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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08화 (207/250)

208화

해밀턴 블랙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들어오라는 것처럼. 이도하는 쿰쿰한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풍기는 어두침침한 집 안을 꺼림칙하게 노려보다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쿵, 작은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집 안은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식탁이며 싱크대 위에 잡다한 물건들이 부산스럽게 올라가 있었으며 발치에 우산이나 가방 따위가 치였다. 싱크대 한쪽에 놓인 전자레인지 위에서는 털이 노란 고양이가 이도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외에는 불을 켜 놓지 않아 어두웠고, 주위가 조용하니 숨 쉬는 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몹시 선명하게 들려온다.

이도하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려놓는 노인을, 해밀턴 블랙이자, 제게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폴리온이었던 남자를 몹시 기이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잔뜩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아닌가 했더니.>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아.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가 막 올려놓은 전기 포트를 껐다. 이번에는 냉장고를 뒤진다. 덜그럭거리는 게 얼음을 찾는 것 같았다.

노인답게 그 모든 행동들이 아주 느렸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이도하는 저 천 년 묵은 노인이 혹시 정말 저를 화나게 하려고 저러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주승현? 아니면 엘하시온? 이도하가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몰라 그를 노려보는 사이, 해밀턴 블랙은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 잔 두 개에 채웠다. 그 위로 쪼르륵 콜라를 붓는다.

<내가 왜.>

이도하가 말했다.

식탁 위에 콜라 잔을 내려놓은 해밀턴 블랙이 잔을 쭉 밀었다. 반대편에 선 이도하에게로. 매끄럽게 미끄러져 이도하의 앞에 멈춰 선 잔에서 콜라가 요동치며 왈칵 바깥으로 흘렀다. 녹슬었군. 해밀턴 블랙이 중얼거렸다. 이도하가 물었다.

<우르슬라를 불쌍히 여겨서? 홧김에 당신을 죽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봐.>

끼이익, 식탁 의자를 빼 앉은 해밀턴 블랙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잔을 꺼내 얼음을 넣고 콜라를 부은 행위들이 참 힘들었던 것처럼. 제 콜라를 한 모금 넘기고서야 그가 눈을 들어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여워서 화가 났나?>

해밀턴 블랙이 도리어 되물었다.

<나를 죽일 만큼?>

이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엘하시온의 죽음으로 얻은 것은 의문뿐이었다. 우르슬라를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웠으나 지금 제 코가 석 자인 그가 화를 낼 일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겠지. 자네가 그녀를 가여워하길 바랐지만, 타인에 대한 동정이야 동정으로 끝날 뿐이니까. 누구도 고작 타인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만큼 동정하지는 않아.>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자기 자신을 동정할 때 그렇게 하지. 이건 자네 일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자네에 관한 일이었어.>

<…뭐?>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속이 텅 비고, 그 속으로 찬바람이 든 것 같은 불쾌감이 점점 더해진다. 발밑에서부터 슬금슬금 차오르는 것 같다. 해밀턴 블랙은 잠시 말없이 저를 노려보듯 하는 이도하를 마주 보았다. 문득 그가 물었다.

<…지금 자네가 쓰는 영어는 배운 게 아니라 특기겠지?>

<허.>

수염으로 덮인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잔뜩 긴장해 있던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해밀턴 블랙이 다시 물었다.

<특기 맞나?>

<그래.>

이도하는 빈정거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고 머리도 어지러웠으며, 신경은 곤두선 바늘 같았다. 무엇보다 저 문간에서부터 빈 독에 찬바람이 들듯 불안감이 감도는 마음에 그는 여유가 없었다.

이도하는 불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너무 많이 겼었고, 그럴 때마다 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오해가 생기길 바라지 않아서. 제 언어보다 편한 언어는 없지 않나. 게다가 난 말주변도 썩 좋지 않은 편이고. 승현이가 자네에게 설명해 주는 편이 훨씬 좋았을 거야.>

<설명해 줄 게 뭐냐고. 당신과 주승현이 무슨 사이건, 그게 왜 내 일이야.>

처음부터? 이 모든 일에 처음이라고 할 만한 게 도대체 어디 있다고.

<왜 날 찾아왔지?>

해밀턴 블랙이 도리어 물었다.

<앙그라엘에서 자네가 본 것들 중 뭐가 궁금해서. 내게 뭘 묻고 싶어서 찾아왔나?>

날 선 새까만 눈동자가 해밀턴 블랙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해밀턴 블랙이 평온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달칵, 얼음이 녹아내렸다.

<당신이 엘하시온을 죽였지.>

우르슬라의 계약자 말이야. 잠깐 뒤에 이도하가 덧붙였다. 그에게는 바로 몇 분 전의 일이었지만, 해밀턴 블랙에게는 천 년 전의 일일 터였다. 그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

그러나 해밀턴 블랙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이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이도하가 입술을 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꽉 잠긴 것처럼 목소리가 쉽사리 나오지 않아,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여야 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마침내, 이도하가 물었다.

<지금이 오는 걸 막으려고.>

해밀턴 블랙이 대답했다.

<이런 미래가 오는 걸 막으려고.>

유리잔을 흔들며, 그가 말했다. 그가 눈길을 떨구었다.

<실수였지만.>

‘틀렸구나.’

천 년 전, 엘하시온을 죽이고서 그랬던 것처럼. 이도하가 입술을 짓씹었다. 해밀턴 블랙의 손에서 유리잔이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팍 깨져 버렸다. 콜라가 왈칵 그의 손을 적시고 식탁 위로 흐르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해밀턴 블랙이 의자를 조금 빼며 손을 들었다. 조금도 놀라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얼어 죽을 철학 놀이나 하자는 것 같아? 알아듣게 말해.>

<나도 자네와 철학 놀이를 하자는 건 아니야. 말 그대로네. 지금, 오늘. 이런 세상. 그 소년을 죽이면 다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손을 털어 내며, 해밀턴 블랙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손에서도 콜라가 뚝뚝 떨어진다.

<이런 세상?>

해밀턴 블랙이 손을 뻗었다. 주름진 손이 이도하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의 오른쪽 눈 밑을. 화이람. 한때는 쪽팔리고 부끄러워 가리고 다닐 생각까지 했으나,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익숙해져 어지간해서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그의 계약명이 새겨진 곳이었다.

<계약자가 있는 세상 말일세.>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가엘은 아무것도 몰랐어. 그가 바라는 건 진실로 단 하나뿐이었지. 살아남는 것. 그는 자아라고 할 만한 걸 가지기 시작한 이래로 늘 병마에 시달려 왔고, 그게 곧 자기를 죽일 거라는 예고에 쫓겨 왔기 때문에….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어.>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군. 해밀턴 블랙이 중얼거렸다.

<그는 정말 악마라도 불러낼 생각이었고, 그걸 위해선 뭐든 다 할 수 있었을 거야. 그 간절함이 길을 열어 날 불러들였던 건 정말 단지 우연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네. 뭐가 불려 오든 다 상관없었을 테지. 살 수만 있었다면 더 바라는 것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 소년은 달랐잖나.>

그가 고개를 들고 이도하를 보았다.

<그 소년이 바랐던 건 고작 목숨 같은 게 아니었어. 그는 제가 뭘 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뭘 하고 싶은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지. 그 기원으로 미래의 존재를 불러냈고, 그 미래의 존재를 마주침으로써 제가 깨달은 것들보다 더 나은 미래를 자기가 만들고 싶어 했어. 예를 들면, 나와 같은 자들이 그들의 세계에 불려가 힘을 빌려주고 대가로 마력을 받아 가는 그런 관계를 정립하는 것 말이야.>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많은 이들이 소망하고, 더 많은 이들이 불려 오고, 그런 게 당연해지도록.>

끼익- 그가 일어나 돌아섰다. 싱크대에서 물을 틀고 손을 씻어 낸다. 이도하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

이도하는 이 노인이 하는 말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생각지도 못한 것이 툭 튀어나와 뺨을 탁 때린 기분이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찰나에 그의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산발적으로 튀어나왔으나, 결국 폭죽이 다 터졌다가 금세 사그라들 듯 그 산만한 생각들도 다 사라지고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해밀턴 블랙이 엘하시온을 죽인 이유는, 오늘날처럼 계약자가 공연한 세상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 그런 세상을 불러오는 건 엘하시온이었을 테니까.

<왜?>

이도하가 혼란스러워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이니 생각나는 말도 그것밖에 없었다.

<그걸 왜 막으려고 했는데?>

해밀턴 블랙이 돌아섰다. 그는 정말로 뜬금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황망해하는 이도하를 잠시 바라보았다.

<호랑이나 곰은 무섭지. 맹수이고, 혹시라도 공격당하면 맞설 수 없으니까. 자네야 무서운 게 없을 테지만, 보통은 무서워해. 일반적으로는 건드리지 않겠지. 두려워 다 잡아 죽이려고 하거나.>

그가 말했다.

<한데 어느 나라에서는 곰의 쓸개를 빼서 약으로 쓰기도 하거든. 꽤 돈이 된다고 해. 그래서 산 채로 잡아 놓고 링거를 꽂아 쓸개즙을 빼낸다지. 동물원에서 보는 백호가 다 한 마리의 후손인 건 알고 있나? 멋진 백호만 알려져 있지만, 근친교배를 많이 해서 엉망으로 태어나는 백호가 사실은 더 많아. 그래도 동물원에 백호를 전시하면 매출이 확 달라진다는군.>

<개소리가 취민가?>

듣다 못한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불태우려던 마녀가 이득이 되면 어떨 것 같나? 가치 있는 것을 뱉어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말이야.>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이도하가 멈칫했다.

<모르겠나? 우리가, 저들에게 값어치 있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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