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남자가 거칠게 욕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렇게 답이 없는 것 같을 때마다 ‘그 사람’이 떠올랐다. 셋뿐인 인소더블. 그중 유일하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한국의 이도하.
그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도하가 마법처럼 나타나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도하의 집이 이 근처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사람이긴 하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지진 당시 그가 보여 준 능력은 진짜였다. 그건 정말 굉장했다. 이도하가 도와준다면 남자는 그의 발치에 뽀뽀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켜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등을 생각하고 있던 남자는 옆에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배쯤 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에 푹 젖어 새까만 머리칼이 다 가라앉은 남자가 뒤에 서 있었다. 머리칼이 눈가를 다 가리고 있었으나 그걸로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숨겨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이도하!”
“뒤로 좀 나와 보라고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가, 이도하가 말했다. 어어어, 남자가 입을 벌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얼굴이 훤히 드러나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이도하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검은색 목티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코트를 걸친 평범한 차림이 그린 것처럼 멋있게 잘 어울렸다. 순간적으로 이런 상황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황당할 정도였다. 자그마한 얼굴은 TV에서 몇 번 보고 잘생기긴 했네, 했던 것보다도 두 배쯤 더 입체적이었으며, 인상이 몹시 서늘해 저도 모르게 약간 주눅이 들었다.
남자는 이 모델 같은 사람이 정말 이도하가 맞나, 어떻게 이도하가 여기 있나, 하며 절 의심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눈 밑의 계약명이 빗속에서도 아주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SNS에서 연예인이며 사람들이 다 따라 하는 걸 볼 때만 해도 허세 쩐다, 했던 것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이 남자는 이도하가 분명했다.
“미쳤다, 진짜 이도하다.”
남자가 홀린 듯 중얼거렸고, 이도하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 순간, 남자는 유독 까만 이도하의 눈이 푸른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물감에 색이 번지듯, 불꽃이 타오르듯 동공으로부터 일어난 그 빛은 순식간에 눈동자를 잠식했다.
저게 뭐야, 남자는 입을 쩍 벌렸다. 남자는 고등학생 때 특기자였던 반의 친구 놈의 섬광도 본 적이 있었다. 그 섬광은 이름에 걸맞게 잠깐 푸른빛으로 반짝였을 뿐이지, 결단코 저렇게 형형하게 빛나지 않았었다. 저게 어떻게 섬광이란 말인가. 명백히 ‘기운’이라고 할 만큼 일렁이는 푸른빛이 주변에 쏟아져, 내리는 폭우까지 물들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
그 순간 남자의 몸이 붕 떠올랐다. 흐억! 남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인형처럼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잔해 더미 바깥에 안착했다. 이제 보니, 그처럼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두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휘둥그레 뜬 눈들이 제각기 남자에게 꽂혔다가, 다시 잔해 더미 위에 선 이도하를 향했다. 날았다! 이도하의 특기로! 그 사실에 기겁함과 동시에 감격한 남자가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리고 남자는, 죽을 때까지 앞으로 제가 백 번도 더 넘게 떠들어 댈 광경을 목격했다.
우우웅- 뇌를 흔드는 것 같은 이명이 울렸다. 공기를 흔들고 뇌까지 닿는 것 같은 진동이었다. 거대한 기운이 주변을 장악한 것처럼 주변의 무언가가 달라졌다고 느낀 순간, 무거운 잔해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에만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가볍게. 무겁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거스르고, 허공에 유영하는 비눗방울처럼 움직이며 자리를 비켜 준다.
남자는 물론이고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말문을 잃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혔고, 이상하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떠오르는 잔해 사이로, 아래에 묻혀 있던 사람들을 발견한 순간 누군가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뚝 선 뒷모습만 보이는 이도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른 곳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저도 모르는 사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남자도 이도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가 살던 오피스텔, 그가 벌써 며칠째 잔해를 나르던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길이 닿는 하늘에 온통 무너진 잔해가 떠오르고 있다. 이도하가 저기 서서, 가볍게 바람이라도 쐬는 것 같은 모습으로, 이 근방의 모든 붕괴 현장을 다 띄워 올리고 있는 것이다.
“…….”
그야말로 기적 같은 광경에 완전히 넋을 놓았던 남자가 퍼뜩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이 한쪽에 마련된 텐트 밑으로 스르륵 옮겨지고 있었다. 몇몇 이들이 황급히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이도하가 잔해 더미에서 터벅터벅 걸어 내려왔다. 그가 비키자, 주변에 떠 있던 잔해들이 천천히 다시 떨어져 내린다. 아주 가볍게 착지하는 것 같았으나, 하나하나가 지면에 닿을 때마다 쿵! 쿵! 거인의 발자국 같은 묵직한 진동이 땅을 흔들었다.
“…구급차, 부를 수 있어요?”
텐트 앞에 선 이도하가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기분도 아주 안 좋아 보였다. 서늘해 보이는 인상도 거리감을 주는 데 한몫했다. 어떡해? 주춤거리며 그의 주변에 거리를 두고 선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았다.
“어, 어려워요!”
꿀꺽, 침을 삼킨 남자가 먼저 대답했다. 이도하가 흘끔 그를 보았다. 완전한 푸른빛으로 물든 눈동자를 마주치자 무릎이 다 시리고 힘이 쫙 빠졌다. 괜히 나댔다. 남자는 잠깐 후회했다.
언젠가 이도하가 마약 한 재벌 3세 새끼를 두들겨 주는 영상을 보며 신나 했던 남자지만, 그 대상이 제가 되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또 일단 한번 나대고 나니 좀 더 용감해질 수 있었다.
“병원도 지금 거의 다 마비 상태라서, 구급차 불러도 이제나저제나 기한 없이 기다려야 돼요.”
“…….”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보다도 더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어떡하지. 그냥 닥치고 있었어야 했나. 남자는 연신 폭우가 때려 대는 얼굴을 얼른 훔쳐 냈다.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비라도 어떻게 막아 주면-.”
남자가 합, 입을 다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쏟아지는 폭우라도 어떻게 해 주면 저희들이 뭘 해 보겠다는 의미였는데, 말하고 보니 영 헛소리를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부상자가 한둘도 아닌데 병원이 터져 나간 것까지야 이도하가 어떻게 해 주겠는가 말이다.
비가 정말 문제이기는 했는데, 구급차가 빨리 올 수 없는 게 비 때문만은 아니니 말을 꺼낸 맥락이 영 틀려먹은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을 들은 이도하가 얼핏 인상을 썼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
“…아니, 멈추는 게 아니라 막는 거면….”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멈춰? 뭘 멈춰? 남자가 말했던 건 그가 이 근방 전체의 무너진 건물들을 다 들어 올렸던 것처럼 잠시나마 이 주변이라도 비를 좀 막아 달라는 의미였다. 이전에, 그가 덮쳐 오던 거대한 파도를 반으로 갈라 도시 위로 들어 올려 버렸던 것처럼.
설마 이 양반이 기후도 조절할 수 있나? 남자가 약간 기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생각하는데,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도하로부터, 푸른 빛줄기가 빗속을 가르고 하늘로 화살처럼 길게 쏘아져 올라갔다. 어둑한 하늘을 가르듯 길게 궤적을 남기며. 빛은 그대로 구름을 꿰뚫고 사라질 것 같았으나, 구름에 닿지 않은 하늘 중간쯤에서 별안간 꺼져 버렸다.
다음 순간, 그곳을 시작으로 푸른 동심원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불길이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빛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잔영처럼 푸른빛이 어른거리며 남았다. 유리가 반짝이는 것처럼. 그 너머에, 꼭 물길이 흐르는 것처럼 뭔가 일렁인다.
놀라 고개를 꺾고 하늘을 쳐다보던 남자가 손을 내밀어 보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 정도로 쏟아지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남자는 곧 깨달았다. 저 위에 물결이 흐르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흐르고 있었다. 창 위로 빗물이 떨어지듯, 얇은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푸른빛 위로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지상으로 떨어지는 비는 없었다. 여전히 하늘엔 먹구름이 짙고 사위는 어두웠지만, 우비도 소용없을 만큼 쏟아져 내리는 비는 더 없다.
이도하가 정말로 비를 ‘막은’ 것이다. 이 땅과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막을 펼쳐서. 그리고 남자는, 장막이 펼쳐진 게 이 부근뿐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근을 넘어서, 어쩌면 이 도시 전체에. 아니, 어쩌면….
“…와.”
남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뭐라 할 말이 없었고…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그가 고개를 내렸을 때, 어느새 이도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텐트 안에 고이 눕혀진 부상자들과 멈춘 비, 바닥에 차곡차곡 곱게 누운 잔해들이 방금 그게 꿈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걸 증명했다.
“시발….”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틈에서 남자도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알겠다.
“인소더블 존나 만세, 시발.”
***
욱-.
입을 틀어막았던 이도하는 결국 한쪽에다가 속에 든 걸 전부 쏟아내고 말았다. 실 끝에 매달린 조그만 방울 속에 들어가 내내 흔들린 기분이었다. 속이 다 뒤집어졌고 머리도 흔들렸다. 퉷, 입 안에 찝찝하게 남은 것까지 전부 뱉어 낸 그가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이게 특기를 쓴 부작용이 아니라는 걸 이도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깟 잔해 몇 좀 들어 올리고 하늘에 장막을 치는 것쯤이야 이도하에게는 작은 돌멩이 몇 개 줍는 것과 비슷했다.
“정신 차려, 병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