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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04화 (203/250)

204화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상처를 손으로 애써 막으며, 엘하시온이 고개를 묻었다. 품에 안긴 조그만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가 흐느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탑에 들르지 말걸. 왕이 뭘 묻건 그에겐 대답해 줄 것도 없었고, 마탑에도 자료 따윈 없었다. 그건 그냥 시간 끌기였다.

에블린이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지금쯤 전서를 받았을 그의 아버지가, 제도에 도달할 때까지 일분일초라도 더 벌어 보려고. 별것 아닌 찰나의 시간이나마. 기사가 했던 말처럼, 그래도 왕이 구실도 명분도 없이 섣불리 공작가의 적통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곧장 올 것을. 그랬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널 지켜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올라.]

엘하시온이 중얼거렸다. 처음 그녀를 불렀을 때 그가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때 쾅! 다시 문이 열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대전에 들어선 왕의 손에 두 아이가 잡혀 있었다. 왕에게 손을 잡힌 채 겁에 질려 끌려오다시피 한 것은 에블린과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아이였다. 붉은 머리칼에 눈물이 뚝뚝 흐르는 새파란 눈동자. 한눈에 봐도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침의. 왕자다.

“그래, 드나르. 아비를 좀 도와다오.”

“아, 아바마마! 아바마마, 용서해 주세요!”

“에피오나, 너부터 하겠느냐?”

왕이 제 목을 끌어안은 조그만 여자아이를 떼어 놓았다. 아이가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발버둥 쳤으나, 왕이 아이를 대충 내던졌다.

“에피!”

왕자가 몸을 흔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왕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감히 두려워 제대로 쳐다보지조차 못했던 아버지의 발을 차고 손을 깨물며, 왕자가 울음을 터트렸다. 왕이 고개를 흔들며 왕자를 놔주었다. 허겁지겁 기어간 왕자가 미동 없이 쓰러진 제 동생을 꼭 껴안았다. 질끈, 눈을 감는다. 이제 곧 벌어질 일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왕자와 공주가 이리 우애가 좋은 줄 미처 몰랐군.”

감탄하며 왕이 검을 들었다. 푸욱, 또다시 검이 연약한 몸뚱어리를 꿰뚫는 소리가 난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는 마치 제 심장을 베어 내는 소리 같다.

이올라. 엘하시온이 다시 한번 읊조렸다. 우웅, 이름이 진동을 가지고 얇게 퍼졌다.

“자식을 끊어 내는 게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라 하던데… 이만하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뺨에 튄 피를 닦아 내며, 왕이 말했다.

“냄새가 고약하군요.”

낭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작고 연약한 발소리도 이어졌다. 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몸의 실루엣이 다 드러나는 얇은 침의만 입은 여인이 문가에 서 있었다. 푸른 머리칼을 곱게 늘어뜨린 얼굴이 몹시도 아름답다.

창백하게 질린 채 주위를 지키고 있던 몇몇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치켜들었던 검을 내렸다. 왕이 미소 지었다. 그가 제 귀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인이 자박자박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긴 드레스 자락이 피에 젖어 들었다.

“어쩌려고 이러세요? 궁인들은 모두 도망갔고, 점점 말이 퍼지고 있어요. 전하께서 내리신 검을 전하께 겨누는 이들이 올지도 모르죠.”

“죽지 않는 자를 어쩌겠느냐. 충성하지 않는 자는 애초에 필요 없지.”

여인의 고운 손이 왕의 어깨를 짚었다. 그녀가 따뜻하게 웃었다.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꾸짖지도 않을 것처럼 상냥한 미소였다.

“그자를 보셨으면서도, 죽지 않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여기시는군요.”

“나는 왕이다.”

별 볼 일 없는 마법사 따위가 불러낸 그 악마도 결국 제 손아귀 아래서 바르작거리지 않았는가. 왕이 그녀를 가볍게 밀었다. 그가 대전을 둘러보았다.

늘 시끄럽게 잔소리와 헛소리를 늘어놓던 대신들은 하나도 없고, 건국부터 이 나라의 모든 영광된 순간들이 장식된 창을 투과해 쏟아지는 햇빛도 없고, 머리가 지끈거리던 향도 없다. 다 죽은 것들과, 죽을 것들뿐이다. 눈에 보이는 광경이 썩 마음에 들어, 왕은 웃었다. 그가 팔을 벌렸다.

“자, 오거라. 뭐든, 와 보거라.”

그 순간, 소환진이 쫙 펼쳐졌다. 피 웅덩이 위로 화려하게 펼쳐진 소환진이 사위를 온통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눈을 크게 뜬 왕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그가 기대감에 젖어 웃음을 터트린다.

푸른 소환진으로부터 불티가 떨어지듯 조그만 푸른빛들이 점점 떠오른다.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유영하듯 천천히 떠오른 조그만 빛들이 한데 뭉쳐, 마침내 형상을 이루었다. 서서히 빛이 꺼졌다.

물에 젖은 짧은 갈색 머리칼, 동그란 은테 안경, 푸른 눈동자 가득 걱정을 담은 여인이 왕을 마주했다. 환희에 찬 왕이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이올라.”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왕의 얼굴이 굳었다.

“…엘?”

“이올라….”

“이게….”

여인, 이올라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에 있는 게 아무것도 믿기지 않는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주춤거리며 발을 옮기던 이올라는 질척이는 바닥에 발이 걸려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올라가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범벅이 된 피가 뭉근하게 흘러내린다.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피바다가 된 주위, 널브러진 시체들, 그리고 엘하시온. 그 품에서 빠져나온 조그만 손.

“에블린…?”

이올라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손끝은 차마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마녀로구나.”

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흠칫, 이올라가 몸을 떨었다. 엘하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더러워진 얼굴 위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돌려줘, 이올라.”

엘하시온이 말했다.

“할 수 있잖아. 돌려줘, 이올라. 한 시간만, 한 시간이면 돼. 그러면 돼. 해 줘, 이올라.”

“미래로부터 불러왔다는 그 마녀. 시간도 건드릴 수 있더냐?”

“살려 줘, 이올라.”

“엘, 그건….”

이올라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아주 좋구나. 시- 컥!”

“전하!”

“전하!!”

기사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놀란 이올라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왕이 서 있었다. 제 목을 꿰뚫은 조그만 칼을 붙잡고서. 그걸 빼내려는 것처럼 손을 휘저으나, 그의 몸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지푸라기처럼 풀썩 쓰러져 버리고 만다. 찰팍, 피가 튀었다. 푸른 머리의 여인이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침의 위에 점점이 튄 피가 꽃잎처럼 흩뿌려져 있다.

“…….”

정적이 흘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쓰러진 왕의 몸은 꿈틀거리지조차 않았다. 화려한 옷은 점점 피에 물들어 붉어졌다. 그렇게 되니 이 대전에 쓰러진 여느 시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본 엘하시온이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는 울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꽉 입술을 깨문다. 피가 나도록 짓이긴 입술 사이로 울부짖음 같은 것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에블린을 끌어안은 그가 연신 눈물을 떨어트렸다. 이올라는 차마 그를 돌아보지 못했다. 죽은 왕의 시신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허망해라.”

여인이 한숨처럼 말했다. 아연해진 기사들은 전의도 의욕도, 모든 걸 잃은 이들처럼 망연히 서서 그들이 섬긴 왕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허망하고 허무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것 같았다. 너무도 쉽고 가벼운 죽음이었다.

“죽음이 다 그렇지.”

누군가 말했다. 쇠를 긁어내는 것처럼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는 이올라의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든 여인이 놀란 얼굴을 한다.

“당신은….”

철컥, 쇳소리가 났다. 스르륵,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그 미약한 진동이 살갗 위 곤두선 솜털을 건드린다.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이올라가 번쩍 눈을 떴다. 박차다시피 일어서며, 그녀가 황급히 돌아섰다.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엘하시온의 뒤에. 불탄 냄새와 그을음이 묻은 갑옷을 입고서. 피 웅덩이 위에 그가 누워 있던 자리가 천천히 꾸무럭거리는 피로 다시 메꿔지고 있다. 갑옷 사이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그 위에 걸친 흰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붉다. 가슴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올라가 입을 벌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위로 기이한 푸른빛이 확 번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엘하시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안 돼-!!”

푸욱. 엘하시온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눈을 끔뻑였다. 입을 벌린다. 벙긋거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뭔가가 끓어오르는 소리만 났다. 입술 사이로 피가 길게 흘러, 이미 흥건한 피 위로 흔적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제 가슴을 뚫고 비죽 솟아 나온 검 끝을 본다. 벌써 힘을 잃은 팔에서 아이의 몸이 흘러내렸다. 추스르려 하나, 몸이 기운다.

“아폴… 리온.”

“엘!! 엘!! 안 돼, 엘!”

철커덕, 갑옷 소리와 함께 남자, 아폴리온이 물러섰다. 날듯이 다가온 이올라가 미끄러지다시피 주저앉으며 쓰러지는 엘하시온의 몸을 다급히 받쳐 올렸다. 아폴리온은 그저 우뚝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검이 피 웅덩이 위로 툭 떨어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엘하시온이 그런 아폴리온을 바라보았다. 아폴리온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엘,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괜찮아….”

이올라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조차도 그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엘하시온의 황금빛 눈동자가 움직였다. 피 웅덩이 위에 쓰러진, 이미 숨이 끊어진 것 같았던 가엘에게로. 부릅뜬 눈동자를 본다.

핏물이 들어 붉어진 눈동자는, 분명 엘하시온을 마주 보고 있었다. 엘하시온은 문득 그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눈에 물든 핏물을 조금이나마 씻어 내리며, 피눈물 같은 것이 그의 코를 타고 흘러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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