들을 집어삼켜 버릴 것 같던 화염이 보이지 않는 것에 가로막힌 것처럼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 귀를 울려 대는 이명,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로 시끄럽다. 옷자락이 쉴 새 없이 펄럭거리고, 머리칼도 온통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일그러진 김윤혜의 얼굴이 보였다.

“다 몰려올 거예요! 가야 돼요, 이도하 씨!!”

“어쩌려고 이러냐.”

“어쩌긴요, 저 인간 말대로 협박이든 협상이든 뭐든 일단 붙잡아 놓고 해 보려는 거지!!”

이도하가 손을 모았다. 손끝에서 조금 전 날아온 것과 같은 검은색 총알 두 개가 뭉쳐졌다. 탁, 가볍게 손을 튕기자 총알 두 개가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

불꽃을 뚫고 쇄도한 총알 하나가 정확하게 여자를 맞혔고, 하나는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여자가 억, 꼬꾸라졌다. 부질없이 허공으로 버려지는가 싶던 총알 하나는 별안간 아래로 방향을 홱 틀었다. 알아서 타격점을 정확히 찾아갈 것이었다.

바람에 갈기처럼 휘몰아치며 다시 한번 몸집을 키우려던 화염이 조그만 촛불처럼 훅 꺼졌다. 이도하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머리도 몸도 여전히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정신을 차린 참이었다. 김윤혜가 그의 가슴팍을 퍽 두드렸다.

“얼른 가요!”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바람이 뚝 멎었다. 그들은 벌써 다른 곳에 서 있었다. 바람도 없고, 머리 위에 깔린 어두운 하늘도 없는 조용한 실내다. 이도하가 김윤혜를 내려놓았다. 완전히 산발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김윤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독일.”

“네?”

“여기, 독일 호텔 방. 김윤혜 씨 독일어 잘하니까, 괜찮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주 불법적으로 국경을 까마득하게 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윤혜는 잠시 이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것 같았다. 원래 이도하의 옆에 있으면 세상에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다는 걸 그녀는 아주 일찌감치 깨달은 바였다.

어떻게 했냐, 이게 되냐, 라거나 우와, 같은 감탄사는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그녀가 와락 이도하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까도 그랬지만, 거의 멱살을 잡는 것에 가까웠다.

“이도하 씨, 아니에요!”

김윤혜가 다짜고짜 말했다.

“뭐?”

“그 노인네가 노망난 거예요, 이도하 씨 탓 아니라고요!”

갑자기?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김윤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윤혜는 전혀 감을 못 잡은 것 같은 이도하의 반응에 환장하겠다는 듯 발을 구르고는 버럭 외쳤다.

“왓셔 릴튼 말이에요! 미국의 그 교수!”

“…….”

여전히 모르겠다. 이쯤 되자 김윤혜는 오히려 허탈해진 것 같았다.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은 김윤혜가 이도하를 놓았다. 나 뭐 한 거야.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중얼거린 그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기사였다.

<‘오즈 연구의 권위자’ 미국 왓셔 릴튼 교수, 이번 대지진 원인으로 한국 ‘삭제’ 현상 언급.>

아. 이도하가 짧게 반응했다. 언뜻 본 것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쨌든 권위자라는 이 교수가 이 대지진의 원인으로 절 들었다는 말이라는 건 알겠다.

권위자는 무슨, 김윤혜는 화면을 꺼 버리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도하가 보기에는 권위자가 맞는 것 같았다. ‘삭제’ 현상이라면 결국 시오한이 이곳에 왔다 간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니, 아주 정확하게는 아니라도 대강 큰 줄기는 맞힌 셈이다.

애초에 마주치지 말았어야 하는 두 세계, 그 사이로 벌어져 깨진 틈. 그 사이로 몸을 욱여넣고 틈을 더 헐겁게 벌린 저. 결국 그로 인해 시오한이 이 세계로 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거고, 세계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중요한 건, 겨우 그 말 하나 하자고 김윤혜가 그렇게 죽어라고 제게 뛰어왔다는 사실 같다. 이게 다 제 탓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의외다 싶으면서, 또 참 김윤혜답다.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신음 같은 탄식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짧게 새어 나갔다.

“정말 이도하 씨가 문제였으면 이도하 씨가 처음 소환됐을 때 진작 난리가 났겠죠. 유리도 처음 구멍을 낼 때 위험한 법이라고요. 다 박살 날 위험이 있던 건 그때지. 뭘 이제 와 이도하 씨 때문이래.”

아무 말이 없는 이도하의 앞에서, 김윤혜가 투덜거렸다. 드릴을 쓰듯 손가락을 세워 흔들면서. 그 모습을 본 이도하가 미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사람들이 다 제정신이 아니라 누구든 세워 놓고 총질할 대상이 필요해서 그래요. 무슨 말만 하면 우르르, 와르르. 캘리포니아 때까지 들먹이는데, 그렇게 따지면 누적설이 더 맞는다는 말….”

김윤혜가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를 한 것처럼 쯧, 혀를 차더니 슬그머니 이도하의 눈치를 보기까지 한다. 이건 정말 김윤혜답지 않은 짓이었다.

“…이도하 씨보고 세계를 닫으라는 말은 아니고요.”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을 가격당한 것처럼 숨이 턱 막혔고, 온몸이 싸늘해졌다. 김윤혜가 당황한 듯 시선을 돌린다. 이도하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꽉 주먹을 쥐었다.

“너, 그건 어떻게….”

“…이도하 씨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없는 건 진즉에 알고 있긴 했는데, 그래도 뉴스 좀 봐요. …속은 터지겠지만.”

미간을 구긴 김윤혜가 말했다. 곧 깊은 한숨을 내쉰다.

“이도하 씨가 주승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알아요. 나도 썩 좋진 않고. 근데 내가 보기에 이번에는 주승현이 맞아요. 이도하 씨 실드 치는 게 아니라, 팩트가 그렇다고요.”

“주승현?”

“누적설이요. 릴튼 교수한테 반박해서 그 이론 제시한 게 주승현 이사예요. 지금 사태가 오랫동안 오즈의 마력을 이곳에서 써 온 부작용이라는 이론이죠. 인소더블인 이도하 씨가 너무 규모가 큰 특기를 멋대로 쓴 반작용 같은 것 때문에 세계에 이런 재해가 닥친 게 아니라.”

김윤혜가 이어 설명했다.

“마력이 사실 우리 세계에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환경오염도 없고, 고갈될 일도 없는 완벽한 자원이라고 여겨졌지만 그게 아니라 사실 여태 몰랐던 거라고. 두 세계는 완벽하게 서로를 지우려고 하잖아요. ‘삭제’ 현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런데… 그 마력을 여태 펑펑 써 온 부작용이 누적되다가 결국 터진 거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막힘없이 말하던 김윤혜가 시선을 돌렸다. 입술을 축인 그녀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상의 피해를 막으려면 세계를 닫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건 이도하 씨뿐이라는 말에는 이견이 없었고요.”

“…그래.”

그랬다고.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주승현의 기억을 읽은 이도하는 그녀가 해밀턴 블랙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제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서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라던 그녀를 후원한 게 해밀턴 블랙이다. 그녀가 공부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갈 수 있도록. 그러나 지금의 집행 이사 자리에 오른 건 순수한 주승현의 힘이었다. 과연, 똑똑한 여자다. 징그러울 정도로.

이렇게 교묘하게 짜깁기를 해서 쐐기를 박아 버리는 걸 보면.

“언론에는 안 밝혀졌지만 회의장에서는 그러니까 괜히 이도하 찔러 대는 짓은 그만해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차라리 가서 빌어라, 엿 같은 자존심 좀 집어치워라, 그랬다고 하기는 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이게 위로도 위안도 아니라는 걸 안 김윤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직까진 다 추측일 뿐이에요.”

“조금 전엔 팩트라더니.”

“…내가 언제요. 나 안 그랬는데.”

김윤혜가 시치미를 뚝 뗐다.

“그래서… 그걸 팩트라고 하면서도 세계를 닫으라는 말은 아니라고?”

돌아선 이도하가 허리를 굽혔다. 미니바에서 생수 한 병을 따며, 그가 말했다.

“어떻게 그래요?”

“왜? 당연하지 않아?”

엘하시온을 모르는 김윤혜는 모른다. 세계를 닫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세계를 닫으면 어떻게 되는지. 연구원의 입장으로서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 그녀에게 세계를 닫는다는 건 단절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계약의 가장 처음부터 지켜봐 왔던 계약주와 계약자가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

두 사람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는 대신, 두 개의 세계를 모두 구하는 일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 그래요.”

그런데도 김윤혜가 말했다. 좀 시무룩한 것 같은 목소리로. 등을 돌리고 선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하릴없이 픽 웃는다. 뚜껑을 딴 생수를 털어 넘기더니 김윤혜의 머리를 슥, 한번 쓰다듬는다.

김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손을 털어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아까 그건 뭔데요? 아이라에서.”

“찾아야 할 게 있어서.”

“아니, 그래도 무슨… 그래서 찾았어요?”

“…아니.”

이도하가 손을 떨어트렸다. 그가 돌아섰다. 김윤혜가 이도하의 등을 향해 물었다.

“어디 가요?”

“부탁하러.”

“네?”

김윤혜가 되물었으나, 이도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앞뒤를 다 잘라먹은 대답을 그녀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탁을 한다고? 이도하가? 이런 때에? 누구한테 뭘? 우두커니 서 얼굴을 구긴 채 생각하던 김윤혜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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