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07화 (206/250)

207화

‘그레텔의 그림자’. 암군의 사령관인 군나르 아스터의 계약자 시리스가 사용했던,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에서 그 흔적을 읽어 내는 특기. 지난날 지하 감옥에서 그녀가 특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 이도하는 아예 그림자의 범위를 넘어 사물의 흔적을 읽어 내는 식으로 꽤 쏠쏠하게 사용해 왔었다. 그 힘이, 이도하를 중심으로 끝도 없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힘의 파동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빨랐다. 디지털 모자이크처럼 깨져 나가며 바다의 밑바닥을 할퀸 것처럼 떠오른 흔적들은 누군가 눈치챌 새도 없이 아주 찰나의 반짝임으로 지나가 버렸다. 거대한 채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뒤늦게 한차례 바람이 휘몰아칠 뿐이었다. 에너젠을 넘어, 그 근방을 다 쓸고 서울을 지나 바다 너머까지 번진 것은 숨 한 번 삼킬 시간 동안이었다.

“…….”

이도하의 미간이 꿈틀 요동쳤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이도하가 결국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그가 무릎을 짚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대한민국 전역을 쓰는 것쯤은 견딜 만했으나 범위가 대륙을 넘어가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온갖 정보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홍수처럼 쏟아졌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곧 뒤집어질 것 같다. 버텨 보려던 이도하가 입을 틀어막았다.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고집스럽게 참아 내던 이도하가 눈을 떴다. 새하얗게 일렁이는 눈동자에 불신이 들어차 있다.

“…뭐야?”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화이람?’

“어, 나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도약한 이도하는 다음 순간 그가 아는 서울의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칼날처럼 부는 찬바람에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지고 품이 넉넉한 옷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마천루 끝에 올라선 이도하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이람.’

“…응, 시오한.”

이도하가 기계처럼 대답했다. 세상이 조용했다. 한밤중에도 하늘의 별이 다 땅으로 떨어진 것처럼 빛나고 있어야 할 도시에 불빛이 희끗희끗하다. 그 빛조차 주변을 밝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반딧불이의 무덤처럼 온통 컴컴한 가운데 곧 죽어 갈 빛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음침함과 을씨년스러움, 불안과 긴장이 맴돌고 있었으며 이따금 어디선가 빛이 번쩍거리며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이도하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핸드폰을 그저 진동이나 해 대는 벽돌쯤으로 취급하게 된 지 오래였다. 그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했던 메시지들이 알람 화면에 가득 떠 있었다.

전부, 재난 문자다. 핸드폰 화면 위로 떠돌듯 잠깐 맴돈 그의 손가락이 화면을 열었다. 흐릿하던 빛이 밝아지며 이도하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속보> 정부, 국가 비상사태 선포.

쿵, 이도하는 뭔가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제가 모르는 사이 발을 헛디뎌 추락한 것처럼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아찔하다. 이도하가 잠깐 눈을 감았다. 다시 떠도, 선명한 화면은 여전하다. 떨리는 손가락이 다른 기사를 짚었다.

<속보> 한국 강타한 규모 4.3 지진… 전 세계에 지진 동시다발적, 더 큰 재앙의 전조인가.

지난 8일 밤 8시경 울산, 부산, 대구, 대전을 비롯해 전 국토에 규모 약 5.6 지진이 강타했다. 추정되는 재산 피해만 벌써 1000억 원 이상으로, 사망자와 부상자를 비롯한 실종자는 여전히 집계 중에 있다.

긴급 재난지원팀을 편성한 정부는 이번 지진이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아시아 주변 국가를 넘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다수의 국가에도 각기 다른 규모와 강도로 잇따라 덮쳤다고 밝혔다. 일본, 인도네시아, 칠레, 멕시코 등으로 이어지는 환태평양 조산대, 일명 ‘불의 고리’를 넘어서 유례없이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지진이라는 것.

이번 지진이 전 세계를 강타할 수도 있는 대규모 지진의 전조라는 전 세계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라, 각국 정부들이 피해 복구와 질서 유지, 대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속보> 충남 천안에 규모 4.5 여진… 전국에 여진 이어져.

<속보> 전국 피해 집계 중. 현재까지 사망자 279명, 부상 1203명, 실종 120명.

<속보> 칠레 전역 강타한 규모 8.9 지진, 사망자 천여 명… 칠레 대통령, ‘국가 붕괴 위기’.

그 외에도 이어진 수많은 뉴스들이 전부 지진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전혀 없었으나, 전부 속보로 속속들이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도하가 날짜를 확인했다. 10일 오후 11시 47분. 이틀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화이람, 괜찮은 거야?’

뇌리에 울리는 시오한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초점을 잃고 뿌옇게 분열되는 글씨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도하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가 화면을 껐다. 꺼멓게 죽은 화면에 제 얼굴이 비친다. 이도하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어. 괜찮지. 찾았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이도하가 말했다. 이미 그의 힘이 세계 전역에 퍼져 있다. 도약을 위해 또다시 힘을 끌어올릴 필요는 없었다. 거센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며 그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뒤흔들었다. 이도하가 눈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밝아진 사위가 환하게 눈을 찔렀다. 전등을 켠 것처럼 까맣게 내려앉았던 밤은 사라지고 화창한 아침이다.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했던 칼바람도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숨을 들이켜자, 폐부 깊숙이 흙냄새가 묻어나는 아침 공기가 가득 밀려들어 온다. 그대로 내쉬려던 이도하는 그만 허리를 푹 꺾고 말았다.

그대로, 그는 속에 든 것을 죄다 토해 냈다. 뱃속을 꽉 틀어쥐고 쥐어짜 내는 것처럼 끝도 없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변변히 먹은 것도 없긴 했으나 그나마 든 거라도 싹 다 비워 내려는 것처럼. 식도가 뜯길 것처럼 화끈거렸고 반사 작용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헉.”

눈을 훔쳐 내며 이도하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몇 번 더 거칠게 숨을 들이켜고서야 그는 간신히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개 같네, 진짜….”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은 이도하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사방으로 지평선이 쫙 펼쳐진 대평원에 집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주변에 푸른 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고, 좀 떨어진 곳에 헛간이나 마구간처럼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빨간 우체통까지 있다.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지진이 여기선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텍사스라, 이도하가 조소를 머금었다.

“텍사스 연쇄살인마야 뭐야….”

당장이라도 다시 속이 뒤집힐 것처럼 어질어질한 머리를 툭툭 두드린 이도하가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쥐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낸다. 그냥 발로 차 부수고 쳐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노크를 해야 하나. 손을 들고서 이도하가 스스로도 우스운 고민을 하는 사이였다. 철커덕,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이도하는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제발 살려 줘.’

피비린내가 지독한 지하 감옥에서 마주쳤던 그 푸른 눈동자.

‘안 돼-!!’

우르슬라의 기억에 남은 그 푸른 눈동자를.

흔적도, 기억도, 과거도 아닌 눈동자가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덥수룩하게 난 짙은 수염, 그나마 빗어 넘긴 흔적이 있는 머리칼.

갑옷이 아닌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어디 나가려던 참이었던 것처럼 포대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누가 봐도 아흔은 넘긴 것 같은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크고 작은 주름이 가득하다.

해밀턴 블랙이 122살의 노인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지만, 정말로 이렇게 노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도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그 얼굴에서 주름을 지워 내 보았다. 그을음과 먼지, 절망과 우울로 뒤덮여 있던 얼굴을 찾아보았다.

어렴풋이 겹쳐지는 얼굴은 분명 천 년 전에 이도하가 보았던 그 얼굴이 맞았다. 아폴리온. 그리고, 흐린 흑백 사진 속의 가엘 루이즈. 물끄러미 이도하를 바라본 그가 입을 열었다.

<왔군.>

해밀턴 블랙이 말했다. 옆집에서 이웃이라도 놀러 온 듯한 반응이었다. 저도 모르게 한껏 긴장하고 있던 이도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다 이내 미간을 구겼다.

<…해밀턴 블랙.>

해밀턴 블랙이 이도하를 빤히 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이도하를 가만히 훑었다. 의외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 그는 이내 제가 쥔 포대를 내려다보았다.

<아쉬워지긴 하는구나.>

툭, 포대를 한쪽에 던져 놓은 그가 다시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뭔가 기다리는 듯이. 이런 장면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이도하는 문간에 서서 얼굴을 구긴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잠시 정적이 지나갔다.

<…안 하나?>

그가 물었다.

<뭐?>

전혀 영문을 모르게 된 이도하가 되물었다. 이번엔 정말 이상하다는 듯 해밀턴 블랙이 고개를 기울인다.

<승현이에게서 듣고 온 게 아닌가?>

<무슨 승현, 주승현?>

<아니군. 어쩐지.>

<주승현이 왜-.>

<그럼 어떻게 날 찾아왔지?>

이 남자의 입에서 왜 주승현이 나오는지, 왜 그렇게 친숙하게 부르는지, 왜 제가 주승현의 말을 듣고 찾아왔어야 하는지, 제게 뭘 기대했는지. 그런 의문들과 함께 이도하는 불안하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그를 옥죄었다. 옆을 잡아 줄 것도, 밑을 받쳐 줄 것도 아무것도 없어서 심장이 불안정하게 떠 있는 것 같은 느낌.

<…당신을 봤지.>

이도하가 입을 뗐다.

<천 년 전, 앙그라엘에서.>

그가 눈을 깜빡였다. 소리 없이 조금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그런 것도 가능한가 보군.>

그가 조금 웃었다.

<그럼 설명이 필요하겠는걸. 아니,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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