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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15화 (214/250)

215화

주승현이 대답했다.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발밑이 까마득하게 꺼지는 것 같은 아찔함이 그를 관통했다. 세상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가는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다.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고, 손가락 끝이 따갑도록 차가운 바람만 유유히 불었다. 이도하가 깊이 심호흡을 했다.

“기억이 돌아왔나 봐요. 황제가 도하 군에게 그 일을 얘기해 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기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죠.”

“…그래. 확실히, 제대로 아네.”

제가 그때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도하가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이한 긴장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주승현이 조금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쾅!!! 뼈대만 남은 창틀이 우그러졌다. 어느새 코앞에 나타난 이도하가 주승현을 창틀에 처박았다. 컥! 주승현이 숨조차 제대로 토해 내지 못하고 신음했다.

구겨진 창틀이 벽면으로부터 우두둑, 떨어져 나가며 까마득한 바깥쪽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바람에 휘몰아치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이도하의 눈동자를 물들인 푸른 섬광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짐승의 안광처럼 섬뜩하게 주승현을 노려보았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

이도하가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창틀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리고, 거기에 처박힌 주승현의 발끝이 필사적으로 바닥을 붙잡듯 긁었다. 우우웅- 주변의 공기가 불안정하게 요동친다. 주승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신음하던 주승현이 힘겹게 대답했다.

“계절을 역행시키고, 화장실과 교실을 벌판 같은 수영장으로 바꾸어 놓고, 물체의 시간을 마음대로 감았다가 풀었다가…. 도하 군이 어렸을 때 얌전한 편은 아니었잖아요.”

범주도, 경계도 없었다. 아이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능력이었다.

“도하 군이 인소더블 판정을 받은 게 정말 18살 때라고 생각해요? 정말 본인이 그때까지 힘을 잘 숨겨서 아무도 몰랐던 거라고?”

그녀의 목을 옥죈 이도하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린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찾는 것처럼.

“고작 8살의 나이로 세상을 뚫고 넘어가 놓고도, 정말 아무도 모를 줄 알았어요?”

“…….”

“세상을 그렇게, 무너트려 놓고도?”

이도하가 이를 악물었다. 살이 내린 뺨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주승현의 어깨를 짚은 손이 떨린다.

“근데 그게 왜 당신이야.”

꽉 메인 목소리가 말했다. 잊으라고 했던 말. 괜찮다고 했던 위로.

“그러면 안 되잖아. 내 어머니여야지. 그게 왜 당신이냐고. 내가 왜….”

말을 맺지 못하고, 이도하가 눈을 내리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가 왜. 제가 왜 여태까지 그를 잊고 살았는데.

“…나였다고 한들 뭐가 달라져요.”

주승현이 말했다.

“도하 군 어머니였다고 해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그냥 다 잊으라고. 덮어 두라고. 잊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 건데요.”

아니. 그건 제 어머니였어야 했다. 그에게 잊으라고, 그럼 다 괜찮아진다고 말했던 건 그의 어머니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건 온전히 절 위한 위로였다고 할 수 있으니까. 저는 어렸고,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눈앞의 이 여자여서만은 안 되는 것이다.

“정말 그 기억을 가지고 살 자신이 있었어요? 모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살 수 있었겠느냐고요.”

이를 악문 주승현이 말했다. 기이한 빛이 맴도는 푸른 눈동자가 주승현의 눈을 마주했다. 등골에 서늘하게 주뼛, 소름이 돋는 순간, 이도하가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주승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우웅- 이명이 울렸다. 주승현의 까만 동공이 확장된다. 비명이 이도하의 손에 틀어막혔다. 그녀를 파고든 힘이 강바닥을 긁듯, 오래된 기억을 퍼 올렸다. 부유물처럼 떠오른 기억이 이도하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눈에 익은 어두운 실내가 보인다. 이도하의 집 거실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한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거실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닫힌 안방 문이 있는 쪽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야 하는 부부가 잠들어 있는 방이었다. 시야 바깥에서 걸어 들어온 누군가가 안방 쪽으로 다가가다 주승현을 뒤돌아본다. 이도하는 본 적이 없는 낯선 남자였다.

길 가다 한 번쯤은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은 흔한 인상의 남자는 몹시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다. 주승현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조용한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에 섬광이 돋았다. 남자가 안방 주변으로 손을 휘젓는다.

그걸 확인한 주승현이 시선을 옮겼다. 이제 저 안방 문으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흘러들어 가지 않을 것을 아는 주승현은 또 다른 방문으로 다가간다. 이도하, 그의 방이었다.

달칵- 문을 열자, 곧바로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비행기가 그려진 커다란 세계지도가 벽에 붙은 방은 수면 아래처럼 온통 푸른빛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그 빛에 닿은 모든 것들이 겁먹은 듯 덜덜덜 진동하고 있다.

그러다 하나둘씩 떨어진 듯한 물건들이 바닥에서 기어가듯 움직인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날 선 위태로움이 가득했다. 함부로 발을 들이밀면 안 될 것 같은 그 안으로, 주승현이 조심스레 걸어 들어갔다.

울음소리는 책상 아래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러다 숨이 넘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주승현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어, 엄마. 엄마- 엄마-.]

아이가 손을 뻗는다. 눈앞의 여자가 제 엄마인지 아닌지 확인할 정신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그저 절 안아 줄 상대를 향해 무작정 매달린다. 어린 이도하, 저다. 기억을 되짚는 이도하가 이를 악물었다.

[…….]

주승현이 손을 뻗으며, 무릎을 굽힌다. 그녀가 작은 손을 잡았다. 먼지가 가득 묻고, 자그마한 생채기들이 난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작은 이도하가 책상 밑에서 그 품으로 허겁지겁 달려든다. 땀으로 축축하고, 뜨겁게 열이 올라 있다.

시오한, 시오한-. 작은 이도하가 울음 사이로 서럽게 이름을 불렀다. 멈칫한 주승현이, 이내 그 등을 쓰다듬었다.

[꿈꿨나 보다, 우리 도하.]

말하며,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문가에 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도하는 조금 놀라고, 그것보다 조금 더 흥미로워하는 것 같은 얼굴이 낯이 익은 것을 알아차렸다.

좀 더 앳되지만,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푸르게 물든 교복 위의 명찰이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최준원. 주승현이 그의 특기를 상기한다. ‘원탁의 그림자 왕’.

[이야, 이 애가….]

쉿- 어린 이도하를 품에 안은 주승현이 조용히 입술 위로 손을 올린다. 교복을 입은 최준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주승현의 어깨에 얹는다.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이도하에게 가까이, 그가 고개를 숙인다. 그의 눈동자에서 파란 섬광이 피어올랐다.

[잊어버려, 도하야.]

[잊어버려, 도하야.]

주승현의 말에 한 박자 늦게, 최준원이 입을 열었다. 입만 뻐끔거린 것처럼, 최준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 어린 이도하에게 닿고 있었다. 주승현이 다시 말했다.

[나쁜 기억은 다 잊어도 돼. 그래도 돼.]

[나쁜 기억은 다 잊어도 돼. 그래도 돼.]

다시, 목소리가 겹친다.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어린 이도하가 더더욱 품을 파고든다. 그 사이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엄마-.]

[잊어버려.]

[잊어버려.]

두 사람이 속삭였다. 어린 이도하. 본래라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인소더블이지만, 지금은 무너지고 깨져 틈이 드러난 그에게.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잊어버려. 힘에 부칠 정도로 우는 어린 이도하에게 그들은 몇 번 더 속삭였다.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고, 떨림도 가라앉을 때까지.

마침내 아이가 완전히 잠든 것처럼 조용해지자,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푸른빛도 사그라들었다. 진동하던 물건들도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최준원이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아직.]

주승현이 그를 잡았다.

[더? 뭘 더 하려고?]

주승현이 고개를 숙였다. 제 품에서 잠든 어린 이도하를 안고 일어난 그녀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밤바람이 스며들어 와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속으로 섞여 들었다.

이도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준다. 엉망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주승현이 손짓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최준원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주승현이 잠든 이도하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특기자도, 계약자도… 다 귀찮을 뿐이야, 도하야. 그렇지?]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할멈. 얜 인소더블이잖아. 난 그냥 조금 촉발하는 것밖에 못 해. 이 애가 그럴 생각이 없으면 하나도 안 먹힌다고.]

[알아. …그냥.]

최준원이 흘긋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주승현은 알았으나 모른 척한다.

[뭐, 그래.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다 때려치우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수도 있지.]

[특기자도, 계약자도… 모두 널 성가시고 괴롭게만 할 거야.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관심 가지지도 마. 그럼 아플 일도, 상처받을 일도, 실망할 일도 없어. 너는 이대로 쭉, 괜찮을 거야. 우리가 그렇게 할 테니까.]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그 목소리 위로 최준원이 제 특기를 덧입힌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다 잊고, 평범하게 살아.]

다 잊고, 평범하게 살아. 그러면 돼. 그녀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모든 기억을 꿈속으로 묻어 가는 것처럼, 눈물로 얼룩진 채 일그러져 있던 어린 이도하의 얼굴이 점점 더 평온해진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가슴을 토닥이는 그녀는, 몹시 서글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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