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이를 악문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이건 그냥 제 문제였다. 바닥에 나뒹구는 파편들, 무너진 건물, 재가 내려앉은 것처럼 어둡게 덮인 하늘. 그을음의 냄새처럼 매캐하고 비릿하게 올라오는 먼지 냄새, 빗소리 속에 섞인 사람들의 욕설과 울음소리. 피와 먼지가 묻은, 쓰러진 살덩이.
그런 것들을 보는 순간부터 배 속이 꼬이는 것처럼 울렁거리기 시작하고, 폐가 굳어 버린 듯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더니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귓가에 멍멍하게 울리는 게 이명인지, 비명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도하가 거칠게 머리를 털어 냈다. 비틀거리며, 손에 걸리는 대로 대충 무언가를 잡고 지탱한 이도하가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부서진 난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삐걱거린다. 바람에 조금 길어진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리며 눈가를 찔러 댔다. 그곳은 아이라 건물의 옥상이었다.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시오한을 이 세계로 끌어당겼던 곳. 그의 눈을 통해 그곳을 바라보다가, 세계를 뚫고 그의 손을 잡았던 곳이었다. FBI의 레무스 비숍이 ‘세계에 구멍이 뚫려 세계에 누수가 일어난 것 같았다’고 말했던 곳.
이도하가 부서진 난간 밖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허공밖에 없다. 저 아래 공원처럼 조경된 정원이 내려다보일 뿐이다. 레무스 비숍이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꼭 무슨 포탈이라도 있을 것 같았지만, 이도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바람이 휘몰아치는 허공일 뿐이었다. 그 허공을 내려다보던 이도하가 뒤로 물러섰다.
후, 이도하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가 제가 딛고 선 바닥, 아이라의 옥상을 내려다보았다. 이 거대한 건물은 외벽의 창문이 죄다 깨져 나간 걸 빼고는 무사했다. 원래부터 돈을 쏟아부어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주하는 특기자들이 많아 그들이 뭔가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바로 이 건물이, 계약과 오즈, 계약자와 계약주에 대한 가장 많은 자료가 보관된 곳이다. 자체 서버를 쓰는 디지털 자료는 물론이고 수기로 작성한 온갖 보고서와 연구원들의 낙서까지 모조리 보관되어 있으며, 그에 관해 평생 연구해 온 이들이 가득한 곳. 오즈와 계약에 관해서라면, 대한민국에 이곳만 한 곳이 달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하는 이 거대한 건물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퍼진 서고 모두와 디지털 자료들, 그리고 낙서들까지 다 하나하나 뒤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우웅-.
특유의 이명이 울리고, 유독 까만 눈동자가 다시 새파란 섬광으로 물들었다. 주변의 공기도 함께 요동치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명은 점점 더 높은 음으로 치닫고, 그럴수록 새파란 눈동자도 점점 더 밝은 빛으로 달아오른다.
휘몰아치던 바람이 멈추었다. 건물 전체가 거대한 반경 안에 갇혀 바깥과는 분리된 것처럼. 이도하의 머리카락이 부유하듯 떠올랐다.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도하가 무릎을 굽혔다. 그의 손끝이 바닥에 닿은 순간, 고요한 수면에 깃털이 떨어진 것처럼, 딱딱한 바닥에 푸른 파동이 일었다. 조용한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파동이 점점 커져, 마침내 건물을 완전히 그 안에 가둘 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때였다. 가둬져 있던 물이 쏟아지듯 동그랗게 번진 파동이 그대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부유하듯 떠올랐던 이도하의 머리칼도, 먹먹한 적막도 함께 쏟아졌다.
우웅-!!!
사위가 진동했다. 건물 전체에 완전히 스며든 힘이, 건물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
눈가를 찌푸린 이도하가 이를 악물었다. 사물의 흔적을 읽어 내는 것이나, 사람의 기억을 읽어 내는 것이나 결국 다 거기서 거기다. 원리는 비슷했다. 사물의 흔적은 편집점도 없는 객관적인 기억의 나열이라 내용이 방대해서 사람을 지치게 하고, 사람의 기억은 온갖 감정이 버무려져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해서 두 가지 중 하나라도 가능한 특기자라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시도한다는 게 꽤 효율적인 동시에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 터였다. 이도하가 지금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미쳐 버린 우르슬라의 기억을 읽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수천만 번 반복된 그녀의 기억은 결국 다 같은 내용이었고, 망가진 그녀의 정신으로 인해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있어 속을 다 뒤집어 놨었다.
그러나 이건, 얼마나 많은 기억과 흔적을 다 끌어올 수 있느냐 하는 인소더블의 능력을 떠난 문제였다. 그걸 받아들이는 이도하가 감당할 수 없었다. 머리고 몸이고 터질 것 같다. 혼란, 분노, 좌절, 절망, 그런 감정들이 찰나의 순간에 수십 번씩 번쩍거리며 이도하를 뒤집어 놨다. 그 와중에 이 거대한 건물에 보관된 자료들은 그런 이도하에게 욱여넣어지듯 쏟아졌다.
“----.”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고, 깨진 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연구를 하고 있었고, 책을 보고 있었다. 돌아보는 신은호의 얼굴이 보인다. 문이 열리며 다급하게 뛰어나가는 시야가 보이고, 세수를 하느라 얼굴에 끼얹어지는 차가운 물이 느껴진다.
수백 가지의 얼굴들이 겹쳐지고, 수백 가지의 감정들이 뒤섞인다. 이도하는 온갖 곳에 있었고, 온갖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제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강렬한 통증이 이도하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도하 씨! 정신 차려요!”
새된 비명에 이도하가 퍼뜩 눈을 떴다. 그에게로 쏟아지던 기억들이 단칼에 끊어졌다. 태양을 맨눈으로 바라본 것처럼 시야가 멍멍해 이도하는 여러 번 눈을 깜빡여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날려 버리는 타격감이 퍽-! 뺨에 작렬했다. 이도하는 그제야 제가 누구인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 냈다. 동시에 날렵한 것이 이도하를 들이받았다.
“이도하 씨!!”
그렇지 않아도 오십만 번쯤 치댄 빨랫감처럼 늘어지는 몸에 가해진 충격은 가볍지 않았다. 크게 밀쳐지며 이도하는 반사적으로 제게 부딪쳐 온 몸을 감싸 안았다. 화르르! 후끈한 열풍이 휘몰아쳤다. 밀쳐지지 않았더라면 1초 전까지 이도하가 있었을 자리에 새빨간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건 뭐야.”
불꽃? 이도하가 약간 멍하게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이 건물의 모든 이의 기억과 모든 자료를 제 머리에 다 때려 넣느라고 머릿속이 넝마가 되기 직전인 이도하였다.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저 불꽃으로 절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약간 어이가 없어서였다. 사람과 불꽃 그 사이 어딘가의 존재라는 레무스 비숍쯤은 와야지.
“이도하 씨, 얘기 좀 하죠!”
어느샌가 옥상에 나타난 여자가 말했다.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음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이도하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불꽃을 다루는 특기로는 누가 뭐래도 레무스 비숍의 이름을 넘을 이가 없지만, 그래도 개중 한국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TV에서도 그래 보였지만 불길부터 냅다 갈기는 걸 보니 성질머리가 보통은 아닌 듯했다.
“이도하 씨!!”
“김윤혜 씨, 너 진짜 복싱 제대로 배웠더라.”
여자를 무시하고서 흘긋 제 품 안을 내려다본 이도하가 말했다. 그의 품 안에 거의 짐짝처럼 구겨진 김윤혜가 이도하의 멱살을 잡다시피 하고 있었다. 운동복 위에 패딩 하나 걸쳐 입은 차림새에, 못 본 사이 어깨까지 자란 머리칼은 미친 듯이 휘날려 산발이 되어 있다. 믿기지 않게도, 그녀를 보자 이도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키는 크지만 종잇장처럼 마른 김윤혜가 절 그 정도로 밀쳤다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이도하가 휘청거렸다. 으악! 김윤혜가 비명을 질렀고, 이대로 빼도 막도 못 하게 넘어지는가 싶은 순간에 도약을 한 이도하가 제대로 발을 디뎠다. 다른 곳도, 심지어 아이라의 다른 건물도 아니고 고작 몇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에 다시 화르르 불길이 덮쳤다. 이도하가 머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완전히 푸른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여자를 바라보았다.
“왜 이래요?!”
“지금 제대로 도약을 할 정신이 아니라…. 넌 왜 여기 있어. 어떻게 알고.”
“내가 이도하 씨를 몰라요?!”
김윤혜가 버럭 소리쳤다. 40층에 이르는 건물만 세 채에다가 부속 건물들까지 많은 아이라를 통째로 집어삼킨 그 규모에다가, 특유의 이명. 한국의 내로라하는 특기자들이 다 모인 최첨단 시설에 연구원들까지 집합해 있는 이 장소에 특기를 냅다 뿌려 버리는 그 성질머리까지.
방금 그 전례 없는 기억 싹쓸이를 겪고도 그게 누가 한 일인지 모르는 아이라 연구원이라면 접시 물에 코 박는 게 그나마 남은 인생이 덜 수치스러울 길이다.
“이도하 씨, 요 근래 아이라랑 사이가 영 안 좋았다는 거 아는데, 해묵은 건 이따 해결하기로 하고 지금은 좀 멀리 보는 게 어때요?”
멀찍이 선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멀리, 이도하에게는 그 말이 퍽 우습게 들렸다.
“물론 아쉬울 거 없겠지만, 세상 혼자 사는 거 아니잖아요. 지금이면 아이라 쪽에서도 먼저 숙이고 들어올 거예요. 뭐, 에너젠 일이라든가. 없던 일로 하는 거죠. 아이라 꽤 쓸모 있거든요. 내가 보기엔 칼자루 제대로 잡을 기회 같은데.”
“산 채로 구워 먹으려는 주제에 무슨.”
“아, 이거야. 그쪽이 워낙에 행동반경이 넓으니까. 안 그랬으면 진즉 날랐게. 내가 제일 가깝기도 했고.”
여자가 손에 든 담배를 흔들었다.
“아니면 우리 다 발라 버리고 훌쩍 또 가 버리는 모습 보여 줄 생각은 아니죠? 이 상황에? 그럴 바엔 그냥 적당히-.”
“아, 조은성 씨, 닥쳐요!”
이도하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김윤혜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때 그녀가 홱 옆을 돌아보았다.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섬광이 번뜩였다. 그녀의 코앞에, 검은색이 번들거리는 기이한 총알이 우뚝 멈춰 있다.
이도하가 그것을 잡아챘다. 헉, 김윤혜가 잠시 멈췄던 숨을 토해 냈다. ‘멈추고 싶은 순간’. 운동력을 가진 것을 대상으로 했을 때 김윤혜가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