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자네는 계약자가 되어서는 안 됐어.>
<…….>
이도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소리 없이, 그가 해밀턴 블랙을 바라보았다.
쾅! 그들 사이에 있던 식탁이 거대한 손에 후려 맞은 것처럼 뒤집혔다. 식탁 위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이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죄다 쏟아졌고 날아간 식탁은 벽에 처박혀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창문이 박살 났다. 전자레인지 위에 누워 잠에 빠져 있던 고양이가 펄쩍 뛰어오르며 날카롭게 울었다. 성큼 짓쳐 간 이도하가 해밀턴 블랙의 목을 그러쥐었다.
<뭐야.>
이도하가 입을 뗐다.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낮게 잠긴 목소리였다. 그의 입에서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됐든 그게 뭐. 우르슬라를 동정한 것처럼 날 불쌍하게 여기기라도 하게?>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때가 눌어붙은 뿌연 창문을 투과해 그들 사이를 비추는 햇빛 속에서 느른하게 유영하던 것들이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순식간에 뚝 떨어진 기온이 살갗 위로 칼날처럼 날을 세웠다. 꽉 억눌렀지만, 새어 나온 이도하의 특기에 감응해 사위의 모든 것들이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처럼.
이도하의 까만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위험하게 일렁거렸다. 수면 아래, 거대한 고래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
<무슨 짓거리를 했어.>
가능성을 점쳐 또 다른 인소더블의 계약주를 죽인 전적이 있는 남자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기만으로 덮어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남자다. 이도하를 우르슬라와 신은호에게로 이끌었던 주승현이 그리 친숙하게 부르는 사이라면, 그것도 이 남자의 영향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게 순진할 지경이다.
이 남자의 입에서, 행여나 시오한의 이름이 한 자라도 나오는 순간 이도하는 그를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시오한은 엘하시온처럼 어리지도, 무력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리고 계약주를 잃은, 계약자였던 이 남자는 다시는 오즈에 발 디딜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어쨌든 해밀턴 블랙은 천 년을 살아왔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가엘 루이즈였고, 또 다른 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뿌려 놓은 인연도, 그가 쌓아 온 세월도 모두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일 것이다. 이 남자의 머릿속에 시오한의 이름이 스치기라도 했다면, 이도하는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서 죽음이 기꺼울 리는 없을 테니. 몇 번이고,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이도하는 그를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
해밀턴 블랙이 대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계약자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모든 게 다 끝을 봐야 하게 되었어. 빵을 먹던 이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돈을 주면 고마워하겠지만, 눈앞에서 금맥이 터지면 전쟁이 나는 법이네.>
해밀턴 블랙이 건조하게 말했다. 이도하가 틀어쥔 제 목이나,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제 목숨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저들은 자네를 감당하지 못해.>
꽉,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 핏줄이 서고, 목이 졸린 남자의 얼굴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눈에 새빨갛게 핏발이 서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자의 주름진 얼굴에는 표정 한 줌이 없었다. 떠들고 숨을 쉬는 인형을 쥐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더럽다.
시발- 욕을 짓씹은 이도하가 남자를 내팽개쳤다. 해밀턴 블랙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우당탕! 넘어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죽지 못하건 어쨌건 나이를 먹긴 하는지, 그는 육체만은 아흔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내가 언제 감당해 달라고, 받아 달라고 안달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데, 어쩌라고. 관심 없는 거 안 보여? 감당을 하든 말든 죽을 쓰든 똥을 싸든 당신 말마따나 ‘저들’ 일이야.>
<다 죽이기라도 할 텐가?>
천천히, 그가 몸을 바로 했다. 움칠거리고 삐거덕거리는 몸을 무심하게 바로잡는다. 고장 난 몸에 갇힌 사람처럼. 기괴한 광경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이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자네는 이미 그들에게 자네가 뭘 해 줄 수 있는지 알려 줬어. 인소더블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이미 보여 줬잖아. 인소더블이라는 자원이 하나 존재함으로써 저들의 삶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아주 찬란하고 눈부신 미래를 보여 줬지. 이제 와서 저들이 그걸 하나라도 포기할 것 같은가?>
<포기하지 않으면-.>
이도하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다 죽이기라도 할 텐가? 해밀턴 블랙은 이미 앞서 대답한 것이다.
<당신 해결 방법은 그거밖에 없나? 죽이는 거?>
<…….>
잠시 말없이 이도하를 바라본 그가 눈길을 내렸다. 처음으로 그의 눈에 뭔가라고 할 만한 것이 찰나에 스쳤다.
<결국 그것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며, 끝을 내는 방법이라는 걸.>
그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천천히.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아주 오래 살았어. 너무 많은 걸 봤지.>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자네를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처음에는 좋은 말로 설득하고, 달래고, 비위를 맞추려고 하겠지. 이미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저들은 더 많이. 조금씩 더 많이 바라게 될 거고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움직일 거야.
그리고 자네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게 될 테지. 이미 시작됐고. 저들은 항상 그랬어. 서로 견제해서 꼼짝도 못 하도록 비등하게 가지거나, 모두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거나. 그 가운데 서서, 그래도 관심 없다고 눈 감고 말할 수 있겠나?>
아니겠지. 잘 알다시피. 그가 말했다. 이 모든 게 시작된 이래 사람들의 등쌀을 피해 모든 걸 내려놓고 집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또 시골로 움직여야 했던 그의 부모님.
요양이고 휴가라고 장난스레 말했고 처음에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에 제가 한 일들을 생각하면, 그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몰린 피신이라는 걸 그도, 그의 부모님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잠든 것처럼 누워 있던 시오한이 떠올랐다. 특기자를 상대로 한 전투에 익숙했던 그가. 시오한을 미끼 삼아 흔들었던 이들. 그는 고작 미끼 따위가 될 수 없으며 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매번 흔들렸었다.
시오한의 목숨.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나라, 그의 사람들. 그가 가치 있게 여길 그 무엇도 저 때문에 훼손되는 걸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레드 마피아를 그렇게 보란 듯이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 버린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의 나라에, 전쟁 따위가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다른 무엇도 아닌 저 때문이라면 더더욱.
<마력을 매개하는 건 이미 자네의 선택이 아니게 되었지. 저들이 원하는 것에 반하는 순간 저들은 자네를 원망하고 탓하기 시작할 테니. 나쁜 건 자네고, 잘못도 자네가 한 것처럼. 자기들이 만든 틀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이 자네의 잘못이 될 거라고. 자네의 말이 맞아. 기만으로 유성호를 영웅으로 만든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어. 자네가 계약자가 된 순간 그거야말로 그들에게 명분이 되었을 테니까.>
모두를 위해 희생한 영웅.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며, 계약자가 되었음에도 대가 한 푼 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더 봉사한 사람. 대가 한 푼 받지 않은, 특출하다고 할 만한 건 없었던 그조차 그렇게 했는데 그보다 훨씬 여유 있고 강력한 너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이미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잖아.>
인소더블 특별법. 그의 거취를 제한하고, 특기의 사용을 제한하고, 마력의 매개를 의무화하며 그에 대한 대가에 상한선을 그어 놓은 수많은 제한들. 안전을 위하고 공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전에 없이 급속도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 법이었다. 그건 이도하가 이드로 탈퇴를 선언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독일로 사라진 이후의 일이었다.
<누가 자네를 가여워하고 걱정하겠나?>
누가, 감히 인소더블을.
<자네는 그 힘을 아낌없이 보여 줬는데.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다는 듯이 행동했고, 세상에 자네를 위협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가엾고 약하며 불쌍한 그네들을 도와줘야 마땅할 뿐이지.>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했다. 선고처럼.
<하지만 저들은 절대로 만족하지 못해. 자네도 이미 겪어 봤지 않나? 하나를 주면 둘을 바라고, 셋을 주면 다섯을 원하는 게 인간이야.>
<나는 그동안 병신같이 가만히 있고. 그래?>
이도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하려고. 저들이 아무리 발버둥 치고 발악을 하고 탓을 한다고 한들 자네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고, 자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려고? 아니면 자넬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면 자네가 그들을 한순간에 짓눌러 버릴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으려고?>
그가 느린 숨을 내뱉었다. 한숨처럼. 한겨울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은 주변의 냉기에 입김이 한숨의 형태처럼 피었다 흩어진다.
<자네가 지금까지 그리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건 저들이 모르기 때문이야.>
그가 말했다.
<그래서 자네를 윽박지르고 강요하고, 자기네들의 기준에 맞춰 몸을 낮추라고 설교하길 서슴지 않지. 그들이 그렇게 해도 다분히 상식적이고, 평범하게 자란 자네가 자기들을 어떻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한번 깨달으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인소더블’이라는 매력적인 위명에 내내 열광했던 그들이, 자신들을 든든히 지켜 주고, 풍요롭게 해 줄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 힘이 방향을 바꿔 그들을 겨눌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저들이 그냥 겁먹고 가만히 숨을 죽일 것 같나? 그러면 자네가 자기들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서? 저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은 모두 포기하고?>
아니. 이도하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다. 그건 마치 언제든 쏠 준비가 되어 있는 총을 든 이와 한 방에 머무르는 것과 같았다. 기댈 수 있는 게 쏘지 않겠다는 총 쥔 자의 말뿐이라면. 침묵하고 있던 이도하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자네가 다 감내하겠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세계는 이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나.>
<…뭐?>
<저들은, 인간들은 이미 두 세계의 관계를 이용하는 법을 너무 잘 알아. 그들이 지금의 계약자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걸 자네도 충분히 봤잖아.>
기원을 조작하고, 운을 맞춰 계약을 인위적으로 유도하고, 이미 맺어진 계약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더 많은 계약자들을 부르게끔 하기 위해 그들의 것이 아닌 세계를 휘저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볼 수도, 영영 볼 일도 없는 세계를 누가 염려하겠나. 저들은 결국 저 세계를 다 불태워 버리고 말 거야.>
이미 자기들의 세계조차 불태우며 살아왔으니까.
<자네의 황제가, 언제까지 고귀한 황제일 수 있을 것 같은가?>
이도하가 그를 보았다.
<문을 닫게.>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나를 죽여서, 세계를 닫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