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고해라.”
기사가 말했다. 금세 열이 오르기 시작해 호흡이 가빠진 엘하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앙그라엘의 영광된 모든 순간들이 새겨진 웅장한 문, 양옆에서 늘어져 교차한 뿔 달린 사슴의 휘장, 눈앞으로 검을 세운 채 고개를 숙인 두 기사의 동상. 대전이다.
“…….”
시종이 기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눈만 깜빡였다.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종의 눈이 멍하게 풀려 있었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칼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다. 엘하시온은 코끝을 스치는 비린내를 맡았다.
그는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가엘이 소환을 했던 곳, 그가 수십 명의 죄수들을 소환했던 도리안의 그 지하 감옥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었다. 차갑고 축축한 손이 등뼈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불쾌한 냄새.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그는 손끝이 새하얗게 되도록 제가 업힌 기사의 갑옷을 꽉 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치고 싶다.
“젠장, 다들 미쳐 가는군.”
다른 기사 하나가 대충 시종을 밀쳤다. 시종은 다리에 힘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그대로 풀썩 쓰러져 버리더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엘하시온을 업은 기사가 한 걸음 물러서고, 또 다른 기사가 문에 손을 대더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전하! 엘하시온 포어 레펜스 들었습니다!”
힘껏 소리친 기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밀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대전 문이 열린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서려던 기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가 홱 몸을 틀더니 허리를 접었다.
웨엑- 기사가 구역질을 한다. 엘하시온을 업은 기사가 주춤 물러났다. 그 순간, 문 사이로 누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왔구나!”
짙은 붉은 머리칼, 선명한 붉은 눈동자. 왕이다. 도저히 그들이 알던 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다. 엘하시온을 업은 기사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엘하시온이 굴러떨어지듯 옆으로 내려섰다. 동시에, 어렴풋이 코끝을 맴돌던 쇠 비린내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그들을 덮쳤다. 핏물에 얼굴을 처박은 것 같은 짙은, 아주 짙은 피 냄새였다. 미끌미끌하고 축축한 비린내. 엘하시온이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왕이 덥석 그의 팔을 잡았다.
“기다렸다, 기다렸어.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뭐든 대답을 해야 했으나, 엘하시온은 그럴 틈도 없었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그대로 토사물을 쏟아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기다려 주지 않는 왕이 엘하시온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전- 윽!”
허벅지에 긴 자상을 입은 엘하시온은 다리에 힘을 주는 것조차 버거웠으나 그런 걸 살필 생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반쯤 기어가듯 대전 안으로 질질 끌려간 엘하시온이 결국 왕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털썩 엎어졌다.
철퍽- 질퍽한 것이 손가락 사이로 엉겨든다. 엘하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쿵, 등 뒤로 대전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린다.
“자, 한번 둘러보거라. 썩 괜찮지 않느냐?”
끈적하게 엉겨든 것은, 피였다. 드넓은 대전을 가득 메우고 손바닥이 조금 잠길 정도로 흥건하게 고인 피. 크게 확장된 그의 눈동자에 들어오는 것은 제 손바닥에서 떨어져 다시 뚝, 뚝 고이는 피. 온통 그것뿐이다.
머리가 새하얗게 번지고, 눈앞이 이지러졌다.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고, 엘하시온은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이건 그냥 끔찍한 악몽이고, 눈을 감았다 뜨면 그냥 제 침대이거나 책상 위거나 하길 바랐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왕이 앞뒤 없이 막 나가며 정도를 모른다지만, 이곳은 궁의 대전이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까무룩, 정신이 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의 턱을 받쳐 올렸다.
“큭!”
“꽤 오랜만에 보았는데 뭘 하는 게냐? 어서 보래도?”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엘하시온은 숨을 멈추었다. 허벅지에 불이 붙은 것 같은 통증도, 속이 진탕 뒤집히는 짙은 피비린내도, 소리도 모두 사라진 것처럼 모든 감각이 순간 멈추었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닫히는 소리가 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심장 소리였다. 쿵, 다시 울린다. 제 심장 소리다. 엘하시온이 다시 눈을 깜빡였다.
“…에블린?”
그리고 잠시 강제로 떼어졌던 것 같았던 감각들이 다시 그를 덮쳤다. 화끈한 고통, 울음소리, 피비린내, 싸늘한 냉기와 불쾌한 후덥지근함이 뒤섞인 끈적한 공기, 휘황찬란하고 장엄한 대전의 천장 아래 바닥을 가득 메운 피, 그리고 시체들. 그 위에서 멍하니 정신을 놓은 조그마한 아이.
“에블린!”
“감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구나. 쉿. 조용히 해야지, 중요한 순간인데.”
콱-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엘하시온의 턱을 쥐고 흔든 왕이 그를 놓고 몸을 일으켰다. 허겁지겁 동생에게 다가가려는 엘하시온을 왕이 걷어찼다.
“컥!”
바닥으로 엎어진 그의 온몸에 채 식지 않은 피가 들러붙어 불쾌하게 그를 잡아당긴다. 엘하시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왕이 에블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쩌어억- 쩌어억- 걸음마다 달라붙은 피가 질척한 발소리를 남긴다.
“가엘은 틀린 답이었지.”
왕이 말했다. 엘하시온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제 동생 곁으로 다가서는 왕을 바라보았다. 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왕이 고개를 까딱였다. 덜덜 떨며, 엘하시온이 그의 고개가 향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엘하시온이 꽉 주먹을 쥐었다.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가엘.”
가엘이다.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라고만 여겼을 뿐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못했던 그 속에 가엘이 엎드려 있었다. 피 웅덩이 속에, 묻혀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보았던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더 수척해진 모습으로. 미동도 없다. 감지 않은 눈에 핏물이 들어 온통 붉다.
“이제 말해 보아라, 마법사야. 아폴리온이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면 자네야말로 진정한 계약의 주인일 테니.”
왕이 팔을 벌렸다. 아폴리온. 엘하시온은 곧 그게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가엘이 부른 이, 그다. 수많은 죄인들의 피를 바쳐 저 도리안 평원의 지하 감옥에서 불러낸 이. 목을 베고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는 이. 가엘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삶에 대한 갈망으로 불러낸 이. 왕에게, 영생에 대한 허황된 갈망을 불러일으켰을 이.
“고귀한 이의 피도 있고, 소환진도 있으며, 나도 있다.”
엘하시온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왕은 할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애초에 그는 가엘과도, 엘하시온과도 달랐다. 그에게는 마력이 없다. 누구의 피를 쏟아 내든, 몇 명의 피를 쏟아 내든 다 소용없었다.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에게는 기적을 부를 힘이 없다.
‘온실 속 화초라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공자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약합니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가엘의 말이 전부 맞았다. 감지 못한 바랜 청동빛 눈을 보며 엘하시온은 고개를 숙였다. 찐득하게 굳어 가는 피 웅덩이 위로 황금색 머리칼이 쏟아졌다. 조아린 엘하시온이 흐느꼈다.
“…제발.”
엘하시온이 애원했다. 늘 비상하다는 말을 듣곤 했던 머리도 지금에 와서는 다 소용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 나갈 번뜩이는 기재 따위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엘은 죽었고, 이올라는 오지 않는다. 이미 이올라를 부른 제가 또 다른 누군가를 부를 수 없다는 것 따위는 한 번 확인한 뒤였다.
“제발, 전하-.”
왕은 대답이 없다. 숨 막히는 정적이 대전을 가득 채웠다.
“그래…. 내게는 알려 주기 싫다? 나 같은 것에게는 감히 알려 줄 수 없느냐? 포어 레펜스답구나. 자네의 아버지, 리오넬과 아주 닮았어. 그자도 늘 그런 식이지.”
찌그덕, 왕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같이 다 쓸모없는 것들뿐이군. 그러니 나라가 이 모양인게다.”
엘하시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안 돼- 엘하시온은 제가 그렇게 소리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았다.
푹, 검날이 살갗을 찢고 들어가, 연약한 근육과 뼈를 우드득 가르고 부숴 마침내 반대편으로 뚫고 나오는 소리만 귀에 선연하다. 뚝, 이미 흥건한 피바다 위로 또다시 한 방울 피를 흘려 내는 검 끝이 그의 눈에 찌르듯 박혔다.
아이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검이 꿰뚫는 순간 이미 절명했다. 왕이 쑥, 검을 뽑아냈다. 피가 튀었다. 작은 몸이 스르륵, 피 웅덩이 위로 흘러내린다.
“……아.”
엘하시온이 신음했다. 목구멍이 꽉 막혀 신음조차 간신히 끓었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에 흐릿해진 시야에도, 인형처럼 힘없이 스러진 작은 몸은 여전하다. 발갛게 혈색이 돌던 사랑스러운 뺨은 피 웅덩이에 묻혀 있고, 부릅뜬 황금색 눈동자에는 이미 빛이 없다.
에블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
“아니야….”
엘하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굳어 가는 피 위로 또다시 피가 흐른다. 아이의 몸에 있던 온기를 전부 가지고서 흘러나온다. 왕이 저벅저벅 걸어갔다. 흥건한 피가 그의 발에 달라붙었다가 진득하게 떨어지며 발자국을 만들어 냈다.
왕이 어디로 가든 엘하시온은 관심 없었다. 그가 바닥을 기었다. 죽은 어느 기사의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힘을 잃어서 엎어지며 몇 번이고 뒹군 끝에 그는 마침내 다다랐다.
“에, 에블린. …에블린.”
엘하시온이 조심스럽게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황금빛 머리칼에 엉켜 굳은 피가 뭉친 채로 뚝뚝 떨어졌다. 고장 난 인형처럼 자꾸만 기이한 각도로 흘러내리는 몸을 어떻게든 제대로 추스르려 애쓰던 엘하시온은 아이의 가슴을 막아 보았다.
“에블린, 안 돼-. 에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