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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20화 (219/250)

220화

“…왜.”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그를 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칼 위로 사슴의 뿔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제관을 쓴 시오한이었다. 태양의 빛줄기처럼 뻗은 속눈썹 아래 황금색 눈동자가 가만히 그를 훑는다. 여전히 기적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비로소 이도하의 얼굴을 보게 된 그가 옅게 웃음을 띠었다.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게 그대라는 걸 알 테니까.”

그가 말했다. 황금빛 눈동자가 찬찬히 이도하를 훑었다. 그의 모습을 제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그를 구하는 대가로, 그대가 죄책감에 아파하는 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야.”

이도하가 말했다.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이도하 자신이 듣기에도 확신이 없었다. 제가, 제 세계를 비롯해 시오한의 세계까지 모조리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으리라고는. 저는 괜찮을 거라고 이도하는 스스로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세계를 무너트리다시피 하고 도망쳤던 8살의 이도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매캐한 그을음의 냄새, 눈물, 피, 부서지고 무너진 모든 것들. 제게서 비롯된 그 비탄에 짓눌려 제 탓이 아니라는 그 한마디만을 기다렸던 이도하. 조금도 더 견디지 못해, 결국 외면하고 다 잊어버리기를 선택한 이도하. 저는 여전히 책상 밑에 숨어 벌벌 떨었던 그 이도하였다.

“나는….”

하지만 그럼 나는. 이도하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럼 저는 어떡하라고. 모두가 산다 해도, 그를 잃어버릴 저는. 저들 모두의 세상이 무사하다고 해도 정작 제 세상은 다 무너진 뒤일 텐데. 그땐 누가 절 걱정해 주고, 누가 절 안아 주지?

모리온. 신은호의 계약주였던 남자. 애초에 불순한 의도에서 출발한 발상 따위에 지나지 않았던 계약 양도를 정말로 실현 가능하게 만들었던 남자.

이도하는 이제야 그를 이해했다. 계약 ‘양도’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계약을 타인에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빤히 알았으면서도 그가 죽기 전까지 어떻게든 그게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마음을 이도하는 이제 알았다.

단 한 번도 그에게 의미 있었던 적이 없는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저로 인해 눈이 짓무르도록 울 아이 하나를 더 위했던 그 마음을.

“…멍청한 사람이네. 그대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다니. 아마 그자의 욕심 때문이었을 테지.”

“…아니야. 아니야, 시오한.”

시오한이 말했다. 그의 손끝이 이도하의 얼굴에 난 상처 위로 다가왔다. 솜털에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레 맴돈다. 손톱에 긁혀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는 따갑고 쓰라렸다. 그 손에 도리어 제 상처를 문지르듯, 그 위로 무너지듯, 이도하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대가 이리 염려하고, 슬퍼해 주고 있으니, 복에 겨운 자이기도 하고…. 이미 그것으로 충분할 거야.”

시오한이 이도하의 상처 위로 입술을 눌렀다. 살갗이 벗겨져 벌겋게 드러난 속살에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혀가 닿았다. 눈가에 엉망으로 난 상처 하나하나에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그는 이도하의 입가에 다다랐다.

그러나 손끝이 상처 위를 조심스레 맴돌았던 것처럼, 입술을 겹치지 않고 멈춘다. 기다리듯이. 온기가 느껴지나, 닿지 않는 거리에서. 이도하는 절 올려다보는 황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화이람. 그대가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그저 그자의 시간이 거기까지인 걸지도 몰라. 어찌 하나와, 나머지 세상 모두를 저울에 달겠어. 어찌 그대에게 그런 선택을 하도록 하겠어. 그래야만 한다면…. 그자의 시간이야말로 덤이었을지도 모르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이도하가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레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이도하가 먼저 파고들었다. 찍어 누르다시피 내리누르는 힘에 중심을 잃은 의자가 위태롭게 기울어지며 삐걱거렸다.

그가 하는 대로 다 받아 주는 듯하던 시오한이 이도하를 제게로 더 내리눌렀다. 그가 하는 입맞춤은 늘 다정하고 부드러웠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집요하게 이도하를 몰아붙이던 시오한은 이도하가 숨을 헐떡거릴 때가 되어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니 그대를 아프게 하지 말아. 무엇도 그대의 탓은 아니니.”

이도하의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감싼 그가 말했다. 기이한 빛이 모래처럼 일렁이는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 속에서 파란빛이 번쩍하는 순간, 그의 손안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이도하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시오한에게서 발현된 제힘이 제게로 흘러들어 오는 느낌. 마치 녹음된 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몹시 생소하고 낯선 느낌이었다. 이도하의 힘으로 그의 상처를 치유한 시오한이 손을 뗐다. 비로소 말끔해진 이도하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본다. 그가 말했다.

“선택이 정말 그 둘뿐이라면 말이야.”

“…뭐?”

“화이람, 그대는 그대잖아.”

시오한이 가늘게 눈을 휘었다. 이도하는 잠시 시오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는 뭐든 할 수 있잖아.”

“…….”

이도하는 말문을 잃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가 눈만 깜빡였다. 머리를 아주 시원하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선택이라는 건 제한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능한 몇 가지를 고르는 일인걸.”

“…어, 그렇지. 근데….”

그러나,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 건 그다. 해밀턴 블랙. 엘하시온과 우르슬라, 꼬일 대로 꼬인 그들의 인과로 인해 두 세계가 만났고, 벌어진 그 세계의 틈 사이로 이도하 저까지 드나드는 바람에 세계가 이리 무너지려 하고 있다고.

애초에 서로를 거부하는 두 세계는 만나서는 안 되었으며, 단지 이치를 벗어난 인소더블인 그들의 존재가 노루발처럼 세계 사이에 끼어 있던 것뿐이니 그 노루발을 걷어차 세계를 닫아야 한다고.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해밀턴 블랙은 모든 순간 진실만을 입에 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도하는 차라리 그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랄지언정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분명 맞다.

꼬인 인과도, 제 존재도, 그로 인해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하지만 정말, 저는 시오한과 세계 중 선택을 해야만 하나?

“…당신 말이 맞아, 시오한.”

이도하가 말했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말해 봐. 확신이 있었어, 없었어.’

‘있었어.’

‘…….’

‘간절함은 늘 기적을 부르니까.’

이도하가 다시 시오한을 꽉 한번 끌어안았다. 이마를 맞대고서, 그는 눈을 감았다. 잠시 그대로 있던 이도하가 곧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떤 것도 잃지 않을 방법이. 적어도, 그만은 잃지 않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들게.”

시오한이 황금빛 눈을 휘며 웃었다. 이도하의 몸이 푸른빛에 휩싸였다. 그 순간 시오한이 그를 붙잡았다.

“화이람.”

당장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빛이 그를 보았다. 거의 형체만 남아, 얼굴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시오한이 말했다.

“누구도 그대에게 그대가 원하지 않는 걸 강요할 수 없어. 그건 그대가 가장 잘 알아야 해. 화이람, 그대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잊지 말아.”

“…….”

거의 형체를 잃어버린 푸른빛이 문득 씨익 웃는 것처럼 일렁였다. 빛이 시오한을 감싸 안았다. 아직 남은 따뜻한 온기가 시오한의 입술에 닿은 순간, 빛은 수천 개의 파편으로 흩어져 버렸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대개의 빛은 금세 사그라들어 버리고, 몇 개만이 조금 더 맴돌다 떠올라 사라진다. 시오한은 손끝에 닿은 빛이 눈송이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을 잠깐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성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무실의 창문 밖으로. 언젠가 이도하가 다람쥐가 파 놓은 예쁜 굴 같다고 생각했던 집무실의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넓은 성도의 전경 위로, 회색 하늘이 카펫처럼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조용한 한숨 소리가 빗소리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Chapter 7. 그믐밤에 달이 뜬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게 깔린 먹구름으로 인해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할 수 없다. 씁쓸하고 탁한 먼지 냄새가 매캐하게 올라왔다. 복구는커녕 구조 작업조차 채 시작되지 못한 곳이 많은 상황이다. 폭우는 거의 절망이 쏟아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시발 진짜, 망할 거면 그냥 한 방에 다 망하든가, 시발… 좆같네, 진짜.”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옮기던 남자는 울컥 솟는 울분에 못 이겨 냅다 잔해를 집어 던지고 말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상체만 한 건물의 조각은 무거웠고, 보통의 체격을 가진 남자는 몇 시간째 이어진 구조 작업에 힘이 빠져 있었다. 한때 그가 살던 오피스텔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그저 돌덩이가 된 건물의 잔해는 겨우 그의 발치에 툭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걸 보니 남자는 더 울분이 치솟았다.

남자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물론 작은 중소기업인 회사는 아마 틀림없이 망했을 테지만, 망했든 안 망했든 이대로 인류가 다 갈려 나가는가 싶은 마당에 사실 그깟 회사 따위야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며칠 전, 예고도 없이 세상을 뒤흔든 지진이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줄곧 구조 작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딱히 제가 정의로워서는 아니었고,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딱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온 세상이 다 삐걱거리는 와중에 망연하게 앉아 뭐라도 나아지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정말 못 할 짓이었다. 이런 대재앙 앞에서 제가 얼마나 초라하고 쓸모없는 파편 같은 것인지 느끼고 앉아 있느니, 차라리 뭐라도 하며 쓸모 있어지는 게 나았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구조 작업에 뛰어든 사람 중 많은 이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구조 활동은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붙어도 붙어도 손이 부족했고, 중장비가 들어올 수도 없는 상황에 사람의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적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모두가 힘을 모아, 이따위 말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감동적으로 상황을 해결해 주는 일이지, 현실에서 넘을 수 없는 벽은 그저 넘을 수 없는 벽일 뿐이었다. 간절함만으로 안 되는 일이 되는 일로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좆같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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