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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18화 (217/250)

218화

그러자면 너 역시 네 나라를 전부 포기해야 했을 텐데.

그에게 그의 나라가, 이리스티리움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데도. 이도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목구멍을 타고 지그시 북받쳐 오르는 무언가를 꿀꺽 삼켜 냈다. 그러나 노력도 소용없이 목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아파 왔다. 참기 어려웠다.

이도하는 시오한을 안다. 그는 고작 26살에 그 거대한 제국을 한 점 흔들림 없이 지배하고 있는 황제였다. 숨 쉬는 모든 순간 그는 지배하기 위해 존재했고, 지배하며 존재했다. 제국이 역대 가장 광활한 영토와 가장 찬란한 부흥기를 동시에 누리도록 하는 성왕이라 칭송받으며 우러름을 받는 이가 시오한이었다.

그가 하고자 했다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도하가 선택하게끔 얼마든지 유도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었다. 이도하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작 그렇게 물은 것이다.

그냥, 그곳에 저와 함께 있겠느냐고.

그 말을 하던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보고 싶다. 그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이도하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앨범을 연 이도하가 순간 얼어붙었다.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그가 이내 벌떡 일어났다.

이도하가 화면을 밀었다. 몇 번을 밀어도 똑같았다. 시오한과 찍은 셀카들. 몇십 장이나 한가득 찍은 사진들 속에, 시오한의 모습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이도하뿐이다.

누군가에게 기댄 듯 부자연스럽게 기울어진 몸, 어깨에 손을 올린 것처럼 팔을 들고 있지만 아무도 없는 허공. 웃겨 죽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이도하, 그런 제 뺨을 누군가 누르고 있는 것처럼 눌린 자국까지 다 그대로인데, 그만 없다. 시오한만.

“…지랄 마.”

이를 악문 이도하가 인터넷 창을 열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다.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 보려 노력하며 이도하가 검색창에 ‘시오한’을 입력했다. 곧바로 결과가 주르륵 뜬다. 이도하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꽉 문 이 사이로 억누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감쪽같이 사라진 시오한 오르페노스 황제 사진들….>

<인터넷에 퍼진 시오한 오르페노스 황제 목격 사진 전부 사라져….>

<남산 소요 사태 당시 촬영된 영상 속 시오한 오르페노스 황제 모습 사라져.>

<사진 속 황제만 사라져… 말로만 듣던 오즈의 ‘삭제’ 현상인가.>

<사라진 황제… 전문가들, ‘오즈와 같은 현상 발생했을 것.’>

<기사만 남은 시오한 오르페노스 황제 방문… 단체로 꿈꿨나?>

<시오한 오르페노스 황제, 한국에 나타났었나? 의문만 남은 기사들.>

<시오한 오르페노스 황제 목격 전했던 일부 관계자, 기억 혼재 토로.>

└ 나만 꿈꾸냐 얼탱이 없는 기사들이 왤케 많아 황제님이 어딜 왔다 갔다는 거여

└ 이리스티리움 황제가 왔다고…? 목격자가 있다고…?

└ 사진 좀 이상하긴 한데

└ 아니 존나 말이 안 되잖앜ㅋㅋㅋㅋ 황제가 우찌 옴ㅋㅋㅋㅋㅋ

└ ???????

└ 남산 영상 보셈 존나 이상함ㄷㄷㄷㄷ 행동 뭔가 이상하고 진짜 사람 하나 사라진 것처럼 존나 소름;;;;

└ 아니 그니까 황제가 진짜 왔었다고????? 어떻게?????? 근데 다 기억 못 하는 거라고?

└ 왜 그 계약자들이 오즈에서 여기 물건 몸에서 떨어트리면 금방 사라져 버린다고 하잖음 그거랑 똑같은 거라던데.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서 흔적 안 남는 거라고.

└ 미친 개소름

└ 와 존나 소름 나 저 소요 때 남산에 있엇는데 그럼 내가 그럼 이리스티리움 황제 폐하를 봤을 수도 있는 거네? 미친???? 근데 기억을 못 한다구요????? 그 존나 살아 있는 기적의 화신이라는 그 황제님을요???? 아니 시발 잠깐만

└ 그게 문제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존나 이해된다 그냥 존잘남도 아니고 존잘남 of 존잘남을 봤는데 기억이 안 나요 하면 나라도 개억울해서 복장 뒤집어질 듯ㅋㅋㅋㅋㅋㅋ

└ 봤는데요, 못 봤습니다

└ 뭐야 내 기억 돌려줘요 시발 광광

└ 아니 농담이 아니라 ㄹㅇ 현실 소름;;;; 이렇게 그냥 감쪽같이 까먹는다고? 기사 안 남아 있었으면 황제가 여기 있엇다는 건 ㄹㅇ 진짜 없었던 일 됬겠네? 개무섭ㄷㄷㄷ

└ 존나 이렇게 다 까먹는다고?? 미친 쌉에바

└ ㅅㅂ 내 폰에 존나 내가 찍은 줄도 모르겠는 사진이 있어서 뭐지 했는데 잘 보니까 이도하임;;; 근데 이도하 엎드려 있고 진짜 옷이나 발이나 구도나 여러모로 밑에 누가 있는 것처럼 찍혀 있는데 아무도 없음. 시발 존나 무서워서 머리카락 주뼛 선다

없다. 제가 찍은 사진도, 알게 모르게 찍혔던 사진 속의 그도 전부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가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세계가, 그를 지워 내고 있었다.

오즈가 제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다 지워 내려고 하는 것처럼. 똑같이.

다만 기억과 물건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저 세계와는 달리, 이도하의 세계에는 남을 만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를 목격한 사람이야 저 세계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파급력이 다른 것이다. 가능한 모든 매체를 타고 순식간에 퍼진 그에 관한 것들이, 많은 만큼 더 끔찍한 괴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마냥 오즈를 동경하고, 신기하게 여기던 이들이 난생처음 다른 세계의 존재를 피부로 느낄 정도로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좋은 영향이 아니라는 걸 이도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두려워하고, 이질감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정신없이 인터넷을 헤집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시오한과 이도하, 재앙에 관한 기사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는 가운데 아이라 연구소에 대한 압수 수색과, 연구소장 이태학의 구속에 관한 기사들이 섞여 있다. 그중 이도하의 시선을 잡아채는 기사가 있었다.

<‘오즈 연구 권위자’ 미국 왓셔 릴튼 교수, 이번 대지진 원인으로 한국 ‘삭제’ 현상 언급.>

<대지진 원인 규명해라… 조사 박차. 이드로, ‘전 세계가 불안정, 특정 혐오 조장해서는 안 돼.’>

<한 커뮤니티 글이 쏘아 올린 작은 공 … 특기자 vs 비특기자 갈등으로 이어지나.>

한 커뮤니티의 익명 유저가 써 올린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시작은 지난달, 불법 계약 양도 연구에 관해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로 사죄했던 이태학 연구소장의 녹취록과 불법 거래 내역 장부 등이 공개된 이후.

이 게시글의 작성자는 ‘당초 안정적인 마력 수급과 사고로 계약주, 혹은 계약자를 잃은 이들을 위한 연구였다고 했던 이태학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연구에는 러시아 마피아 세력의 검은돈으로 각종 실험이 자행되었다.

이는 명백한 비인도적 계약 거래의 증거인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 이태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계약 양도 실험을 합법적인 연구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계약자 차별이자 특기자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인소더블 특별법 또한 명백히 이에 해당한다는 것.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이 글은 유명 배우 오씨가 본인의 SNS에 게시하면서 본격적으로 화제가 되어 특기자 대 비특기자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연지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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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29818)

정리해 준다. 이태학은 개새끼 맞고 연구는 해야 된다

└ 정리는무슨정리시팔놈아꺼져

└ 맞는 말

└ 맞는 말2222

└ 맞는 말33333

└ 네 다음 비특기자

└ 아묻따 비특기자로 몰아가죠?ㅋㅋㅋㅋㅋㅋㅋ

시발 70년대냐 뭔 특기자 비특기자로 싸워. 세상 작살 나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문제임? 존나 환멸 나네 진짜.

└ 뭔 소리야 이럴 때니까 더 그런 거지. 이도하 마력 다 털어 갔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것 좀 보셈 계약자들 지들 좆대로 하는 거 솔직히 말도 안 되지

└ 뭐래 새꺄 시발 월급쟁이나 계약자나 그게 그거지, 개처럼 일해서 나라에 다 바치라고 하면 너 같으면 하겠냐? 유성호 무슨 꼴 났는지 모름?

└ 아닠ㅋㅋㅋㅋ 일개 월급쟁이랑 계약자랑 같다는 게 무슨 무논리야ㅋㅋㅋㅋㅋ 누가 유성호처럼 다 갈아 넣으라 했나 그때는 유성호밖에 없어서 그렇게 된 거지. 이 정도 꼴 봤으면 계약 의무화가 맞음

└ 이 새끼를 국회로

└ 시발 망했네 다 망했네 걍 다 디지자 그냥

진짜 까 보면 이도하 커버 치는 새끼들 다 특기자임ㅋㅋㅋㅋㅋ 계약 양도 실험 반대하는 것도 다 특기자들이고. 시발 뭐 그래 봤자 니들이 이도하급이나 될 것 같냐 미래에 계약자 될 것 같냐ㅋㅋㅋㅋ

└ 무러ㅐ는 거야 아닌 거니까 아닌 거라고 하지 너야말로 특기자들한테 열등감 있냐?

└ 이 새끼 특기자

└ 또또 몰아가기 나오넼ㅋㅋㅋ 어휴 시발 무슨 말을 하냐 벽에다 떠드는 게 가성비 더 나오겠다

└ 특기자들 감정 이입하는 거지 뭐. 차별이니 뭐니 하는 거에 예민보스잖아요. 실제로 차별받은 적은 없으면서 피해자 코스프레 오지게 함.

이태학 구속. 계약 양도 실험은 정식 연구로 고려 중. 지난번에 이도하가 주승현에게 차려 준 ‘밥상’의 결과였다. 레드 마피아에게서 이태학의 불법 계약 양도 실험과 대가가 오고 간 계약 거래에 관한 자료들을 싹 다 털어 와 주승현에게 준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이다.

“…….”

확인 사살을 당한 것 같다. 그것 보라고. 아직도 귓가에 선명한 주승현이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 같다.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힘이 풀린 그의 손에서 핸드폰이 맥없이 툭, 시트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문득, 어떤 기억이 이도하를 스쳤다. 그가 다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후배인 이주연이 언젠가 생일 선물로 준 어느 스포츠 브랜드의 검은색 범퍼 케이스. 그 테두리를 잡고, 이도하가 케이스를 벗겨 냈다.

툭, 작고 길쭉한 것 하나가 그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사진이었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사진이, 내내 그가 들고 다녔던 핸드폰 뒤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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