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십자군?’
“아폴… 해밀턴 블랙, 아무튼. 그자가 입고 있던 갑옷 말이야.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그거 십자군 갑옷이라고.”
말하다 보니 또 기가 막혀, 이도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십자군. 제가 해밀턴 블랙과 십자군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천 년 전쯤에 여기서 일어났던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 처음에 그 지하 감옥에서 소환진의 흔적을 읽었을 때 쇳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옷 소리였던 거야.”
기사들의 갑옷 소리를 듣고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는데, 여기서 오는 기시감이었다. 설마하니 그게 갑옷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해밀턴 블랙은 특기가 알려진 적이 없어. 나이가 많다 보니 특기가 장수라는 소리만 우스갯소리처럼 돌았거든.”
이도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찔한 기분에 그가 이마를 붙잡았다. 살면서 지금처럼 기가 막히고 아연해 본 적이 또 없는 것 같았다.
“122살이 아니라, 1122살이었어….”
죽지 않는 특기라면 인소더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이렇게 멍청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폴리온이 해밀턴 블랙이라는 걸 안 지금, 이도하도 마침내 그를 찝찝하게 건드리던 기시감을 해결한 바였다.
“여기 있다. 가엘 루이즈.”
핸드폰을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스페인의 특기자 가엘 루이즈. 1940년 최초로 인소더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
“가엘. 가엘… 가엘 마제스. 가엘 루이즈. 같은 이름이잖아.”
이도하가 화면에 뜬 가엘 루이즈에 대한 글을 촤르륵 쓸어 올렸다. 순간 그가 우뚝 멈추었다. 긴 글에 설명을 돕기 위해 첨부한 사진 중 한 장이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다가 중간에 찍힌 것 같은 흑백 사진 속, 남자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쓴 채 얼핏 절 찍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의 작성자가 친절하게 가엘 루이즈라며 그의 얼굴 위로 붉은 동그라미까지 표시해 놓았다. 이도하가 핸드폰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하.”
짧게 잘 정돈된 수염에 단정한 양복. 색조차 없는 흑백 사진이지만 알고 보면 분명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폴리온.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계약주의 이름을 쓴 거였어.”
가엘. 그가 죽던 순간 오즈에서 튕겨 나간 아폴리온이, 해밀턴 블랙이 그 시간으로부터 쭉 살아가면서 간직했을 이름. 그 세계에서는 결국 기록조차 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이름을, 그가 이곳에 남긴 것이다.
계약자의 특혜로 알아듣게 된 앙그라엘의 언어와, 그들의 언어로 실제로 발음하는 이름의 느낌이 묘하게 달라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찝찝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도록,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을 뿐.
그리고 우르슬라라고 해서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던 우르슬라.
‘그 여인이 거짓말을 했구나.’
“…그렇네.”
시오한이 나직이 말했다. 누군가 꽉 조르는 것처럼 목구멍이 아파 와, 이도하는 간신히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올라는, 우르슬라는 제 계약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몰랐다.
미친 왕, 그런 왕이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던 공작가, 마녀를 불러냈다고 떠돌던 소문, 악마를 소환했다고 알려진 가엘. 일련의 사건들로 당연히 엘하시온은 언제든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막연한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해 가엘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시감에 몰두했을 것이고, 결국 가엘 루이즈를 찾아냈을 것이다.
1940년 스페인의 특기자. ‘가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인소더블이자, 처음으로 인소더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진 자. 그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업적이었으나, 실상 그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한 사람이었다.
현대 아이라의 발족에 가장 큰 역할을 했고, 계약주와 계약자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낸 것 역시 이 사람이었다. 지금의 계약주와 계약자 관계를 정립해 널리 알린 것도 가엘 루이즈다.
특기는 기밀 처리되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조차도 그가 한 일이었다. 특기자들의 특기에 시적이고 은유적인 이름을 붙이고, 계약자들의 특기를 그 당시엔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개인 정보 개념으로 다루어 공개되지 않도록 한 일.
“가엘 루이즈의 특기를 ‘예언’이라고 추측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도하가 글의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행보를 보면 그런 추측을 할 만도 하다. 사실 가엘 루이즈가 예언을 한 게 아니라,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또 말은 달라지지만. 그는 우르슬라가 단서를 그러모아 밟았을 과정을 그대로 다시 밟아 갔다.
만약 ‘가엘’이라는 이름이 우연이 아니라면. 가엘 루이즈가 인소더블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면? 죽고 싶지 않았던 가엘. 그가 소환한 계약자. 가엘을 궁으로 불러올린 후로 불사를 갈망하기 시작한 왕.
만약 가엘 루이즈가 ‘가엘’이라는 이름을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사용했다면, 그는 그가 소환되었던 그 시간부터 쭉,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가엘이 바랐던 것처럼 죽지 않고, 왕이 갈망했던 것처럼 영생하며. 그리고 그런 그가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면 짐작 가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인소더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미국의, 해밀턴 블랙.
그리고 우르슬라가 그 모든 걸 알아냈을 때쯤엔,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불투명한 장막 너머로 어른거리는 위협이 두려워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집중하느라고, 그녀는 정작 지키고 싶었던 이가 그 장막 너머로 건너가는 걸 보지도, 막지도 못했다.
이도하는 그게 얼마나 혹독한 후회로 그녀를 괴롭혔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제 계약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주변에 떠들어 댄 건 그런 그녀의 후회이자, 죄책감에 먹혀 가던 그녀의 방어기제였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이미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리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그녀는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곁에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소환에 응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계약자의 죽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지켜보면서.
‘화이람, 그 해밀턴 블랙이라는 자가 그대의 세상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이지?’
“있지, 어딘가 있겠지.”
죽지 않는 특기. 아무리 세상에 별의별 특기가 다 있다고 하지만 무슨 그런…. 이미 특기로 옷의 물기를 다 날려 버렸음에도 이도하는 살갗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그렇다면 그렇기 때문이구나. 그 여인이 제 계약주를 살리지 못한 건.’
시오한이 말했다.
“뭐?”
‘화이람, 그대가 만났던 그 이사는 이올라가 천 년의 인과를 되돌릴 수 없다 했다고 말했지. 그래서 그녀의 특기가 ‘태엽’인 거라고. 하지만 그대도 봤잖아. 그녀는 시간도, 인과도 되돌릴 능력이 있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 인과가 얼마나 쌓였든 작은 선택 하나로 모든 건 바뀌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녀는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시오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꿔야 하는 죽음…. 엘하시온을 죽인 이가 천 년의 시간 동안, 천 년 후의 먼 미래에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는 이라면, 죽일 수 없는 이라면 그녀가 뭘 할 수 있겠어?’
“!”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해졌다. 망연해진 이도하가 입만 벙긋거렸다. 손목을 잡아챘던 차가운 손길, 형형했던 푸른 눈동자.
‘죽여.’
레무스 비숍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내게 도움을 청하러 왔었습니다. 그를 죽여 달라고.’
그건 해밀턴 블랙이었다. 해밀턴 블랙을 죽이라고. 죽지 않는 자를, 죽을 수 없는 자를 죽이라고. 그의 존재가 자체가 미래를 고정해 놓은 핀처럼 꽂혀 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몇 번을 되풀이해도 엘하시온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엘하시온을 죽인 해밀턴 블랙이 살아 있는 한, 우르슬라는 뭘 해도 그를 살릴 수 없다. 그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해밀턴 블랙은 죽지 않는 자였다. 이 기가 막힌 인과에 이도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럼 그들이 한 건 맹약이 아닌 거야.”
그들이 맺은 게 맹약이었더라면, 이런 결말을 맞이하지 말았어야 하니까.
“이게 어디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고, 반드시 지켜질 약속이야.”
이도하가 품을 뒤졌다. 손끝에 걸리는 종이 더미를 찾아 쑥 끄집어낸 그가 일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염병할….”
옷은 말랐고 그에 따라 종이도 말랐지만, 이미 그 위에 적혀 있던 잉크는 다 쏟아진 죽처럼 엉망으로 번지고 엉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쯧, 혀를 찬 이도하는 그대로 종이를 내던져 버리려다가, 다시 품 안에 쑤셔 넣었다.
“어쨌든 아니야.”
일어서며,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아니다. 맹약이었다면, 천 년 전 그 대전에서 가엘이 죽지 않든가, 지금 이 세계에 해밀턴 블랙이 존재하지 않든가,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하니까.
맹약이 정확히 뭔지는 천 년을 겪은 지금도 여전히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이도하가 지금까지 몸소 느껴온 맹약이라면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느꼈던 것처럼, 마치 제 존재와 시오한의 존재가 섞여 드는 것 같은, 그런 식이라면.
“…….”
맹약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아폴리온-해밀턴 블랙이 대체 왜 엘하시온을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만나 보면 알겠지.”
찝찝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던 이도하가 말했다. 해밀턴 블랙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정말 해밀턴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그건 찾으면 될 일이다.
우웅- 이명이 울리기 시작하고, 검은 동공으로부터 불꽃이 피어나듯 섬광이 피어올랐다. 태양이 작열하듯 순식간에 눈동자를 물들인 푸른빛이 달아올랐다.
물기가 흩어진 바닥이 요동치더니, 갈라진다. 손톱만 한 모자이크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바닥이 덜덜 흔들렸다. 그러고는 쏘아져 나가기 직전에 웅크린 맹수처럼 응축된다. 우우웅, 사위를 흔들던 이명이 일순 멈추었다. 거의 새하얀 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일렁인 순간이었다.
-!!
주변의 모든 소리를 잠식하며,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