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진득한 밤이었다.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고는 촛대의 빈약한 촛불 몇 개가 전부였다. 촛농이 꾸물거리며 흘러내려 아래에 치덕치덕 굳어 있다. 왕은 녹은 촛농이 흘러내릴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비친 촛불이 뱀의 눈동자처럼 날카롭게 섰다.
마침내 촛농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눈을 깜빡였다. 왕이 굽힌 허리를 일으키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목을 주무르던 그가 한쪽으로 걸어갔다. 제대로 여미지 않은 침의가 한쪽으로 흘러내려 바닥에 질질 끌렸다. 붉은 카펫에서 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탁자에 올려놓은 잔을 들었다. 안에 찬 액체가 무겁게 출렁였다.
“아폴리온.”
잔을 들고서, 왕이 몸을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형체가 가는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주변에 선 기사들이 조금 물러섰다. 왕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화려한 침의에 휩싸인 왕과는 달리 그는 차림새가 남루했다. 그는 늘 그랬다. 어른거리는 촛불에 드러난 하얀 옷자락에는 먼지와 그을음, 피가 묻어 있었으며 얼굴도 다르지 않았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수염은 수북했다. 몸에서 그을음 냄새와 화약 냄새, 그리고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궁금한 게 있소. 그대가 온 곳은 어떤 곳이지?”
“…….”
“지옥 말이야.”
아폴리온은 대답이 없었다. 기사 하나가 그의 다리를 지그시 밟았다. 상처 입은 짐승이 내는 것 같은 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카펫을 파고들었다. 붉은 카펫에 스며들어 있던 핏물이 창백하게 바랜 그의 손끝을 적셨다. 문득 그가 잘게 몸을 떨었다. 웃는 것 같았다. 지옥,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 지옥이지. 죽음과 살인이 난무하오.”
갈라진 목소리가 대답했다. 철판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버석하게 메마른 목소리였다. 콜록콜록, 잔기침을 내뱉은 그가 이어 말했다.
“늘 모든 게 불타고 있으며…. 절망과 원망, 증오만 가득하다오.”
“그리고?”
왕이 탁자에 걸터앉으며 잔을 기울였다. 젊은 왕은 무료해 보였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단가?”
“…무엇이 더 필요하오?”
“지옥도 결국 사람이 가는 곳이라 다 똑같은가. 별게 없군.”
“사람이 가는 곳이라….”
아폴리온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사람이… 인간이 그렇지…. 원망하고, 불신하고, 두려워하고, 증오하고….”
그가 눈을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다. 기사들이 물러선 만큼 다시 가까이 다가왔으나, 왕이 고개를 흔들었다. 턱을 괸 왕은 빙글빙글 잔을 흔들었다.
“어둡나?”
왕이 물었다. 아폴리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왕을 살피며, 그는 아주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푸른 눈동자가 왕이 흔드는 잔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왕을 바라보았다. 14살에 왕좌에 올라, 지금까지 그 위에 앉아 있는 이 어린 남자를.
“…어둡소.”
“난 어두운 건 딱 질색이야.”
왕이 말했다. 밤이라곤 하지만, 빛 한 점 들지 못하게 커튼을 꽁꽁 닫고 고작 촛불 몇 개 밝혀 놓은 사람답지 않은 말이었다.
“추레하게 늙는 것도 딱 질색이지. 말년에 그 노친네가 얼마나 꼴사납던지, 보기가 아주 괴로웠어.”
다시 잔을 기울이며 왕이 말했다. 어린아이가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촛불에 제 손을 비춰 보았다. 이리저리 돌려 보는 손은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끄러웠으며, 흉터도 상처도 없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살갗처럼 피부도 몹시 고왔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아폴리온의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저며지고 있었다. 베이고,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얇게 베인 수많은 상처들이 드러난 살갗마다 가득한 것이 어른어른 흐려지는 눈에 들어왔다. 길게 베인 상처에서 스며 나온 피가 뚝, 뚝, 카펫 위로 떨어진다. 한 상처에서 스며 나온 피가 다른 상처에 고였다가, 다시 흘러내린다. 붉은 촛불 빛이 그 위를 어스름히 비춘다.
“가엘에게 벌을 내린 지 얼마나 되었지?”
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기사가 답했다.
“칠 일 되었습니다, 전하.”
툭,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시야로 잔이 데구루루 굴러들어 왔다. 안에 몇 방울 남은 피가 고여 있다.
“질렸다.”
왕이 말했다. 아폴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푸욱- 살을 쑤시는 소리가 났다. 허벅지를 관통한 검이 카펫을 뚫고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아폴리온이 입을 벌렸다. 그는 제가 비명을 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감전된 사람처럼, 꼬챙이에 꿰인 벌레처럼 바르작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에야 커헉- 하고 파르르 떨리는 숨을 내뱉는다. 혀를 깨물었는지 입가로 피가 흘렀다. 눈동자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입을 벌렸다. 가쁜 숨소리가 점점 웃음소리로 변했다. 왕이 발끝으로 잔을 굴리며 그를 구경했다.
“하하, 하하하!”
아폴리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질퍽한 카펫 위를 걸어 아폴리온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붉은 눈동자가 발작적으로 웃는 아폴리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대, 정말 악마가 맞긴 한가?”
왕이 물었다.
“하하! 이제 와 그게 궁금한가?”
심장이 꿰뚫리고, 머리를 잘라 내도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그뿐.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날개를 뜯어내는 조그만 벌레처럼, 고작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이리 바르작거리는 게 과연 뭘까.
“어떨 것 같소?”
아폴리온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마치 자기도 그게 참 궁금하다는 것처럼. 표정 없이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던 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왕의 시선이 바닥을 구르는 텅 빈 잔을 향했다가, 다시 아폴리온에게로 움직였다. 왕이 입을 열었다.
“가엘을 데리고 와라.”
“!”
“예, 전하.”
발소리 하나가 멀어지더니, 문이 열리고 닫힌다. 왕의 발끝이 바닥에 나뒹구는 잔을 툭, 걷어찼다.
“내가 멍청하고 미련한 짓을 하고 있었구나. 그런 잡것 따위가 고작 죄인들을 바쳐 부른 게 제대로 된 것일 리가 없지.”
왕이 나긋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들떠 있다.
“내가 부르면 될 게 아니냐?”
“가엘은 아무것도 모르오.”
“그래, 퍽 쓸모라곤 없지. 그래도 하나는 해내지 않았느냐.”
절 올려다보는 아폴리온을 내려다보며, 왕이 사뭇 자비롭게 웃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왕이 걸음을 옮겼다. 늘어진 옷자락이 숨을 삼킨 채 바닥을 기는 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폴리온이 와락, 옷자락을 붙잡았다.
“미래의 존재를 불렀소, 그 공자가.”
왕이 걸음을 멈추었다.
“가엘은, 가엘은 틀렸소. 잘못했소. 그 공자야말로 ‘진짜’요. 올바르고 정당한… 계약의 주인.”
그림자 진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거만하고 오만한 시선 아래에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아폴리온이 말했다.
“그 공자라면, 알 거요. 알 수 있을 거요. 그대가 바라는 영생.”
새파란 눈이 왕을 마주 보았다. 이윽고 왕의 입술이 매끄럽게 미끄러져 올라갔다. 왕이 손을 흔들었다.
“여봐라.”
“예, 전하.”
문가에 없는 것처럼 시립해 있던 궁인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가서 엘하시온 포어 레펜스를 궁에 들도록 해라.”
왕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죽여.’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부엉이의 눈동자처럼 동그랗고 선명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개가 겹쳐졌다가 흩어진다. 흔들려서 멀미가 날 것 같다. 죽여, 목소리가 또다시 속삭였다.
점점 겹쳐져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고, 하나로 하얗게 번지는 빛 속에서 누군가가 웃었다. 황금빛 눈동자, 황금색 머리칼- 그것들이 모두 하나로 기괴하게 겹치고 뭉그러지며 늘어진다.
‘안 돼-!!’
절규하는 목소리 끝에 칼날 끝이 번뜩인다. 핏방울이 꽃잎처럼 점점이 떨어지고, 그 바닥에는 시체들이 즐비하다. 창백한 손, 다리, 흐트러진 머리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죽은 얼굴.
‘잊어버려, 도하야.’
목소리.
‘나쁜 기억은 다 잊어도 돼.’
울음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아프다. 누군가 그 안에 든 것을 모조리 비틀어 쥐어 뽑아 버리려는 것처럼 아팠다.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아니야.
“화이람!”
이도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익숙한 황금색 눈동자가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도하가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밤이다. 하늘이 까맣고,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많아 흐린 하늘을 뒤로하고 시오한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시오한.”
꿈이었구나. 시오한이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다.
“무슨 꿈을 꿨어?”
“…뱀 꿈.”
이도하가 말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이도하는 순간 손을 헛짚었다. 바닥을 짚으려고 했더니 웬걸, 바닥은 없고 둥그런 것에 손이 쑥 미끄러졌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붙잡았다. 이도하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뭇잎 두어 개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제야 떠올랐다.
그들은 아주 높은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나무는 무슨 오백 년 된 수호수처럼 크고 굵어 두 사람이 누워도 거뜬한 크기였다. 여기 올라앉아 대충 저녁도 먹고 손가락 씨름도 하고 하여간 재미를 좀 보았는데, 이제 보니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은 지붕 말고 저기 올라가자 주장했던 이도하는 잠시 반성했다.
“뱀, 진짜 뱀. 뱀이 엄청 나왔다고.”
절 바라보는 시오한에게 이도하가 둘러댔다.
“그러고 보니 뱀 꿈은 태몽이랬는데.”
이도하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시오한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그 얼굴을 붙잡고 쪽 뽀뽀를 한 이도하가 눈을 비볐다.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엄청 깊은 잠을 잔 것 같은데, 그에 비해 눈은 피곤했다.
“궁에서 전령이 왔어.”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가 멈칫했다. 시오한의 손이 지그시 가슴을 눌렀다. 그제야 이도하는 제가 아직도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그에게 잠시 머물다가, 한쪽으로 향했다. 이도하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