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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01화 (200/250)

201화

“유감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벽에 처박힌 충격에 콜록, 기침을 하며 엘하시온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의 손에 어느새 조그만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조그맣다고는 해도 검날이 꽤 두꺼운, 명백한 근접 전투용 단검이다. 기사의 검이 휘둘러지는 찰나, 그 사이에 단검을 끼워 넣어 막아 낸 것이다. 엘하시온이 뻐근하게 통증이 올라오는 팔을 턴다.

“없습니다. 제가 공자에게 달리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다만 공자는 왕에게 가서는 안 됩니다.”

기사가 말했다. 벽을 따라 뒤로 물러나던 엘하시온이 멈칫했다.

“…항명이구나.”

엘하시온이 말했다. 지금 이 기사가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은 왕의 뜻이 아니었다. 그를 공작가 밖으로 끌어내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이건 기사가 독단적으로 그를 막아서려 하는 것이다.

“왕이 소환을 하려 합니다.”

엘하시온의 눈이 커졌다.

“그 마법사가 부른 존재를 보셨습니까?”

기사가 말했다.

“죽지 않습니다. 왕이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고, 몇 번이고 죽여도 다시 원래 모습대로 살아나 나타나더군요.”

내내 무미건조하던 기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억눌렀지만, 엘하시온은 그의 덤덤한 얼굴이 그 목소리처럼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분노와 혐오, 두려움. 그 사이로 그런 것들이 드러난다.

“왕이 그자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그자처럼 죽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그랬다면 그 마법사가 다 죽어 가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왕이 그자 같은 이를 또 불러낸다면, 그래서 행여나 정말 영생을 얻게 된다면-.”

점점 빨라지고 격앙되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꾹 물고, 잠시 숨을 몰아쉰다. 그가 다시 검을 꽉 쥐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럼 날 그냥 보내 주는 방법도 있어요.”

엘하시온이 말했다. 기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흐린 전등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뿌연 빛을 받아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공자. 소원과 기원, 그런 것들은 그런 것들로 그쳐야 합니다.”

엘하시온은 알았다. 그가 여기서 이 기사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기사는 그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그게 그의 신념이고, 정의다.

깨닫자마자 엘하시온이 즉시 몸을 날렸다. 거리를 두면 빠져나갈 몇 번의 기회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만, 그는 무려 왕을 호위하는 1군단의 기사였다. 제대로 붙으면 엘하시온으로서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기사가 더 빨랐다. 엘하시온이 몸을 날림과 동시에 즉각 반응한 기사가 튕겨 나왔다. 꼬리처럼 길게 흔들린 머리칼을 순식간에 잡아채고 바닥으로 당겨 꽂았다.

“악!”

기사가 검을 치켜들었다. 카각- 그가 잠시 멈칫했다. 낮은 천장에 검 끝이 걸린 것이다. 틈을 타 딸려 간 엘하시온이 몸을 비틀었다. 콰직!! 검이 엘하시온의 옷자락을 자르며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피가 튀었다. 엘하시온이 단검을 휘둘렀다. 기사가 밟고 있던 머리채가 잘려 나갔다. 태양 주변으로 빛이 번지듯 황금색 실타래 같은 머리칼들이 순간 화려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빠져나갈 수 없었다.

쾅! 건틀릿을 낀 기사의 주먹이 엘하시온을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빗겨 냈음에도 엘하시온의 머리는 크게 바닥에 부딪혀 튕겨 오르다시피 했다. 시야가 핑 도는 와중에 엘하시온이 팔을 휘둘렀다. 턱- 어렵지 않게 그의 손목을 잡아챈 기사가 손에 힘을 주었다.

쨍그랑, 엘하시온이 단검을 떨어트렸다. 기사가 엘하시온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엘하시온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그를 보았다. 흐릿한 시선에 기사가 잠깐 머뭇거렸다.

[…이올라.]

엘하시온이 신음처럼 말했다. 의식적인 소환이라기보다는, 궁지에 몰린 아이가 저도 모르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같았다. 묘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복도에 잔영처럼 퍼졌다. 그들 아래에 푸른 소환진이 꽃봉오리가 피듯 쫙 펼쳐졌다. 순식간에 물에 잠긴 것처럼 푸른빛이 온 복도를 물들였다.

크게 몸을 움찔한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엘하시온은 그의 눈에 두려움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엘하시온이 이를 악물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던 것 같던 그가 기사의 눈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크악!”

기사가 눈을 부여잡았다. 엘하시온이 재빨리 몸을 굴려 그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푸른 소환진이 바닷물처럼 일렁거린다. 철커덩-! 등 뒤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엘하시온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낮추며 쭉 미끄러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단검을 낚아채자마자 그가 몸을 돌렸다.

캉-!! 묵직하게 떨어진 검이 그를 강타했다.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내린 것처럼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간신히 막아 낸 듯했으나, 비틀어져 내려간 검이 그대로 엘하시온의 허벅지를 길게 그었다.

“아아악!”

이도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의 감각이 아니라, 그의 귀에도 분명 들렸다. 비명 소리가.

“뭐야?”

“들어가, 들어가!”

입구를 지키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마차에 기대고, 문가에 기대 서 있던 그들이 놀라 서로를 보더니 다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검 끝에 누운 엘하시온의 모습과 겹쳐져 보인다.

[이올라, 이올라-.]

애원하듯, 울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기사들의 발소리와 겹쳐 들린다. 저 기사들은 엘하시온을 왕에게 데려가야 하고, 엘하시온에게 지금 검을 겨눈 또 다른 기사- 오웬 라그레이는 그가 왕을 만나는 일이 없도록 여기서 죽이려고 한다. 심장이 두근두근 달음박질친다. 이 소리는 이도하, 제 심장 소리였다.

이올라, 우르슬라는 오지 않는다. 푸른 소환진은 여전히 일렁거리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녀는 오지 않고, 엘하시온을 겨눈 검은 움직인다. 저 기사들이 아무리 빠르게 뛰어 들어가도 이미 엘하시온을 구할 수는 없다. 늦었다.

하지만 엘하시온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될 텐데. 이도하는 어느새 손끝이 새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우뚝 서 있는 마탑의 풍경 위로 검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겹쳐진다. 이도하가 질끈 눈을 내리감았다.

캉-!

쇳소리가 그의 귀를 강타했다. 주먹만 쥐고 있을 뿐인 제 손아귀에 단단한 충격이 전해진다. 이도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래에서 위로, 기사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단검 하나가 장검을 받쳐 막고 있었다. 묵직하게 떨어져 내린 검을 고작 단검 하나로 받쳐 낸 손은 검이라고는 쥐어 본 적 없는 것처럼 길고 고왔다.

“시오한?”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는 순간, 시선이 움직였다. 겁에 질린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친다. 저를- 시오한을 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캉-! 단검이 검을 튕겨 냈다. 휙-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어둠 속에서 궤적을 그렸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귀를 찌른다. 기사가 분분히 물러섰다.

“당신은-.”

다시 한번 검이 움직였다. 기사의 목 줄기를 향해 쇄도한다. 그러나 순간, 시오한이 몸을 물렸다. 거의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찰나의 변화였다. 대신에, 그가 기사를 걷어찼다. 쾅-!!

비명이나 신음 소리도 없었다. 사람의 발에 차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속도로 날아간 기사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시야가 까맣게 죽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이 눈을 감았음을 알았다. 그가 팔을 휘둘렀다. 쐐액- 뭔가가 쏘아져 나가는 소리 끝에 컥,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끝이었다.

다시 시오한이 눈을 떴을 때, 그 앞에는 엘하시온이 있었다.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움켜쥐고, 땀으로 범벅이 되고 행색은 잔뜩 헝클어진 엘하시온이. 흐트러져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당혹으로 얼룩진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본다. 그와 같을, 시오한의 황금빛 눈을.

“…….”

시오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시오한을 올려다보던 엘하시온의 눈이 어느 순간 커졌다. 시오한은 그대로 가만히 엘하시온을 바라보다, 돌아섰다.

“잠깐-.”

엘하시온이 움찔 몸을 일으키려다 크게 신음했다. 발소리조차 없이 멀어진 시오한은 어느새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흐린 빛만 번진 거뭇거뭇한 복도를 바라보고 있다. 엘하시온이 헐떡이는 소리만 들린다. 좀 더 그대로 있다가, 어느 순간 엘하시온이 몸을 일으켜 절뚝이며 걷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시오한의 시선이 움직여, 벽을 짚고 어디론가 가는 엘하시온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엘하시온은 듣지 못한 듯했으나, 시오한의 귀에는 다른 기사들이 마탑 안을 뒤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엘하시온이 도달한 곳은, 마탑의 여기저기에 여러 개나 퍼져 있는 서고 중 하나였다.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붙잡은 엘하시온이 주르륵 주저앉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까 그가 방을 나서기 전 챙겼던 것일 터였다.

높이 솟은 책장 뒤에 몸을 숨긴 시오한의 비스듬한 시선이 그를 지켜본다. 엘하시온이 제 성한 다리 위에 그걸 펼쳤다. 그 순간, 엘하시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쪽이다-.”

철커덕, 철커덕-. 여러 명의 발소리와 무거운 갑옷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하시온이 숨을 헐떡였다. 입술을 깨문 그가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움츠린 등이 유난히 작고 가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차르르륵-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탁, 마지막 장이 넘어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엘하시온이 무언가를 성급하게 휘갈겼다.

마침내 엘하시온이 그걸 들고 몸을 일으켰다. 보이는 곳에 아무렇게나 대충 꽂아 넣으려다가, 멈칫하더니 조금 더 위로, 그것을 꽂아 넣는다. 그리고 이도하는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책장에 꽂힌 다른 책들에 비해 특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것. 제목이나 라벨 따위는 없고, 흐린 빛만 밝혀진 칙칙한 어둠 속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짙은 색의 조그만 수첩 같은 것은, 이도하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낡고, 해지고, 바랜 모습으로.

금단현상이라도 일으킨 사람이 쓴 것처럼 획이 달달 떨고 있고, 졸다가 쓴 것처럼 아래로 축축 처지기까지 했던 글. 마지막 획마다 한껏 늘어져 있어 어지간히 대충 휘갈겼다고 생각했던 글. 고작 몇 줄에 불과했던 끄적임.

[등을 맞댄 거울. 절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세계. 같은 곳, 같은 시간. 목숨에 목숨으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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