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05화 (204/250)

205화

“왜….”

중얼거리는 이올라의 눈에 섬광이 달아오른다. 우우웅, 주변이 진동한다. 그러나 그게 다 부질없음을 엘하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올라 역시 그걸 알고 있음도. 엘하시온이 손을 들었다. 손끝에 스치는 그녀의 갈색 머리칼 끝에는 이미 푸른빛이 맴돌고 있었다. 엘하시온이 아는 바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제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아폴리온도.

“왜!!”

이올라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엘하시온에게는 늘 까마득한 어른처럼 보였던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운다. 엘하시온의 얼굴에 언뜻 미소 같은 것이 스쳤다. 눈물 줄기가 떨어진다.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올라가 고개를 들었다.

“해밀턴 블랙!!”

비명처럼, 그녀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대전에 메아리 친다.

“…해밀턴 블랙?”

되물은 아폴리온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뭔가 깨달은 것처럼. 쿠르릉, 한차례 사위가 진동했다. 천장에 퍼즐 조각처럼 장식된 창들이 깨져 나갔다. 쨍그랑! 부서진 창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던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결국 추락했다.

콰광! 굉음이 울리며,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부서진 창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싸늘한 바람에 그나마 사위를 밝히고 있던 촛불이 꺼져 버렸다. 영광된 순간들이 새겨진 창이 모조리 부서져 떨어진 대전 위로 구름 낀 밤하늘이 드러났다. 이지러지기 시작한, 하늘이.

“왜, 왜 당신이, 도대체 왜….”

울음을 터트리며, 이올라가 울부짖었다. 쿠구궁, 다시 사위가 흔들린다. 묵묵히 선 아폴리온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치듯 하늘이 일그러지고, 주변이 녹아내린다.

그가 고개를 내렸다. 검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다본다. 그가 허망한 웃음을 머금었다. 씁쓸하고, 지독한 후회가 어린 자조였다.

“…그렇군.”

한 발, 두 발. 그가 물러섰다.

“틀렸구나.”

그가 절 이곳으로 부른 이에게 다가갔다. 피 웅덩이 위에 시체처럼 누운 이에게. 그가 무릎을 굽혀, 가엘을 바로 눕혔다. 거의 빛을 잃은 눈동자가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피로 얼룩진 얼굴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폴리온의 손이 그의 눈을 덮어 내렸다.

“…미안하오.”

“안 돼, 안 돼!”

“그대에게도.”

아폴리온이 이올라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다 사라지는 푸른 불티뿐이었다.

모든 게 죽고, 무너지고, 부서진 곳에 혼자 남은 이올라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새파랗게 섬광이 돋아 있던 눈동자에서 빛이 씻은 듯 꺼졌다. 그녀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피와 땀으로 얼룩지고 헝클어진 엘하시온의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끝이 푸른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안 돼, 엘하시온. 나는 못 해.”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후드득, 눈물이 엘하시온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두 번은 못 해.”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가 웃었다.

“내가 바꿀게. 이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막을게. 내가….”

이올라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그의 이마에 닿으려는 찰나, 그녀는 사라졌다. 푸른 불티가 이리저리 맴돌다 찬찬히 가라앉으며 사그라든다. 툭, 엘하시온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금빛 머리칼이 피로 천천히 젖어들어 간다.

우우웅-.

사위가 진동한다. 하늘은 흘러내리고, 갖가지 그림들로 장식된 화려한 대전의 벽은 하늘로 떠오른다. 세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까만 밤하늘이 피로 점철된 대전 위로 강처럼 흘러 섞였다.

[이올라, 이올라.]

넋을 놓은 듯 중얼거리는 엘하시온의 목소리가 울린다.

[전하, 엘하시온 포어 레펜스 들었습니다!]

쓰러지는 가엘, 대전 밖에서 소리치는 기사의 목소리.

[아폴리온, 왜 그랬습니까, 왜요!]

어두운 감옥에 쩌렁쩌렁 울리는 비참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는 푸른 눈동자.

밤하늘이었던 것이 밝았다가 어두워지고, 산산이 부서진 천장의 창이 다시 반짝이며 떠오른다. 부서져 내렸던 그 길을 다시 되밟으며. 녹아내린 세계가 흐르기 시작했다. 점점 더 빠르게. 사람들이 오가고, 빛이 번쩍였다 사라진다.

되감기고 있다.

이도하는 깨달았다. 세상 밖에서, 그들의 세계에서 우르슬라가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흐르고 녹아내리는 와중에 그들이 디디고 선 천장만 굳은 채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이가 찰흙을 갖고 놀듯, 붙잡힌 채 뒤틀어지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불꽃이 튀듯, 이도하의 눈에 푸른 섬광이 튀어 삽시간에 눈동자를 물들였다.

“시오한!”

“화이람, 마탑이야.”

시오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까맣게 물들인 빛은 어느새 씻겨 사라지고 황금빛 머리칼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꽃망울이 탁 터지듯 머리칼이 일순 사위로 확 펼쳐졌다.

이도하가 다급히 그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너울거리던 것도 잠시, 물결치던 머리칼이 쓸려 내려가듯 사라지고 녹아내린 밤하늘이 닿아 스며들듯 그의 머리칼이 다시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짧아진 검은 머리가 휘날린다.

“무슨 소리야?! 가야 돼!”

“그가 날 본 곳. 화이람, 그대가 본 이올라의 기억에 달랐던 때가 있었다고 했지.”

눈을 깜빡하는 사이, 짧은 머리칼이 다시 길고 화려하게 펼쳐졌다. 시시각각으로 모든 게 변하고 있다.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균열은 거기서 시작됐을 거야.”

유영하는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황금색 눈동자가 이도하를 보았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손이 다가와 이도하의 뺨을 다정하게 쓸었다.

“답을 찾아야지.”

흰빛이 사위를 잠식한다. 뇌까지 닿는 것처럼 작열하는 빛이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뜨고 있기조차 힘들다. 시오한의 모습이 빛에 삼켜져 보이지 않는다. 손아귀에 단단하게 잡힌 그의 손이, 온기만이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감각마저 사라진다. 손끝이 둔해지고, 귀가 먹먹해지며,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기이함이 그를 덮쳤다. 곧 녹아내릴 것처럼. 이도하가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시오한!

소리치는 제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이올라.

내 손을 잡아.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니?

설레고 들뜬 목소리. 퉁명스러운 대답. 그 모든 것을 다 뒤덮어 버리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싸늘함이 이도하를 후려쳤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것이 둔하게 멀어졌던 감각이 삽시간에 다시 돌아왔다.

온몸은 너무 차가워 아플 정도였고, 귀는 여전히 먹먹했다.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들이킨 코와 입으로 그 차가운 것들이 쏟아져 들어와 목을 틀어막았다. 물이었다. 그는 물에 잠겨 있었다. 바닷속처럼 어둡고 차가운 수조 속에.

“콜록, 콜록! 헉!”

수조 밖으로 빠져나온 이도하가 다급히 숨을 들이켜며 잔뜩 삼킨 물을 토해 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고, 몸은 덜덜 떨렸다. 뺨을 몇 번이고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머리를 흔들어 물을 털어 냈다.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본 이도하는 이곳이 ‘그’ 수조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너젠의 수조, 저가 마력을 풀어내곤 했다가, 얼마 전 몽땅 다 털어가 버린 그 수조였다. 주변을 싸늘하고 이질적으로 밝히던 푸른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지만 어쨌든 그 수조가 맞았다.

“시오한!”

이도하가 소리쳤다. 시오한- 시오한- 메아리가 사방이 튕겨 웅웅 울린다. 이도하가 벌떡 일어나다 비틀거렸다. 온몸을 흠뻑 적신 물이 줄줄 흐른다. 길고 화려한 옷이 거추장스럽게 발이며 팔에 잔뜩 휘감겼다.

천 년 전의 시간, 앙그라엘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다. 조금 전인데도 까마득하고 꿈처럼 느껴진다. 마치 저는 처음부터 이 수조에 잠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먼 현실감을 이 옷이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

“…시오한, 시오한!”

이를 악문 이도하가 소리쳤다. 소리가 텅텅 부딪쳐 울린다. 손 마디마디가 새하얘지도록 꽉 쥔 그는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기다렸다. 조용하고 나지막한 기계음이 길게 이어지고, 추위로 몸이 덜덜 떨렸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점점 절 먹어 치울 것 같을 때였다.

‘화이람.’

헉! 이도하가 겨우 숨을 토해 냈다. 다리에 힘이 탁 풀려 그는 버틸 것도 없이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이 힘이 쭉 빠져 이대로 누워 버리고 싶었다.

“…와.”

얼굴에 손을 묻은 이도하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몇 번이나 얼굴을 쓸어내리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야? 이리스티리움 맞아?”

‘왜 이제 왔냐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들이 한 트럭인 이리스티리움이지.’

한 트럭. 그 표현에 이도하는 실없이 웃었다. 안도감이 한차례 그를 휩쓸고 나니 탈력감과 피로감이 정말 한 트럭으로 그를 덮쳤다. 눈이 가물가물하고 정신은 아래로 가라앉으며, 몸이 바윗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마냥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 더더욱 몸이 무겁다. 거의 실시간으로 그를 덮쳤던 충격이 너덜너덜하게 온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천장의 등이 다 나가고 몇몇 기계는 아예 멈춰 버린 것 같은 조용하고 거대한 시설 안에 오도카니 앉은 그가 중얼거렸다.

“해밀턴 블랙이….”

해밀턴 블랙이라고. 천 년 전 가엘의 계약자가. 아폴리온이. 떠올리니 또 기가 차서, 이도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푹 젖은 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눈에 잠깐 빛이 번뜩이자, 그는 어느새 처음부터 젖은 적도 없었던 것처럼 보송보송하게 마른 옷을 입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요란하게 진동하며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무시하고 이도하는 인터넷을 열었다. 수조의 물을 유지하는 기계 장치들의 나지막한 소리가 울리고, 싸늘함이 감도는 어두운 곳에 홀로 앉은 이도하의 얼굴에 핸드폰 불빛이 비쳤다.

“십자군이였어, 시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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