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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11화 (210/250)

211화

<…….>

침묵이 흘렀다.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는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화가 났던 것도, 아연해졌던 것도, 기가 막혔던 것도 다 그냥 싹 잊어버리고 이도하는 그냥 멍해졌다. 그가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뭘 하라고?

<그 소년이 죽었음에도 계약자가 오가는 세계가 되었다고 했지. 내가 틀렸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네.>

그가 말했다.

<내가, 그 소년을 죽였기 때문이야.>

이도하는 아주 잠깐이지만, 이 남자가 정말로 제가 한 짓을 후회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이도하가 우르슬라를 동정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정작 우르슬라가 그 지경이 된 데에 가장 큰 일조를 한 그는 그녀에 대한 일말의 감상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이제 와 저따위 말을 한다면 최소한 그가 정말 앞뒤 없이 돌아 버렸다는 증거는 될 터였다. 한두 해도 아니고 천 년을 살다 보니 정말 노망이 거하게 난 것일 뿐이라고 여기면 되는 것이다.

<최초의 소환, 첫 번째 계약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나?>

최초의 소환. 그것만은 정말 우연에 불과했다. 수십 명의 목숨을 바친 가엘의 염원이 세계를 비틀었고, 조그맣게 깨어진 틈으로 아주 우연히 해밀턴 블랙, 그에게로 닿았다. 가엘이 그랬던 것처럼 시체 사이에, 피 웅덩이를 밟고 서 있던 그에게.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고 아주 간절히 빌고 있었던 그의 염원과 닿아서.

그러나 그렇게 닿았다 하더라도, 그건 만날 수 없는 우연이었다. 세계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으니까.

‘얼마 전에… 땅이 흔들린 적이 있다는데.’

시오한이 했던 말이 이도하의 뇌리를 스쳤다. 천 년 전의 앙그라엘, 마탑에 있던 가엘의 연구실에서.

‘땅이 흔들린 게 아니라 하늘이 흔들린 것 같기도 하고. 꼭 세상이 한 번, 아주 찰나에 딱 한 번 크게 흔들린 것 같았다고.’

‘땅이 흔들린 게 아니라 하늘이 흔들린 것 같았다’. 이도하는 그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흔들린 것 같았던 게 아니라, 정말 흔들렸던 거라는 것도.

그때도 그랬으니까. 8살의 이도하가, 멋대로 세계를 넘나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려는 모습을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가엘과 해밀턴 블랙, 그들의 계약이 맹약의 시초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도하는 그 흔들림이 맹약의 여파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오한이 저를 소환했을 때도, 계약을 맺은 순간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으니 그건 맹약의 여파가 아닌 것이다.

그 흔들림은, 세상이 비틀어지면서 발생한 여파였다. 해밀턴 블랙, 그가 죽지 않고 세계를 넘어가면서 그 사이의 벽에 틈을 내 버린 여파.

<내가 길이야.>

그가 말했다. 죽지 않는 그의 존재가, 세계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 열린 길로, 엘하시온의 바람이 천 년 후의 우르슬라에게 닿아 그녀를 그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내가 그 소년을 죽임으로써 나는 그녀의 인과에 엮여 버렸지.>

그가 닿아서는 안 되었을, 천 년 후의 인과에. 모든 걸 엉망으로 꼬아 놓으면서. 희끗희끗한 수염에 덮인 입술이 닫혔다 열리는 것을 멍멍하게 바라보며 이도하는 마침내 깨달았다. 천 년 후의 미래로부터 불려 온 우르슬라. 그녀의 계약주인 엘하시온. 그를 죽인, 천 년 전 십자군이었던 해밀턴 블랙.

<알겠나? 그런 내가 여기에 죽지 않은 채 살아 있기 때문에, 세계가 닫히지 않은 거란 말이네.>

엘하시온. 그가 매듭이다. 그의 죽음이 그 모든 시간이 한데 묶은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죽지 않는 해밀턴 블랙의 존재가, 모든 것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인과도, 시간도.

다른 세계의 누군가가 바란 염원이 또 다른 세계에 닿은 것. 천에 하나, 만의 하나로 일어난 그 우연이 우연으로 끝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 소년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그때 다 끝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때, 가엘은 이미 숨이 멎어 가고 있었다. 결국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숨은 끊어졌을 것이고, 그럼 해밀턴 블랙-아폴리온도 자연히 그 세계에서 튕겨 나왔을 것이다.

<그럼 세계는 닫히고, 우르슬라 역시 그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거야. 닫힌 세계에 닿을 수 없으니, 시간도 되돌릴 수 없었겠지.>

개소리 마. 이도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노망 난 소리 따윈 집어치우라고, 그렇게 말해야 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우르슬라가 저더러 해밀턴 블랙을, 이 남자를 죽이라고 했을 리가 없다고.

그를 죽여 세계가 닫히면 그녀는 두 번 다시 엘하시온을 만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아, 그토록 애틋해 미쳐 버리면서까지 놓지 못하고 있는 엘하시온을.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머리가 멍멍했다. 이도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엘하시온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가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시간을 놓아준다면, 뒤엉킨 시간 또한 풀리게 될지도 모른다.

헉, 이도하는 어느새 짓누르듯 제 속에 꽉 차 있던 숨을 토해 냈다.

<…그래, 그래서….>

마침내 이도하가 말했다. 꽉 죄인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온 것처럼 거칠게 갈라졌다. 그래서 제 일이라고 했구나.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제 다 알겠다. 제가 우르슬라를 봐야만 했던 이유도. 그녀가 그 모양 그 꼴이 되어 버린 이유를, 신은호가 그렇게 계약주를 잃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이용당하는 꼴을 보게 된 이유도. 다 저를 여기까지 이끌려고 그랬던 것이다.

처음 그가 바랐던 대로, 계약자 따윈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이도하로 하여금, 그를 죽여 세상을 닫게 하려고.

하-.

이도하는 공허하게 퍼지는 제 숨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대로 서 있던 그가 발을 뗐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린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그는 해밀턴 블랙 앞에 도달했다.

늙고 주름진 얼굴로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는 아폴리온 앞에.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해밀턴 블랙의 목을 쥐었다. 거의 올려놓다시피 가볍게. 두근두근, 손가락 아래로 맥박이 느껴진다.

<…고맙네. 좋은 거 알려 줘서.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는 알겠거든.>

이도하가 말했다. 목을 쥐었던 손이 내려가, 남자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당신은 절대 못 죽어.>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며, 그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었다.

<우르슬라, 신은호. 그들을 내 앞에 들이밀면 내가 무슨 세상에 대한 회의라도 가질 줄 알았어? 책임감이라도 가질 줄 알았나 보지? 그 정성을 쏟을 시간에 차라리 닥치고 내 앞에 와서 얼굴에 침이라도 뱉지 그랬어, 멍청아. 홧김에 당신을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뭐, 동정? 우르슬라가 엘하시온의 죽음을 천 번 겪든 만 번 겪든 그러라고 해.>

이도하가 차가운 비소를 머금었다. 물론 우르슬라는 가엾으나, 엘하시온 그가 시오한의 먼 선대인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이건 이도하에게 저울을 달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우르슬라에게 해밀턴 블랙이 죽은 미래가 필요하다면, 이도하에게는 엘하시온이 죽은 과거가 필요했다.

그 과거로부터 이어져 비롯된 시간에, 시오한이 태어났기 때문에.

<내겐 그깟 동정보다야 내 계약주의 존망이 오천만 배는 더 중요하니까. 알아들어?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고.>

이도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그냥 계약주를 잃고, 천 년 동안 아무것도 지키지도 못하고 다 잃기만 하다 보니 돌아버려 죽고 싶어진 노인네야. 뭐, ‘우리’? 자위는 당신 혼자 실컷 해. 나는 당신 같은 패배자도 아니고, 우르슬라 같은 미련 덩어리도 아니니까.>

제 인생이, 다시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다고 해도 이도하는 상관없었다. 온 세상이 절 원망하든, 탓을 하든, 다 상관없었다. 제힘이 그들을 겨눌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온 세상이 적으로 돌아서서 절 위협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이 뭘 해도 제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것, 그게 진실이니까.

‘그대와 나를 이리 이어 주고 있으니 나는 그것으로 족해.’

그가, 늘 절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얼마나 꼬여 있든, 이 두 세계의 관계가 얼마나 엉망으로 엮이든 닿아 있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럼 선택을 해야겠군.>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선택은 무슨-.>

<지진 말이네.>

이도하의 눈이 흔들렸다.

<…뭐?>

지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메아리를 가진 것처럼 울렸다. 어느새 풀어진 이도하의 손아귀에서 구겨진 남자의 앞섶이 툭, 떨어져 나왔다.

<우연 같은 건 없어. 그런 건 최초의 그 한 번뿐이었지.>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자네가 막았던 캘리포니아 대지진. 고작 열두 살짜리 계약자. 고작 먼지만 한 마력으로 계약주가 된 남자. 아예 세계의 벽을 넘어 버린, 황제.>

그가 이도하를 가리켰다.

<그건 다 징조네. 고작 나만 했던 틈이, 자네만 하게 벌어졌다는 징조.>

‘꼭 구멍이 뚫린 것 같더군요. 이 세계가 그곳으로 스며 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구멍이 뚫려, 누수가 일어난 것처럼.’ 레무스 비숍이 했던 말이 머리에 울린다.

<전부, 자네로 인해서였다고.>

이도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 눈꺼풀이 닫혔다가 열리는 게 마치 장막처럼 보였다. 쿵, 하고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선택해. 계약주인가, 세계인가?>

사람인가, 세계인가. 과연 그 둘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밀턴 블랙이 중얼거렸다.

<…우연이라고 했지. 우연으로 끝났어야 했던 일이었다고. 처음부터 두 세계는, 닿지 말았어야 했네.>

서로를 거부하는 두 세계는, 부딪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파멸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등을 맞댄 거울. 절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세계.’

이도하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새까만 눈동자가 남자를 샅샅이 훑었다. 그에게서 한 조각의 기만, 한 조각의 거짓말이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그러나 곧 그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싸늘하게 숨을 죽인 채 날을 세우고 있던 한기가 확 풀어졌다. 냉장고가 웅웅거리는 소리, 바람이 흔들린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 세상의 사소한 소리들이 부드럽게 흘러들어온다.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던 햇살이 다시 따뜻하게 유영하기 시작했다.

찌그덕, 이도하의 발아래 콜라가 끈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에,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해밀턴 블랙은 우두커니 서서 이도하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오밀조밀한 소리만 가득 찬 시끄러운 적막 속에서 그는 한참을 묵묵히 서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햇볕이 비쳐드는 곳으로. 그가 그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주름진 손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윽고, 그가 손을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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