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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02화 (201/250)

202화

툭, 엘하시온이 펜을 떨어트렸다. 손끝이 책장에 꽂은 그의 일기장에서 느리게, 떨어진다. 그가 가늘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공자!”

마침내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으, 안녕하세요.”

고통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엘하시온이 사뭇 태연한 양 인사했다.

“아까 그 기사님이요, 갑자기 막 죽이려고 하잖아요. 아파 죽겠는데, 치료부터 하고 가면 안 돼요? 피 나는 것 좀 봐요.”

“…….”

기사들은 잠깐 말문을 잃은 것처럼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일단 가시죠. 궁의에게 보이면 될 겁니다.”

누군가 말했다. 그들의 동료가 왜 갑자기 항명을 하고 그런 짓을 했는지, 어떻게 해서 1군단의 기사인 그를 엘하시온이 죽일 수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묻는 데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공작가는 성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있었으니, 이 정도면 엘하시온이 애초 언급했던 대로 ‘잠깐 들른’ 정도가 아니었다. 왕이 그들을 게으르다며 ‘나무랄’ 시간을 지난 것이다.

기사 하나가 엘하시온을 덥석 안아 업었고, 엘하시온이 나지막이 신음했다. 이미 반항할 힘 같은 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기사에게 업힌 채, 엘하시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철컥철컥, 쇳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멀어지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시오한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툭, 엘하시온이 떨어트린 펜이 그의 발끝에 걸려 굴러갔다. 책장 앞에서 시오한이 손을 뻗었다. 엘하시온의 눈높이에는 조금 높을, 시오한의 눈높이에 꽂힌 일기장이 그의 손에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가 일기장을 펼쳤다.

벌써 아주 예전이 된 언젠가에 보았던 글들이, 낡지도 바래지도 않은 모습으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런데 사이사이에 낯선 것들이 눈에 띈다.

[가엘에게 그녀에 대해 말한 건 실수였다. 그녀를 미래로부터 불러왔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얼핏 보아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 글들. 이도하가 보았던 천 년 후의 일기장에 가엘의 이름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도하는 문득,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일기장이 더 두껍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오한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부드럽게 넘어가던 책장이 탁, 한곳에서 멈추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가장 마지막 일기가 쓰인 장이었다. 천 년 후의 시간에는 탈락되어 없었던 페이지.

[첫 번째 소환, 피를 이용한 부름. 그날 있었던 흔들림. 사파이어가 답이었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틀린 게 아니라,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엘이 길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길을 열어?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맹약에 관한 처음이자 마지막 언급도 지나치게 간략하고 함축적이다 했더니, 이제 보니 엘하시온은 일부러 일기를 모두 그런 식으로 적은 것 같다. 일상에 대한 언급도 종종 있어 그렇지, 일기보다는 저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 놓은 연구 일지에 더 가까웠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이도하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탁- 일기를 덮어 다시 책장에 꽂아 넣는 시오한의 시선이 희미해지고, 기사에게 업혀 마탑 밖으로 나오는 엘하시온이 보인다.

느슨하게 땋아 하나로 묶었던 머리칼은 어깨 부근에서 잘려 흐트러져 있었고, 나오는 도중에 누군가 묶어 줬는지 허벅지에 벨트가 강하게 묶여 있었다. 땀과 피가 묻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이 타자마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이도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꽤 엄청난 일이 순식간에 지나간 게 다 꿈처럼 느껴져, 이도하는 잠시 그렇게 망연히 서 있었다.

“화이람?”

“!”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소리 없이 소스라치게 놀란 이도하가 홱 돌아보았다. 시오한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원래부터 쭉 거기 서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발소리는 물론 기척도 느끼지 못한 이도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문득 무언가 알아차렸다.

“시오한, 당신 눈이….”

그의 오른쪽 눈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물든 게 아니라, 그냥 까만색이었다. 동양인치고도 유난히 홍채가 까만 편이 저와 아주 똑같았다. 이도하, 제 눈이다.

“응, 보여.”

시오한이 손을 뻗었다. 그가 가만히 이도하의 눈가를 쓸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이도하는 문득 그의 시야로 보이는 절 보았다. 시오한의 손길에 반쯤 감은 제 오른쪽 눈동자는 분명 그와 같은 황금빛이었다. 제가 바라보는 시오한의 눈으로 다시 절 보는 건 몹시 기이한 느낌이었다.

제가 눈을 깜빡인다. 시야가 어른거렸다. 황금빛이 서서히 꺼지듯 까만 먹색으로 물드는 것과, 제가 보는 온전한 제 시야의 시오한이 완전히 또렷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시오한의 눈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황금빛으로 돌아와 있다.

“그대가 날 이리 보는구나.”

시오한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말했고, 이도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만 뻐끔거렸다. 원래 좀 무심했고 근래에 들어 뻔뻔해지기까지 한 이도하는 여간해서는 잘 부끄러워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갑자기 좀 부끄러워졌다.

사소하고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뭔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괜히 입술을 한번 축인 이도하는 엘하시온의 일기에서 뜯어 온 종이나 쳐다보기로 했다. 흘긋, 시오한의 시선이 내려갔다.

[첫 번째 소환, 피를 이용한 부름. 그날 있었던 흔들림. 사파이어가 답이었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틀린 게 아니라,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엘이 길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허.”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 눈으로 다시 봐도 약간 기막힌 기분이 들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중얼거리며, 이도하가 제 머리를 붙잡았다. 엘하시온은 분명 시오한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시오한을 본 순간 그는 무언가 깨달았고, 그게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그 일기, 혹은 일지의 가장 마지막 장으로 도달하게 한 것이다. 가엘이 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서, 확신으로. 그 간극 사이에 시오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뭘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사고 점프에 이도하가 미간을 구기는데, 시오한이 말했다.

“별생각 없었는데….”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내 눈 말이야, 화이람.”

한 발 다가선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잡아, 제 눈가로 이끌었다. 반사적으로 펼친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그가 말했다.

“마력이 드러난 거였어.”

“뭐?”

쪽, 이도하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그가 이번에는 그의 손을 잡아, 제 눈 위로 드리웠다. 이미 깜깜한 밤이지만, 조금 더 어둡게.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 고개를 조금 숙이자, 코가 스칠 만큼 아주 가까워졌다. 태양을 보는 것 같은 홍채의 기이한 무늬 틈, 그 사이사이에 일렁이는 빛이 보일 정도로.

“그가 날 보고 깨달은 게 있듯, 나도 그를 보고 깨달은 거지.”

이도하도 이 빛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 같을 뿐이라고.

“그대의 눈과 닮은 것 같지 않아?”

제 눈은 홍채라고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까만색인데 뭐가 닮았냐, 하려던 이도하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섬광. 일반적으로 푸른빛이라고 하지만, 사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 부를 뿐인 기이한 빛과 분명 닮은 면이 있다.

“이올라- 또 다른 인소더블이라고 했던 그 여인의 계약주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조상님인 건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야.”

‘황금의 가호를 받는 가문’. 이도하도 깨달았다.

“당신처럼, 엘하시온도 당신 눈에서 마력을 읽었구나.”

그가 헛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허황되고 흔한 주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도하는 시오한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금발이라고 하기에는 남다른 부분이 있던 그 황금빛. 선황보다도 오히려 엘하시온을 더 닮은 시오한. 눈동자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것이 마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이어진 그 혈통의 정점에서 마침내 태어난 것이 시오한인 것이다.

“…와.”

처음 엘하시온을 봤을 때. 아니,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시오한의 조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이제 이도하는 그들의 시조가 정말 신이거나, 반신이거나, 하여간 인간이 아닌 대단한 무언가라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미래를 봤을지도 모르고.”

시요한이 기묘하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미래’를 기원해 천 년 후의 여인을 부른 계약주잖아?”

논리 정연한 사고가 아니라, 그냥 벼락처럼 내리친 번뜩임.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엘하시온은 시오한을 보는 순간 그냥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좀 띵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이도하가 이마를 문질렀다.

“맹약은 그렇다 치고… 아니, 그렇다 치고가 아니지. 그럼 가엘이 길을 열었다는 건….”

‘가엘이 길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이도하가 다시금 찢어진 페이지를 읽었다. 그런데 시오한의 손이 종이 위를 덮어 가린다. 접듯이 말아 이도하의 손에 쥐여 준 그가 말했다.

“늦을지도 몰라, 화이람.”

“…….”

가만히 절 바라보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깜깜한 하늘 아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하고 고요한 궁이 어둠에 잠긴 채 우뚝 서 있다. 하늘에 구름이 많을 뿐이고, 밤이라 조용할 뿐이고. 그럴 텐데도 유난히 음산하고 스산하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닐 터였다.

“그렇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이도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궁의 보안을 뚫고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하니, 무모하니, 하는 얘기는 이제 필요 없었다.

이게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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