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16화 (215/250)

216화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가, 다시 깨끗해진다. 최준원이 물었다.

[할멈. 우는 거야?]

[…화가 나.]

[…나이 드니까 밤중이라고 센티해지나, 왜 그래?]

[목소리 높이지 마. 도하 자잖아.]

이불을 좀 더 꼼꼼히 여며 준 주승현이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괴이하게 쳐다보는 최준원이 보인다. 한 번 더 어린 이도하를 돌아본 주승현이 말했다.

[…이게 나아.]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쨍그랑-! 동시에 기억이 산산이 깨져 흩어졌다. 고요하게 잠든 방은 사라지고 다시 그는 주승현을 마주 보고 있었다. 우그러진 창틀이 떨어질 듯 말 듯 삐걱거리는 높은 고층 위에서. 새벽바람이 아플 정도로 싸늘하게 그들을 스친다.

“…하.”

천천히, 주승현을 놓은 이도하가 뒤로 물러섰다.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언뜻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기억이 헤집어진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고 있던 주승현이 무너져 내렸다. 우욱- 입을 틀어막는 그녀를 이도하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주승현이 나이를 먹지 않았는지. 그와 고작 한 살 정도 차이 날 최준원이 어떻게 그때 고등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여전히 의문인 것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다 그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저들이 어째서 나이를 먹지 않았는지 따위가 다 뭐가 중요하다고.

“이 씨발….”

이를 악문 이도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기가 막힌 듯 고개를 저은 이도하는 곧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스스로 기억을 묻어 버린 것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그즈음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뭐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제멋대로 굴었다가 집에서 쫓겨난 후, 다시 돌아간 뒤에야 좀 얌전해졌다, 라고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그즈음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특기 같은 건 더 이상 쓰고 싶지 않고, 그건 정말 귀찮고 성가시며 번거로운 일만 잔뜩 만들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게. 무의식적으로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제힘은 결국 절 상처 입힐 뿐이라고.

더 이상 특기로 인해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언젠가, 혹시나 절 부를지도 모르는 저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도 거부했다. 저는 절대로 계약자 같은 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기억을 다시 찾은 후로는 어땠지? 그게 다 제 트라우마 탓이었다고 여겼다. 이드로의 정신계 특기자 한나 브라운이 짚어 낸, 저조차도 몰랐던 트라우마. 세계를 그렇게 무너트린 탓에, 행여나 제가 묻은 상처와 기억을 들추게 될까 봐 무의식으로조차 겁나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조차도 제 의지가 아니었다면. 사실 그를 잊었던 건, 모두 외면해 버리기를 선택했던 건 제가 아니었다고 하면. 저는 자위하며 안도해야 하나?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저들 손 위에서, 눈먼 뱀처럼 머리를 틀면 트는 대로 무기력하게 숨만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다 제 탓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좋아하면 되나?

“…처음부터.”

처참하게 일그러진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당신이었다고.”

“아니. 도하, 너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승현이 간신히 대답했다.

“네가 잊고 싶어 했던 거야. 다 외면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던 건 너야, 도하야. 네가 아무리 부서졌대도, 8살이었대도 준원이 힘으로는 네가 바라지 않는 걸 하게끔 만들지 못해. 누구도 네게 그런 건 못 하지.”

“닥쳐.”

아득, 이도하가 이를 물었다. 우르릉, 어디선가 거대한 울림이 사위를 으스스하게 흔들었다.

동이 터 아침이 찾아왔음에도 하늘이 잿빛이다. 어둠이 걷혔을 뿐, 영영 아침이 오지는 않을 것처럼 흐리기만 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그들의 옷자락과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주승현이 말했다.

“왜? 그게 어때서. 잊고 싶었던 게, 인소더블이든 뭐든 그냥 너대로 살고 싶었던 게 뭐가 잘못인데. 너는 고작 8살이었어, 도하야.”

“그래!!”

이도하가 토해 내듯 소리쳤다. 와장창! 방 안에 있던 것들이 모조리 다 터져 나가며 파편을 튕겼다. 건물이 우르릉, 심상찮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새파랗게 물든 이도하의 섬광이 위험하게 일렁거렸다. 그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8살 애새끼였다고. 잘못을 해 놓고 내 탓이 아니라고 하는 게 당연하지. 당연히 외면하고 싶어 했겠지!! 근데 왜 당신이 거기에 끼어들어!”

만약 그때 제게 왔던 게 정말 제 어머니였더라면. 그랬다면 제 어머니는 뭐라고 했을까. 다 잊으라고,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했을까, 아니면….

[저, 도하야. 엄마는….]

호텔에서, 그의 어머니가 하려던 말이 생각난다. 차마 끝까지 들을 수가 없어서 말을 끊었던 게 이제 와서 후회가 된다.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이 점점이 얼룩지는 것을 이도하는 바라보았다. 그랬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싶지만, 어차피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주승현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니? 괜찮다고, 가서 사과라도 하고 다 돌이켜 놓으라고 해? 아니면 네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망가지는 걸 지켜봤어야 했니?”

그녀가 폭발하듯 말을 쏟아 냈다.

“8살에, 온갖 법칙은 다 무시하고 멋대로 세상을 넘어가고 세상을 무너트리기까지 한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달래면서 심리 상담이라도 해 줬어야 했을까? 8살짜리 인소더블이 있고, 그 애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장난감처럼 제 손안에 굴릴 수도 있다는 게 온 세상에 알려지도록 놔두면서? 정신 좀 차려!”

주승현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 부모님이 널 보고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아. 괜찮다고 안아 주기라도 했을 것 같아? 날 때부터 인소더블인 아들을 둔 부모가 단 한 순간도 네 능력을 의식하지 않고 평범한 아들인 양 대하는 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이도하가 숨을 멈추었다. 주승현의 눈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이도하는 그 눈을 알고 있었다. 그가 주승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주승현이 속절없이 끌려왔다. 이도하가 사리문 이 사이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한테 당신을 대입하지 마.”

주승현의 눈이 커졌다. 기억은 종류별로 분류해 놓은 컴퓨터의 파일처럼 딱딱 나뉘는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미세한 사슬처럼 유기적으로 얽히고 엮여 있었다. 그녀의 기억을 헤집으며 이도하가 본 기억 또한 그랬다. 주승현은 이도하를 통해 그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우자의 눈.’ 모르는 게 나을 것들을 너무 많이 보는 어리석은 자의 눈. 가령, 아빠가 아닌 남자를 늘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 같은 것.

제가 아는 것, 알아낸 것은 전부 엄마 아빠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 때문에 세상이 몽땅 무너져 내린 뒤 버려진 자신. 스스로의 힘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움츠러든 자기 자신.

놀란 얼굴로 이도하를 보던 주승현이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래, ‘우자의 눈’. 그게 내 힘이지. 사실을 알려 줘? 네 어머니도, 네 아버지도 널 두려워했어. 갓 태어난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엄마를 제멋대로 이동시키고, 곁에서 떨어지기 싫다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

“널 의식하지 않도록, 인소더블인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두려움을 깎아 내고서야 네가 아는 평범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된 거야. 무뎌지게 만든 거라고. 그러고도 무의식중에 끊임없이 널 상식 안에 가두려고 했지. 도하야, 그런 건 하면 ‘안 돼’가 아니라, 할 수 ‘없어’라고.”

겨울 다음에 봄이, 봄 다음에 여름이 오는 게 당연하고, 시간은 뒤로 흐를 수 없고, 사람은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감쪽같이 이동할 수 없고. 소환과 계약 없이 세상을 넘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치, 진리, 과학, 그런 것들로. 그런 게 가능한 건 그런 유형의 특기가 따로 있기 때문이며, 그런 특기를 가진 사람들만 가능한 일이라고.

“인소더블이든 말든, 나는 그냥 아무 능력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고 그냥 살 수 있었던 게 정말 그냥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아? 우르슬라를 보고도 아직도? 네가 계약자가 되기 싫다는 이유로 저 비곗덩어리 같은 인간들이 그것참, 아쉽구나, 어쩔 수 없지, 하고 내버려 두는 게 정말 그냥 가능했던 일 같냐고. 지금 인간들을 보고도,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갈라지고 쉬어 버린 목소리가 고막을 긁는다. 문득 차가운 것이 이도하의 속눈썹에 달라붙었다. 눈이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눈은 잠깐 머물다가, 한 번 더 눈을 깜빡이자 이내 녹아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눈이 뻑뻑해졌다. 이도하는 제 긴 숨소리를 들었다.

“네 평범한 일상을 만들기 위해서 몇 명의 머릿속을 건드리고, 휘젓고, 또 몇 명이나 죽여야 했을 것 같아? 네 그 특별한 계약만 해도 말이야.”

주승현이 말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기억을 서슴없이 조작해 버리는 게 정상적인 세상이라고는 하기 힘들지.”

계약, 비밀. 이도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신고를 해 줬다는 사람이 그 빨간 소환진을 봤을 텐데? 뭐라고 둘러대려고?]

[둘러대긴요. 이미 기억을 손봤죠.]

기억난다. 그가 소환진에 불려 갔던 순간을 목격했던 남자. 김윤혜가 그랬었다. 전례가 없었던 맹약에 대해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기밀로 처리해야만 했다고. 그래서 그 남자의 기억은 건드려야 했다고 했었다.

이도하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