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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09화 (208/250)

209화

진심인가 해서 쳐다보니, 싱크대 앞에 선 해밀턴 블랙은 물끄러미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이도하가 식탁 위로 손을 짚었다. 탄식 같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비로소, 그는 해밀턴 블랙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우리. 그리고 저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 와중에도, 고개를 드는 거부감에 차라리 그냥 저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으면 싶다. 아흔 정도 먹은 것 같은 눈앞의 노인이, 심지어 아흔이라기에도 꽤 정정해 보이는 그가 사실은 천 년 전부터 살아온 이라는 걸 이도하는 실감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제가 이렇게 기가 막히고 허탈한 건 세대 차이 수준도 아니고 세기 차이 때문인 것이다. 그것도 무려 수 세기.

<인권.>

아연해진 이도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특기자 인권? 그것 때문이었다고?>

계약자가 된 특기자들이 박해를 받을 것 같아서. 그럴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에. 우르슬라가 수천 번 수만 번 시간을 되돌리게 된 게, 그녀를 그 비극으로 몰아넣은 게, 비비 꼬인 지금의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시작이, 고작 PTSD와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미친 노인네의 염려증 때문이었다고.

이제 정말 화가 날 것 같다. 이도하는 뜨끈뜨끈 열이 오르는 것 같은 이마를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홧김에 정말 뭔가 일을 칠 것 같았다. 차라리 정말 해밀턴 블랙이 말하는 것처럼 계약자들이 박해받고 있었다면 이렇게 환장할 지경도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그를 더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인권이라. 그렇게 말하니 우스운데. 굉장한 사치처럼 들려.>

정말 딱 환장할 것 같은 것은, 라면 끓이는 법이라도 읽는 것처럼 시종일관 고저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와 변화라고는 없는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답 없는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무려 천 년을 살아온 사람이니 오죽하겠냐마는. 그걸 알면서도 이해를 한다든가, 하여간 뭐든 때려 부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가라앉히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이든, 그걸로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지.>

<뭐?>

질문이 아니었다. 어디 다시 말해 보라는 듯 이도하가 씹어 뱉었다.

<어떤 의무도 책임도 강요받지 않고. 어떤 혐오도, 경멸도 겪어 본 적 없이. 자네를 향한 환호와 열광도 그저 귀찮을 정도로. 외면하고 싶은 건 외면하면서.>

그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해밀턴 블랙이 삐뚜름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닌가?>

팍! 이도하의 앞에 놓여 있던 콜라 잔이 짓눌린 것처럼 으스러졌다. 사방으로 콜라가 튀고 식탁 위를 줄줄 흘러 이도하의 발도 적셨다. 차가운 것이 신발 속으로 스며든다. 끈적해질 걸 알아 벌써부터 불쾌하게 만들면서.

주변의 공기가 불안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이도하에게 해밀턴 블랙이 태연히 말했다.

<그렇지 못한 때가 있었다는 걸 자네도 잘 알 거야. 그리 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자네 나라에서는 법에 이름까지 붙이지 않았나.>

유성호.

대학을 졸업해 작은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던 그는 27살에 소환에 응해 계약자가 되었다. 첫 번째는 아니었으나, 그 당시 한국의 유일한 계약자였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죽었다. 마력을 매개하다가 탈진해서.

나라가 힘든 때였다. 모두가 하루라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때였다. 그는 기꺼이 나라를 위해 제 한 몸을 내던졌다. 한 번의 소환에도 최대한 많은 마력을 이끌어 내고, 더 많은 에너지를 위해 가능한 한 쥐어짰다. 수백 명이 신발 밑창까지 탈탈 털어 내는 것보다도 그가 한 번 오즈에 갔다 오는 게 나았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숨 쉴 틈이나마 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마당에 대가를 바라는 것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의무로 감내했고, 책임으로 여겼다. 모두가 그를 응원했다. 어느 기자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그의 시신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사실 그 희생이 정말로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옳지 못한 의무였다는 것도. 이후 그의 아버지와, 뜻있는 사람들이 움직여 통과시킨 법안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계약자가 된 특기자에게, 개인에게 다수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울 수 없도록. 계약자가 마력을 매개하든 말든, 그 마력으로 무엇을 하든 말든 국가가 왈가왈부할 수 없도록. 아무도 그들이 다른 세상으로부터 가져온 그 값어치 있는 것을 대가 없이 요구할 수 없도록. 그들이 고작 누군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래, 따지면 그 사람들 덕이지.>

이도하가 짓씹듯 말했다.

<망할 곰이나 호랑이 꼴이 되지 않은 거. 천 년이나 앞서서 두려워하느라 애먼 사람을 죽인 당신 덕도 아니고, 세상에서 저가 가장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연민과 피해망상에 빠진 당신 덕도 아니고!

굳이 특기자와 비특기자 따위의 일이 아니라도 세상은 뭐든 다 그런 식으로 밟아 왔어. 천 년이나 살면서 삽질을 할 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걸 좀 보지 그랬어.>

<…….>

해밀턴 블랙이 빤히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에 무슨 생각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잘 컸군.>

이윽고, 그가 말했다. 이도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저들이 자아 반성, 성찰, 뭐 그런 것들로 더 옳은 세상을 만들고, 우리를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더 이상이 노망 난 헛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이도하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도하가 해밀턴 블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발밑에 굳은 콜라가 찌그덕- 소리를 냈다. 발가락 사이로 스며든 불쾌감이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뭐야.>

해밀턴 블랙이 가볍게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사실은 그리 아름답고 숭고하지 않았어. 그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모든 걸 감내했던 게 아니야.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오즈에 겁을 먹어 소환에 응하지도, 더는 마력을 매개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 남 좋은 일만 하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고 싶었겠나.

그는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였어. 마력을 짜내다 죽은 게 아니라 회사를 다니며 다른 세상까지 오가려니 피로가 겹쳐 과로로 죽었네. 물론 시신이 말라비틀어지는 극적인 일도 일어난 적 없어. 초라했을 뿐.>

그가 말했다.

<사실이라면, 계약자 같은 건 그만두고 싶어 했던 그를 원대로 놔두지 않았던 세상 정도. 어떻게 가만히 두었겠나. 그 하나만 애쓰면 나라가 하루를 더 버텨 내는데.>

<…….>

<하지만 돈이나 뱉어 내는 노예보다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 훨씬 낫지.>

이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일이, 당신 조작이라고.>

해밀턴 블랙이 고개를 기울였다.

<포장하면 어떤가. 좀 평범한 데다가 지저분하고 초라했다고 해서 그가 나라를 살리지 않은 게 되는 건 아닐 텐데. 강요된 것들이었지만. 게다가 그 이후로 자네의 나라는 물론 꽤 많은 곳에서 계약자들이 그처럼 자리매김했으니 영웅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지 않아?>

마땅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운 좋은 특기자 따위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더 풍요롭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어 주는, 열광하고 응원하며 선망할 만한 영웅이자 연예인으로.

<죄책감과 책임감을 자극한 충격 하나가 인식을 얼마나 단숨에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 보면 우스울 정도야.>

<…그래. 참 잘됐네.>

이를 악문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계약자가 망할 곰이든 호랑이든 염병할 쓸개 빠진 꼴이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느라고 좆 빠지게 애쓰셨네.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드릴까? 그깟 기만을 부려 놓고 지금 생색을 내? 우리가 뭐 다 병신 호구 머저리야? 당신이 아니라도 누군가 움직였을 거야. 어쩌면 더 나은 방법으로! 그게, 엘하시온이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

이도하를 가장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이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퍽이나 통찰력이 있는 척하는 그의 말이 옳든 틀리든, 그의 선택이 잘못되었든 아니든 결국 그의 말대로 지금 세상은 계약자들이 선망하는 대상으로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세상이라는 것. 엘하시온이 죽었음에도.

특기자들이 그들의 값어치로 인해 빨대 꽂힌 꼴이 될까 봐 엘하시온을 죽였다는 그의 말과는 완벽하게 모순되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세상에는 멋진 영웅들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고, 정말 그렇게 착각하게 할 수 있지만 결국 그네들의 배를 불리는 이득에 관련된 일이야.>

특기자가 계약자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들. 그건 결국 운에 지나지 않았다. 특기자가 계약자가 될 의사를 갖고, 오즈의 누군가가 계약주가 될 의사를 가져야 하며, 그와 동시에 그들의 기원과 특기가 일치해야 하는 운.

나아가, 소환을 실행할 마력까지 갖춰져야 하는 기적의 확률. 거기에 기대 마냥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인간들이 사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쟁취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었다.

<권력을 쥔 이들이 정말 그깟 랜덤 뽑기에 순응하고 있는 것 같나?>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우르슬라를 보고도, 신은호를 보고도?>

이도하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죽은 계약자가 살아 있던 시간에 머무르라는 속삭임에 망령으로부터 마력을 매개하고 있는 우르슬라. 타인의 특기를 훔쳐 내는 능력으로 계약 양도 실험에 이용된 신은호.

<하물며, 인소더블인 자네가 계약자가 된 지금은 어떻지?>

해밀턴 블랙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자네가 평범한 24살 대학생으로 살 수 없게 된 게. 세상이 자네를 평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게 된 게.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고 할 생각인가?>

이도하는 바닥없는 허공에 심장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던 텅 빈 가슴으로 서늘한 냉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싸늘한 얼음 덩어리가 심장에 닿은 것 같은 섬뜩함이 주뼛 든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아니나 그가 어느 날을 얘기하는지 저가 그냥 알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계약자가 되었던 날.

처음으로. 다시 시오한을 만났던 날.

<자네는 계약자가 되어서는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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