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저택에 하나둘씩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하얀 사슴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가 정문을 통과해 저택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다. 차르륵, 엘하시온의 방에 반쯤 드리워져 있던 커튼이 확 걷혔다. 엘하시온이 서 있었다. 그는 저택에서 허둥지둥 뛰어나간 사람들이 마차를 맞이하는 걸 보더니,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에블린! 고든, 에블린은 어디 있어?”
“도련님!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각하도 안 계신 마당에-.”
“고든! 에블린!”
“아, 아가씨는 아까 잠자리에 드셨죠!”
“당장 에블린을 데리고 영지로 가. 지금 당장, 깨워서.”
“도련님!”
“아니, 아니다. 영지로 가기 전에 우선 알마데어로 가. 안가 알지?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에블린을 데리고 거기 가서 꼼짝도 하지 마. 도착하기 전까진 절대 멈추지 말고, 도착해서는 꼼짝도 하지 마.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야.”
엘하시온이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구둣발 소리, 슬리퍼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바쁘게 엮여 든다. 저택 입구에서 벌어진 잠깐의 실랑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왕이 보낸 기사들을 막을 수 있는 공작은 지금 저택에 없었다. 그는 이틀 전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국경으로 갔다. 지금 돌아오는 중이라고 해도 꼬박 하루는 걸릴 거리였다. 철컥철컥, 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엘하시온이 방으로 돌아왔다. 잠깐 사라지더니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시 나타나 책상에서 서랍이란 서랍은 모조리 다 꺼내더니 또 사라진다. 첨벙, 첨벙, 무언가 물웅덩이 위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도하는 그가 제 연구 자료들을 모조리 다 물에 처넣고 있는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와중에도 무거운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철컥철컥- 이도하는 부딪히는 쇳소리에서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다시 방에 나타난 엘하시온이 이번에는 잉크병을 들었다. 순간 멈칫한다. 잉크병을 든 손이 내려갔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바스락, 하며 그가 뭔가를 챙겨 품속에 넣는다.
쾅! 문이 열렸다. 달칵, 조그만 유리병이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엘하시온이 책상을 가리고 섰다. 그의 어깨 너머로 왕의 기사가 창틀에 가려져 턱 끝만 간신히 보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 공자님!”
“포어 레펜스 공자님을 뵙습니다. 호위대의 오웬 리그레이입니다.”
“오밤중에 굉장한 기세네요. 저 잡혀가나요?”
엘하시온이 태연하게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왕께서 잠깐 보고자 하십니다.”
“와. 이 밤중에요? 전하께서 불면증이 있으셨나요?”
“친구가 필요하시죠.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바늘 끝도 안 들어갈 것 같았다. 와중에 포어 레펜스의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으나, 차마 검을 겨누진 못하고 있었다. 왕의 전령은 왕을 대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검을 빼 드는 것은 왕을 향해 빼 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수장인 공작이 없는 상태에서, 특히나 요즘 같은 때에 섣불리 감행할 수는 없는 짓이었다.
“잡혀가는 기분인데.”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입궁하라 하셨을 뿐입니다.”
“도련님.”
“나 살아 돌아와요?”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서도 좀 곤란하실 겁니다.”
기사가 말했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보았다. 왕의 전령이라고 해도 설마하니 이렇게 대놓고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이도하는 조금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저 말이 진짜냐, 하는 것처럼 쳐다보니 시오한이 애매하게 눈가를 찡그렸다.
대충 상황에 따라 좀 다르다는 말쯤 될 것 같다. 어쨌든 아주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왕이라지만 무려 공작가의 장자를 명분도 없이 무턱대고 끌고 가서 해칠 수는 없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테니. 그러나 미친 왕이 그렇게 내일을 생각하며 행동할 것 같진 않았고, 기사를 포함해 저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럼 마탑에 잠깐만 들러요. 전하께서 뭘 하문하실지도 모르는데 거기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어서.”
몇 번의 실랑이를 더 한 끝에 엘하시온이 옆으로 비켜섰다. 도둑이라도 맞은 것처럼 서랍은 죄다 빠져나와 있고 엎어진 잉크병에서 흐른 잉크가 온 책상을 다 덮고 밑으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사가 잠깐 그 책상을 바라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하시죠.”
그 뒤로도 그를 호위해야 한다는 공작가의 기사들과, 왕이 보낸 전령들, 그리고 왕의 기사들은 좀 더 지지부진한 실랑이를 이어 갔다. 그런데 공작가의 사람들 중 누구도 진심으로 그들이 정말로 공자와 함께 입궁하거나, 왕의 기사들을 막아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도하는 그들이 그저 최대한 시간을 끌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뿔 달린 하얀 사슴의 문장이 그려진 거대한 마차가 엘하시온을 싣고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 기사를 등에 태운 몇 마리의 군마가 다른 문으로 다급하게 땅을 박차고 빠져나갔으니. 그중에는 조그만 체구의 아이를 함께 태운 말도 있었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허리를 잡았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공작가에 다급하게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고함 소리가 울린다. 둘의 신형이 나무 그림자 속으로 쑥 떨어져 내렸다.
엘하시온의 의견 따위는 가뿐히 무시해 버릴 것 같았던 분위기와는 달리 황가의 마차는 정말로 마탑에 들렀다. 엘하시온은 왕의 기사와 시답잖은 얘기나 나누며 마탑 안으로 들어섰다. 잠깐 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오웬이라는 기사가 그와 함께 마탑으로 들었고 나머지 기사들이 입구를 지켰다.
“…다시 나오겠지?”
이도하가 위를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들은 건물 사이의 작은 틈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캄캄한 밤하늘에는 꽉 낀 구름이 흐르고 있고,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왕실의 마차는 유령 마차인 양 소리 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 늦은 밤중에 포어 레펜스의 공자를 태운 마차가 마탑 앞에 잠시 서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화이람, 잠시 기다리겠어?”
시오한이 말했다.
“뭐?”
“금방 올게.”
“당신 혼자 들어간다고?”
“완전히 혼자는 아니겠지?”
묘하게 웃으며, 시오한이 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아. 이도하는 그 손짓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나 필요하게 되면 망설이지 마, 화이람.”
가볍게 이도하의 턱선을 쓸어내리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시오한이 골목 안쪽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소리도 없었다. 그래도 같이 가야 하지 않나 이도하가 잠깐 고민하는 찰나에 그는 이미 훌쩍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특기를 못 쓰는 이도하, 자잘한 잔재주밖에 못 쓰는 이도하는 주먹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본 적 없는 대학생에 불과하지만 그는 동전 하나로도 마트를 박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알면서도 걱정… 알면서도 걱정.”
중얼거리며, 이도하가 칭얼대는 아기 소리가 들려오는 집의 창틀 밑에 좀 더 몸을 구기고 앉았다. 후, 차분히 숨을 내쉬며 그가 눈을 감았다. 그는 이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제 존재가 그에게로 스며드는 것 같은 감각을 알고 있었다. 이도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색 속눈썹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궁에 무슨 일이 있어요? 엄청 갑작스럽네.”
“없습니다. 공자님께서 입궁 명령을 받은 게 처음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시간에는 처음이죠.”
그들은 좁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타박타박, 가벼운 엘하시온의 발소리와 철컹거리는 무거운 갑옷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섞인다. 기사는 종아리와 어깨, 가슴 정도에만 부분적으로 경장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걸음마다 소리가 차갑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었지.”
모서리를 꺾어 돌며, 엘하시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두어 발자국 뒤에서 엘하시온을 따라 걷던 기사가 모서리에서 움찔 멈추었다. 모서리를 돌면 응당 또 다른 복도가 멀쩡히 이어져야 할 텐데, 뜬금없이 복도가 아래로 뚝 떨어진다. 발을 헛디딜 뻔한 기사를 올려다보며 저쪽 아래에 엘하시온이 서 있었다.
“…오웬 라그레이입니다.”
기사는 곧장 따라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대답했다.
“혹시 마렌더 자작님이랑 알아요?”
“제 아버지 되십니다.”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닮았더라.”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하시온이 작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슬쩍 몸을 돌렸다.
“저한테 개인적인 유감이 있고 그런 건 아니죠?”
엘하시온이 자연스럽게 몇 발자국 더 걸었다. 마탑의 복도에는 창문이 없었다. 등이 징검다리처럼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리 밝지 않은 빛은 그림자를 더 짙게 드리웠다. 등 뒤, 빛이 닿지 않는 곳을 채운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엘하시온은 보았다.
“아닙니다.”
기사가 말했다.
“유감이 아닙니다.”
엘하시온이 몸을 날렸다. 콰직! 그가 서 있던 바닥에 검이 틀어박혔다.
“!”
이도하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차가운 공기가 그를 깨웠다.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망치를 휘두른 것처럼 검집째 휘둘러진 검이 바닥을 부수고 파편을 튕겼다. 다음 순간, 조용하고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마치 뱀이 날카롭게 쏘아져 나가는 것과 같았다. 검이 미처 중심을 잡지도 못한 엘하시온의 목을 향해 정확한 궤적을 그었다.
그러나 비록 진지하게 검을 배운 적은 없다고 해도, 엘하시온은 포어 레펜스였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기사들을 무수히 배출하고, 지금 앙그라엘의 제1기사 역시 배출한 무장의 가문.
캉!! 섬뜩한 쇳소리가 울렸다. 휘둘러진 검에 후려 맞다시피 한 엘하시온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쾅! 벽이 크게 흔들리며 요란하게 울렸다.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한 궤도로 휘둘러진 검에 맞은 그는 저렇게 날아가는 게 아니라, 두 동강이 났어야 했다. 둔탁한 타격감이 아니라, 살과 뼈가 베이는 진득한 느낌이 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