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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19화 (218/250)

219화

그러나 이도하는 이제 와 사진을 찾은 게 과연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엔 가까이 가 본 적도 없는 스티커 사진관, 얼굴은 지나치게 갸름해지고 눈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게 나오지. 포즈 같은 건 잡아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바람에 정신없이 찍었던 그 사진 속에, 혼자 남은 저 자신을 이제야 발견한 게.

제 핸드폰에 남은 사진들처럼, 저밖에 없다. 그는 혼자 웃고 있었고, 허공에다 팔을 걸치고 있었으며, 혼자 웃기는 똥 모양 모자를 쓰고 있다.

그는 정말 어지간히 취했었던 게 틀림없었다. 어설프게나마 꾸며 보겠다고 온갖 장식을 다 떡칠해 놨으니. 글씨까지 써 놨다. 꽤 정갈하게 쓰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깃든 글씨는 점점 시간에 쫓겨 닥치는 대로 휘날리고 있다.

시오한. 이도하.

“…읏.”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이도하는 결국 울음을 토해 냈다. 뿌옇게 흐려졌다가 오히려 또렷해지는 사진 속 제 모습을 보며, 이도하는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는 제 오른쪽 눈을 움켜쥐듯 했다. 손톱 끝이 눈가를 파고들어 살갗을 벗겨 내고, 생채기를 내며 벌겋게 피가 배어 나오는 속살을 드러내도록.

화이람.

그렇게 새겨진 이름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이런 거였다.

세계가 제게서, 그를 빼앗아 가는 느낌. 그의 존재가 제게서 지워지려는 듯한 느낌.

지워졌으나 제게는 이깟 사진이라도 있다.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이나마 알고 있었고, 다 떠나 그에게는 피부를 다 벗겨 내도 들어낼 수 없는 계약명이 있었다. 사라진 흔적뿐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존재가 명확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사라진 아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어떤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아이. 세계가 끊임없이 지워 내려 한 아이.

심지어 그의 기억 속에서조차 계속해서 사라지려고 했을 절 붙잡느라고 그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오직 존재만이 증명이었던 저로 인해, 그는 붙잡아야 했던 건 도리어 제 부재였을 것이다. 제가, ‘없다’는 그 사무친 부재만을 그는 더더욱 움켜쥐어야 했던 것이다.

시오한.

[나를… 다시 그대가 없는 세상에 두지 마.]

이도하는 알았다.

제가 돌아갈 수 없다.

시오한. 이도하는 그가 없는 세상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화이람.]

그 순간, 묘한 공명을 가진 목소리가 울렸다. 침대 위로, 바닥으로, 공간의 높낮이를 다 무시하고 푸른 소환진이 방 안을 온통 푸르게 물들이며 펼쳐졌다.

시야가 새하얗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짧은 찰나 뒤, 이도하는 이미 누군가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따뜻하고, 단단하며, 늘 그를 바라마지 않는 품에. 소환의 여파로 떠올랐던 금 타래 같은 황금빛 머리칼이 차분히 내려앉으며 눈앞에 반짝인다.

“또 우는구나, 화이람.”

귓가에 다가온 입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찌 울지?”

이도하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헛소리든 농담이든 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시오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건 이미 다 글러 먹은 일이라는 걸 그는 깨닫고 말았다. 목이 꽉 메어 뜨겁고 아팠으며… 그냥 아팠다.

그가 절 안은 시오한의 몸을 더 그러쥐었다. 얼굴을 묻고, 몸을 붙였다. 그에게 그저 파묻히려는 것처럼.

“…….”

잠깐 멈칫한 시오한이 이내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잘게 입을 맞추며, 그는 이도하를 한참이나 그렇게 안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시간 뒤, 이도하가 말했다.

“…놓지 마.”

꽉 메이고 잠기고, 갈라지기까지 한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절 그러쥔 이도하의 팔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 시오한이 조금 뒤척거렸을 때였다.

“쪽팔리니까 잠시만 더 이대로 있자고.”

“그대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응, 그대 말을 들어야지.”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시오한이 답했다. 다만 그는, 안은 채로 이도하를 훌쩍 들어 올렸다. 이도하가 깜짝 놀라 그를 붙잡았다. 시오한이 몇 번 그를 안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렇게 안은 채로 들어 올리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키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으니 사실 얼마 들지도 않았을 텐데, 멀쩡히 선 채로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건 굉장히 불안했다.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다리로 그를 감쌌다. 웃음을 흘리며, 시오한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곧 그는 아주 푹신한 의자에 부드럽게 앉았고, 그렇게 되니 이도하는 자연스레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꼴이 되었다.

“…시오한.”

“응?”

이도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시오한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이건 좀.”

그렇지 않냐. 이도하는 차마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그래도 제가 24살… 시간이 좀 이상하게 엉켜서 그렇지 어쨌든 그와 동갑이니 또 따지고 보면 26살이기도 하고… 성인 남성이며…. 하여튼 어느 모로 보나 이런 자세를 취할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 않느냐, 하고 말하기도 참 낯간지러웠다.

“놓지 말라고 한 건 그대야.”

시오한이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맙소사. 잠시 아찔했으나, 어차피 저로서는 그의 힘을 이길 수 없는 걸 잘 알아 그냥 쉽사리 포기하기로 했다. 목각 인형처럼 바짝 굳었던 이도하가 몸에 힘을 풀고 완전히 기대 오자, 시오한은 퍽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이도하에게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어?”

이도하가 물었다. 제가 그러고 있을 때 시오한이 때맞춰 절 소환한 걸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대가 지금의 날 알듯이.”

시오한이 대답했다. 생각까지는 아니나 뭉근한 덩어리처럼 묘하게 흘러들어 오는 기이한 감각을 말하는 것이었다. 감정이나, 기분 같은 것. 제 것이 아닌 누군가의 감정이 그런 식으로 흘러들어 오는 느낌이 몹시 묘한 탓에, 초반에는 이도하를 퍽 혼란스럽게도 만들었었다.

그러나 그 감정, 감각의 공유는 소환 중일 때만 이루어졌었다. 세계를 건너서까지는 느껴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게 된단 말이야?”

“처음에는 알 수 없다 여겼는데… 알고자 하니 안 되는 건 아니었어.”

시오한이 말했다.

“내가 늘 그대를 궁금해하는 탓에 알게 되었지.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그대의 하루는 어땠는지. 그런 걸 늘 생각하다 보니.”

“…….”

“…이런 때는, 특히나 더 그대가 느껴져.”

맹약의 힘일까. 아무렴, 이제는 다 상관없다. 망했네. 이도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농담처럼 가볍게 말해 보려 했으나,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시오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으니 그에게 들리지 않았을 리도 없다.

진짜 망했네…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이래서야 숨길 수도 없다.

“아주 예전에, 어느 기사가 내게 그랬거든. 울고 있다는 건 사실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바라는 거라고. 그러니 싫다고 해도 두 번은 물어봐 주라고. 정 말하고 싶지 않아 하거든…. 그때 안아 주라고.”

이도하는 그가 말하는 기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시오한의 기사를 여럿 봤지만, 시오한에게 저런 말을 할 기사라면 하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선왕이 사랑했다던 그 기사.

“혹 그대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대로 괜찮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화이람. 내게 기회를 줘.”

“…….”

시오한이 물었고, 이도하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몇 번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올 뻔도 했으나, 결국 어떤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이도하는 그것들을 삼켜 내고 말았다. 말할 수 없다.

“…난리가 났잖아, 저쪽에.”

마침내 이도하가 간신히 말했다. 지진이 세계를 휩쓴 게 벌써 며칠 전이다.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인 시오한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렇지.”

이도하가 뭉뚱그렸다. 전 세계를 휩쓴 재해, 그리고 인소더블인 저. 이 정도면 대충 짐작할 만한 상황이었다.

“다들 절박하고, 다들 불행하니까. 누구부터….”

목이 콱 막힌다. 망할, 이도하가 이제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 통증도 익숙해져 별 효과도 없었다. 따뜻하게 그를 안고 있는 팔, 맞닿은 가슴, 일정하게 내쉬는 숨소리,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 온몸으로 와 닿는 시오한의 모든 것들로 인해 더 북받쳤다.

“누구부터, 구해야 할지. 난감하잖아.”

터전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죄다 무너진 제3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일지, 당장 어딘가에 깔렸을지, 혹은 다쳤을지도 모르는 제 가족들일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사하지만 할머니나 다른 가족들을 비롯해, 이도하에게는 ‘내 사람’이라고 할 만한 몇 없는 이들이 있으니까.

저 밖의 사람들부터 구하고자 하면 사실 끝이 없을 테지만, 당장 제 사람들부터 찾는 것도 과연 옳은 걸까, 하는 그런 고민들 때문에 난감하다. 이도하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들을 시오한은 아무 말 없이 들었다.

“…만약에, 시오한.”

이도하가 말했다.

“응, 화이람.”

“만약에 말이야. 타이밍이 아주 절묘하게 겹쳐서. 아주 중요한 한 명을 구하지 못하는 대신에 수천만 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하면…. ”

내가 어떡해야 하지? 이도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면?”

“…소중한 사람.”

“…그를 살리면, 모두가 죽는 거야?”

이도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아마도, 확실히.”

어쩌면 ‘그’조차도. 세계를 닫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끝만 남을 뿐이기 때문에. 그 길은 우르슬라도, 뒤엉킨 시간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길이었다. 하루, 이틀, 며칠이나 몇 달. 운이 좋다면 몇 년. 그들에게 주어질 시간도 그것뿐이다.

“글쎄… 화이람. 내가 감히 누군가의 가치를 재단할 수는 없지만.”

시오한이 엄지가 그의 뺨을 쓸었다.

“…그 사람이라면, 그가 아닌 다른 모두를 구하라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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