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다시 밤이다. 이도하는 다시 그 마천루 위에 서 있었다. 겨울 공기가 차갑게 그를 감싸 안았다. 칼날 같은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희끗희끗 불빛이 반짝거리는 어두운 도시는 몹시도 낯선 모습이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도하는 문득 아주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올 새도 없이 바람에 흩어져 버린다.
이도하가 품을 뒤졌다. 잉크가 엉망으로 번져 하나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종이들이 거친 손길에 찢어질 듯 쑥 딸려 나왔다.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거리는 뻣뻣한 종이들을 노려보는 이도하의 눈에 섬광이 번졌다.
푸른빛이 일렁이자, 종이 위의 거뭇한 자국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뱀의 몸뚱이가 미끄러지듯, 퍼졌던 곳에서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정갈한 글씨의 모습으로. 물에 흠뻑 젖기 이전의 모습으로.
“…시발.”
그러나 기껏 시간을 되돌린 의미가 없었다. 이도하는 정갈하게 돌아온 글자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앙그라엘에서 이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던 건 계약주인 시오한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자의 특혜로 이도하는 그가 읽을 수 있는 글을 알아볼 수 있지만, 이 세계는 계약주, 계약자의 특혜 따위도 없고 시오한도 없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그때 읽었던 한 문장뿐이었다.
[첫 번째 소환, 피를 이용한 부름. 그날 있었던 흔들림. 사파이어가 답이었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틀린 게 아니라,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엘이 길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이제 와 보니 해밀턴 블랙의 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문장뿐. 그의 손아귀에서 종이 무더기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마디가 새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쥔 이도하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금세 피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암을 부어 놓은 것처럼 속이 뜨겁고 아파 그냥 뜯어내 버리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꽉, 가슴을 쥐고 눈을 감은 이도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돌아선 그가 제 뒤에 있던 것을 걷어차 버렸다. 쾅! 높게 삐죽 솟은 거대한 안테나 같은 철제 기둥이 단번에 뜯겨 나갔다.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하늘이 번쩍인다.
콰광!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굉음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콰광! 쾅! 연이어 내리친다. 마른 밤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추락하던 파편에 직격한 것이다. 불꽃이 번쩍하고 남은 자리에는 불티만 부스스 떨어져 내린다. 어둠 속에서 이도하의 눈에 새파랗게 돋았던 섬광도 불티와 함께 가라앉았다.
그가 스스로 꽂은 벼락은 이도하의 머리카락 끝조차 그슬지 못했다. 엄청난 굉음에 사위가 아직도 진동하는 가운데, 이도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왜. 왜 하필 엘하시온이지?
사실은 하필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도하는 생각했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해밀턴 블랙은, 그가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특기든 제 특기든 그런 걸 다 떠나서, 그를 죽이는 건 이도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밀턴 블랙을 만나기도 전, 우르슬라가 그를 죽이라고 한 이유를 안 그 순간부터 이미.
우르슬라에게 해밀턴 블랙의 죽음이 필요한 건, 이미 ‘엘하시온을 죽인 과거’를 가진 해밀턴 블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슨 수를 썼든 그의 존재로 고정되어 버린 미래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엘하시온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그가 죽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시오한의, 먼 선대인 그를.
애초에 그래서, 그런 사실을 몰랐음에도 천 년 전의 앙그라엘에서도 엘하시온에게 접근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저나 시오한의 개입으로 인해 행여나 과거가 바뀌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과거를 건드려 지금 그의 곁에 선 시오한의 존재에 영향을 미칠까 봐.
해밀턴 블랙, 그가 죽으면 세계가 닫힌다는 사실을 우르슬라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상관도 없었다. 세계가 닫히기 전, 그 세계에 닿아 있는 우르슬라가 엘하시온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지 없는지 같은 건. 그건 이도하가 감히 도박을 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는 볼 수 없겠으나 적어도 엘하시온이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우르슬라에게 주어질지 몰라도, 이도하에게는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그저 끝이다.
그런데 선택을 하라고? 이도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엘하시온.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맹약이 무엇이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그의 손에서 구겨진 종이들이 하나둘씩 흩어져 바람에 날아갔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가, 만나서도 안 되는 그가 그냥 뭐라도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 그냥,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한번 물어보지.”
이왕 만난 거. 문득 시오한이 불쑥 개입해 그를 구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이도하가 헛웃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때는 놀라서 기절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뭐라도 한마디 한다는 걸 그만 까먹어 버렸다.
왜 까먹었더라. 그래. 그의 눈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서. 제 눈을 통해 보고 있던 그를 보고 당황해서.
‘그대가 날 이리 보는구나.’
“…….”
이도하는 아주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 자리에 앉았다. 까마득한 아래로 다리를 떨어트린 채로. 추위가 옷 사이사이로 사무치게 스며든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을 때까지 그는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가 손을 움직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얼어 뻣뻣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움직임을 인식한 화면이 저절로 켜지고,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도하의 손끝이 잠시 그 위에서 멈추었다가, 화면을 건드렸다. 재난 문자를 비롯해서 온갖 메시지들이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올라온다. 메시지로 가득 찬 잠금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도하가 인터넷을 열었다. 환하게 밝아진 화면이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비추며 음영을 드리웠다.
<전 세계 강타한 대규모 지진 … 사망자 추산만 수천만 명.>
한국 시간으로 지난 8일 밤,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수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미 AUP 통신이 보도했다. 통상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지진대를 벗어나 이례적으로 전 세계를 뒤흔든 이 지진으로 인해 세계 인구의 감소는 물론 천문학적인 경제적 충격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세계 경제가 적어도 몇십 년은 뒤로 퇴보할 것이라고 AUP 통신은 밝혔다. 현재까지 사망자 및 피해자 추적은 물론 구조 활동조차 제대로 시작되지 못한 나라도 다수인 상태. 오슬란드 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전 지구적 재난’이라고 표현하며 국경과 문화, 언어를 넘어 모든 인류가 하나 되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이도하가 기사를 넘겼다.
<오슬란드 미 대통령, ‘전 지구적 재난’ …… 이드로, 발 벗고 나서.>
한국 시간으로 지난 8일 20시경 전 세계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해 온 지구가 신음하는 가운데, 국제 이능력 재난 구조 기구, 통칭 이드로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전 세계 대다수 국가들이 이들의 파견을 위해 제한 없는 장막 너머의 국경 도약을 허가한 상황.
케이시 윌리엄스 이드로 단장은 현재 모두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며, 그들이 손 닿는 곳까지 최선을 다해 힘쓰겠다고 밝혔다. 수많은 국가로부터 많은 특기자들의 유례없는 지원이 이어지고 있는 한편, 케이시 윌리엄스 단장은 구조 임무의 특성상 지원자들을 받아들이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 외에도 다수의 국가에서 이어지고 있는 특기자 개인의 구조 활동에 대해서도 염려를 표하며 가능한 자제할 것을 당부해 일부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전 지구적 재난, 캘리포니아 대지진 당시 활약한 이도하는 어디에?>
지난 8일 밤, 전 세계에 각기 다른 규모의 지진이 닥쳤다. 전체 사망자만 추산 수천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 일각에서는 지난 캘리포니아 대지진 당시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인소더블 이도하의 행방에 대한 의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드로 탈퇴 의사를 밝힌바 있는 이도하에 대해 케이시 윌리엄스 단장은 ‘이드로는 인도적 도움을 제공하는 비정부기구’라는 말로 대답을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이도하의 행방에 의문을 제시하는 여론에 대해 ‘모른다’는 말로 일관하여 비판을 받는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이도하의 행방이 에너젠이라는 목격담이 주목을 받고 있다.
댓글(91827)
시발 뭔데 세상 망하냐?
└ ㄹㅇ 망하는 듯….
└ 이게 바로 아포칼립스다 새끼들아, 시발 과장 새끼 뺨따구나 날려 볼걸
└ 아니 지진 존나 무섭다. 진짜 시발 ㄹㅇ 세상 다 무너지는 줄 무슨 일이냐고 이게
└ 미친놈들아 죽은 사람들이 몇인데 농담할 정신이 있냐? 사이코패스들 아니야
아니, 이모형 진짜 어디 갔는데? 시발 솔직히 존나 웃기긴 한데 지진 났을 때 나 이모형 존나 찾음. 레알로 진짜 엄마 아빠보다 이모형 생각 더 먼저 나더라 존나 딱 하고 나타나서 구해 줄 줄 알았음. 나도 안 믿기는데 진짜 그랬음. 원래 무교긴 하지만 그래도 신이고 뭐고 그냥 이모형부터 생각나더라. 뭐 그래도 결국 안 온 거 이해함. 개무서워서 그랬지 여긴 존나 심했던 곳도 아니고 지금 난리 난 데가 한두 곳도 아닌데 이모형도 몸이 두 개는 아니잖아 했지. 근데 레알로 눈 코빼기도 안 비쳤다고 했을 때 존나 뒤통수 맞은 것 같았음. 무슨 배신감까지 느껴지는 게, 아니, 아 진짜 그냥 존나 뭔데 싶음ㅋㅋㅋㅋㅋㅋㅋ 시발 너무한 거 아니냐?
└ 야 나도
└ 시발ㅋㅋㅋㅋㅋ 존나 횡설수설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 거 웃프네
└ 뭐래 뭐 맡겨 놨냐 난 솔직히 이도하 이해함. 캘포 지진 때 그렇게 도와줬는데도 욕 오지게 박던 것들이 꼭 이럴 때 배신감이니 뭐지 하지 양심 있냐
└ 아 예 방구석 현자인 척 오지고 지리고요. 시발 이런 새끼들은 천장 다 무너져서 깔려 봐야 정신 차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