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갑자기 왜?”
“원래 한가하고 할 짓 없으면 버킷 리스트 같은 거 쓰게 되잖아. 나중에… 다 끝나고. 진짜 한가해지면 그때 뭐 할지나 좀 궁리해 보자고.”
“꽤 달콤하게 들리네.”
시오한이 말했다. 방금 그게? 이도하는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했나 다시 생각해 보았다.
“꼭 그대가 나와 함께 살려는 것처럼 들려서.”
“…그럴까?”
시오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난 뭐, 어차피 학교 졸업하는 것도 망했고, 거기 있어 봐야 여기저기서 들들 볶아 댈 텐데.”
아무것도 아닌 양, 이도하가 심드렁히 말했다.
“이런 식이면 마력 매개도 다 물 건너간 셈인데, 그것도 안 한다고 하면 백골이 흩어져서 넋도 있고 없고 할 때까지 욕이란 욕은 다 먹을걸. 굳이 눌러앉아서 그 꼴 보고 있느니 그냥 너희들끼리 잘 사세요, 배신자 하고 당신이랑 놀지.”
그리고 그가 씩 웃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영 앤 리치, 핸섬, 거기다 뭐냐. 권력, 파워까지 있네.”
이도하가 능청을 떠는 걸 멍하니 보고 있던 시오한이 별안간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린 듯 모양 좋은 긴 새끼손가락이었다.
“물리기 없기.”
풉, 이도하가 웃음을 뱉었다. 별이 흐드러진 저 하늘에서 방금 떨어진 기적 같은 얼굴로 진지하게 저런 말을 하니 굉장한 위화감이 들었다.
“없기, 없기. 물리기 없기.”
이도하가 서슴없이 그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그런데 그렇게 손가락을 엮고 나니, 문득 시오한의 얼굴 위로 훨씬 어린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이였음에도 조금도 아이답지 않았으나, 외형만은 선이 좀 더 동글동글했던 그의 얼굴이.
그러자 이도하는 문득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도하는 추운 것처럼 부르르 어깨를 떨며 냅다 시오한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고 드러누웠다. 밤에 남의 집 지붕에 앉아 이러고 있는 것도 웃기다, 하며 그는 괜히 말랑해지는 마음을 털어냈다.
차가운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그 가운데에 시오한도 보인다. 그가 별처럼 웃고 있었다. 괜히 센치해지는 것 같아 털어내려고 했더니 아주 노곤해진다. 밤새도록 이러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오한도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말했다.
“별수 없네, 내가 이리 나약하니.”
“므를 느윽흐.”
시오한의 손가락이 찰흙을 갖고 노는 양 입술을 조몰락거리니 이도하가 옹알이를 했다. 손을 떼면 될 텐데 시오한은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딱 떼고 고개를 저은 그가 잔잔히 웃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없으면 아주 큰일 나, 화이람. 목도리도 하나 혼자 못 하니 이리 추운 겨울에 딱 얼어 죽고 말걸.”
이도하는 입술이 아무렇게나 찌그러진 채로 헛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수발들어 주는 궁인이 트럭째로 있는데 저런 소릴 뻔뻔하게 한다. 소환도 제대로 통제 못 해 침대 위에 풀썩 떨어진 서투른 계약자에게 무례하다며 검을 겨누는 참된 기사도 있고, 기사도 궁인도 없다고 해도 그가 얼어 죽을 일은 없다. 부모 죽인 원수만 아니라면 추운 얼굴을 하고 있기만 해도 너도나도 속옷까지 벗어 덮어 줄 게 분명하다.
저는 더위에 약해서 얼음 없이는 더위에 헉헉거리다 죽을 것이며, 벌레를 보고 무서워서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모르고, 그대가 너무 보고 싶어 식음을 전폐하다 굶어 죽을지도 모르고, 하여간 조금 놀라기만 해도 죽는다는 어느 물고기에 버금가는 생명체로 절 묘사하며 시오한은 좀 더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후사도 하나 없는데 내가 죽으면 이리스티리움도 망할 것이고, 이리스티리움만 한 대제국이 망하면 대륙이 혼란스러워질 테니 아주 큰일이 나겠지. 그럼 세상이 망할 수도 있어.”
“…….”
이도하는 시오한의 이 뻔뻔한 너스레를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좀 더 남다르다. 잠자코 듣기만 하라는 듯 입술을 조물거리고 있으니 그렇게 하고 있던 이도하는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마침내 시오한이 빙그레 웃으며 마무리했다.
“그러니 마음 약하고 상냥한 그대가 어찌 도리가 있겠어. 날 구해 주고 세상도 구해 주는 수밖에. 다행히 난 그대가 곁에 있기만 하면 그럭저럭 제 기능을 하니,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방법이기도 하고. 내 맹약자는 똑똑하기도 해라.”
콩깍지와 주접으로 마무리를 하니 화룡점정이라. 이도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침 어떻게 생각하냐는 듯 시오한이 입술을 놓아주었다.
“어… 응. 뭐, 그런가 봐.”
이리 떨떠름한 말밖에는 나오질 않는데, 뭐 그렇다고 하자. 이도하가 약간 괴로워하며 대답했고, 시오한이 역시 그렇지? 하는 얼굴로 뻔뻔하게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날 살리는 거야. 고마워, 화이람.”
“…혹시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너무 늦게 말한 건가?”
입맞춤을 받으며 이도하가 물었다. 마력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어 무한 동력처럼 순환시킬 수 있다고 했을 때, 분명 이 생각이 시오한의 머리에도 떠올랐을 거란 깨달음이 든 탓이었다. 이 방식대로라면, 꼭 지금의 천 년 전이 아니더라도 제가 그의 곁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는 돌아가지 말고 저와 있자고 먼저 말할 시오한이 아니니 이도하는 혹시 제가 엄청나게 눈치 없이 군 건가 싶었다. 아니, 근데 이건 고백도 아니고 대체 뭔가. 이도하가 기분이 참 이상해지는 차에 시오한이 딴소리를 했다.
“난 잘 모르겠어, 화이람.”
“응?”
뜬금없는 말에 이도하가 반문했다.
“난 그런 거 잘 몰라, 그대도 알잖아? 그러니 그대가 하고 싶은 걸 해. 그게 뭐든 그대와 함께할 테니.”
“아.”
그래, 저와 하고 싶은 게 없냐는 질문을 했었다. 어쩌다 여기로 흘러들어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냐. 이도하는 몹시 혼란스러운데, 시오한은 평온하기만 했다. 말재간에 있어서라면 애초에 황제인 시오한을 따라갈 방법이 없다. 이상하게도 약간 몰린 기분을 느끼고 있던 이도하는 어쨌든 화제가 돌아간 것을 넙죽 받아먹기로 했다.
“당신은 날 소환한 거고, 그 김에 내가 인소더블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소더블 소환한 보람을 한 번은 느껴야지. 값어치는 하자. 소원 한번 말해 봐. 뭐든 들어주지.”
이도하가 과장되게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내 소원은 이미 그대가 다 이루어 주어서, 더 바랄 게 없는걸.”
“무슨 소원?”
시오한이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때 푸드덕, 작은 날갯짓 소리가 났다. 시오한이 흥미롭게 눈을 들었다. 그의 머리 위에 조그만 새가 앉아 의기양양하게 삑 울었다. 이도하는 기가 막혀서 얼른 새를 제 손바닥 위로 올렸다. 그가 툴툴거렸다.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앉아, 쪼그만 게. 왜 다 당신한테 가서 붙는 거야?”
“동물을 가까이 해 본 적은 없는데… 인기가 있는 편 같지?”
“당신 동물 좋아해?”
“그런 것 같네.”
새는 시오한이 내민 손가락 위로 냉큼 올라앉았다. 뺙뺙, 하고 한껏 깃털을 부풀리며 운다. 뭔가 말하려던 이도하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바라보았다. 다른 손끝으로 새의 조그만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는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가 전해 주는 정보는 단순하고 단편적이다. 사건의 맥락 없이 본 것만 그대로 짧게 전달하는 것에 불과해, 전후 사정을 알기는 무리가 있었다.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면 기억을 읽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데, 그건 그저 새의 말을 알아듣는 것보다 좀 더 복잡하다. 그러나 이미 낮에 가엘의 기억을 읽은 것만도 꽤 무리에 가까운 일이었고, 지금 그들에게는 제약이 많았다.
푸른빛에서 나타난 남자는 칼에 찔렸다가 다시 일어났고, 왕은 그의 피를 마셨으며, 가엘은 끌려갔다. 새가 전한 건 그게 다였다.
“…진짜 미쳐 돌아가는 모양이네.”
웬 컴퓨터 게임에서 새가 물고 온 이상한 수수께끼를 듣는 것 같은 와중에 그건 알겠다. 가엘이 소환한 계약자가 정말 죽지 않는 특기를 가지고 있는 건지, 그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정말 뭔가 효과가 있는지, 가엘이 어떻게 되는 건지, 온갖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듯 추측은 꼬리를 물 뿐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지켜보는 일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여동생을 잠자리에 보내는 엘하시온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이도하가 손끝으로 톡, 새를 살짝 두드렸다. 새가 푸드덕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우르슬라- 이올라 말이야, 시오한.”
까만 어둠 속으로 금세 묻혀 사라지는 새를 바라보고 있던 이도하가 말했다.
“알고 있었다고 했거든. 누군가가 엘하시온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그래서 초조해했고,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했다. 도움을 구하고 싶어 했다고.
“근데 지금 전혀 모르는 것 같지 않아?”
이도하가 말했다.
“샌드위치 하나 돌려놓자고 마력을 쓰질 않나… 보통 그런 불안을 느낀다면 곁에서 싸고돌아야 하는데, 전혀 아니잖아.”
엘하시온은 그녀를 두고 밥도 안 먹고 자지도 않은 사람 같다고 했다. 이도하는 김윤혜가 그러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이드로의 연구원들이 한번 흥미를 가진 것에 열 일을 제쳐 두고 빠져드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드로의 직원 식당이 기가 막힌 맛집인 건 그나마 그래야 연구원들이 비척비척 기어 나와 밥이라도 주워 먹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오히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아.”
이올라, 우르슬라는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예컨대, 어디에?”
“…그러게.”
이도하가 말했다. 그녀가 엘하시온의 안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라는 풍요로워도 시대는 위태했다. 왕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이올라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 불똥이 공작가에 튈 수 있음을 알아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달리 신경을 쏟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우르슬라. 이도하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잔영조차 남기지 않고 스러지는 입김처럼 그 이름은 금세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