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이올라가 벌떡 일어섰다.
“에블린! 앗!”
“으악, 에블린!”
엘하시온과 이올라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반가움에 손에 쟁반을 들고 있다는 걸 깜빡한 아이가 단숨에 두 손을 뻗으며 땅을 박찼고, 쟁반은 아이의 머리 위로 붕 떠올랐으며, 즉각 제 실수를 깨달은 아이의 발이 대차게 꼬인 것이다.
작은 샌드위치 두 개가 허공을 날았다. 두 사람이 미처 허벅지에 힘을 주기도 전에 아이는 이미 땅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 와중에 쟁반을 어떻게든 다시 잡아 보겠다고 허우적거린 탓에 턱부터 콱 박았다. 쾅! 하는 아주 아픈 소리가 났다. 아이의 풍성한 황금빛 머리칼 위로 샌드위치 두 개가 녹은 눈덩이처럼 툭, 툭 떨어졌다.
헉. 이올라와 엘하시온이 순간 얼음처럼 굳었다. 으으으, 황금빛 눈가에 눈물이 순식간에 차오르더니, 으아아아앙! 하고 아이가 폭포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에블린!”
두 사람이 날듯이 아이에게 달려갔다. 이올라가 얼른 아이를 일으켜 세워 턱을 살폈다. 바닥에 카펫이 푹신했던 덕에 다행히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멍이 아주 심하게 들 것 같았다. 이올라가 얼른 무릎을 살피고 머리에 붙은 샌드위치도 떼 주는 사이 아이가 엉엉 울며 이올라에게 착 달라붙었다.
“오라버니는 바보야!”
“응?”
“오라버니는 바보야! 바보 멍청이!”
난데없는 날벼락에 엘하시온이 입을 쩍 벌렸다.
“언니가 왔는데 왜 나한테 안 알려 줬어? 샌드위치는 두 개밖에 없단 말이야! 그런데 이제 그것도 없잖아!”
엉엉, 아주 서럽게 울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아이는 조목조목 할 말을 다 했다. 엘하시온과 이올라가 잠깐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 엘하시온의 동생 에블린은 지금 넘어져 턱도 심하게 박았고, 무릎도 아플 것이며, 사랑스러운 황금빛 머리칼에 잼과 빵가루도 묻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샌드위치를 못 먹게 된 게 문제란 건가?
입을 꾹 오므린 엘하시온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동생의 눈높이에 맞춰 쪼그리고 앉았다.
“저, 이비. 오라버니가 샌드위치는 새로 만들어 줄게.”
“안 돼! 이건 내가 만든 거란 말이야! 오라버니랑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얘네는 이미 못 먹게 됐고, 오라버니가 만들어 주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그럼 새로 만들게 도와주면 안 돼?”
“그치만 이건 내가 만든 첫 샌드위치란 말이야.”
에블린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말을 할수록 서러워져서 도무지 울음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았다.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아니 저녁도 다 먹은 마당에 웬 샌드위치를… 엘하시온은 그런 눈치 없는 말은 참아 낸 대신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바닥에 처량하게 떨어진 샌드위치를 보며 눈물을 그렁거리는데,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풉!”
으아아앙-!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아 낸 울음이 다시 터졌다. 그러나 이미 이올라도 웃고 있었다. 저는 이렇게 슬픈데 다들 웃고 있으니 그게 아주 서러운 모양이다. 에블린은 이제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잠옷 위의 당근이 마구 춤춘다. 웃음기를 참지 못하며 이올라가 얼른 말했다.
“에블린! 언니가 다시 돌려줄게, 응? 다시 이 친구들을 돌려줄게. 그러면 어때?”
“바닥에 떨어진 건 먹으면 안 돼!”
에블린이 퍽 논리적으로 말했다. 이올라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응, 바닥에 떨어지기 전으로, 원래 에블린이 처음 만들었던 것처럼 다시 곱고 예쁘게 해 줄게. 자, 언니 봐 봐.”
이올라의 눈에 새파란 섬광이 피어올랐다. 원래도 파란색인 그녀의 눈동자에서 확연하게 눈에 띌 정도로 기이한 빛이었다. 에블린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도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변의 공기가 기묘하게 진동했다. 아야야, 엘하시온이 가슴을 부여잡고 엄살처럼 신음했다. 에블린이 시선을 빼앗긴 사이, 이올라의 손에는 어느새 작은 쟁반과 처음 에블린이 들고 있던 그대로 말끔한 샌드위치가 올려져 있었다.
“이것 봐라, 이비.”
엘하시온이 뿌듯하게 말했다. 이올라의 눈 주변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에블린이 고개를 돌렸다가, 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가 보기에도 떨어트리기 전과 아주 똑같은, 처음 만들었던 그대로의 샌드위치였다.
“자,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샌드위치야, 에블린. 언니 선물.”
에블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올라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끝, 머리칼 끝에 어느새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에 또 봐, 에블린.”
이올라가 그녀의 볼에 쪽, 입을 맞추었다. 에블린이 그녀를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낙엽에 붙은 불처럼 푸른빛은 순식간에 그녀를 잠식하더니 파- 하고 흩어졌다. 에블린의 팔 안에는 불씨 같은 조그만 빛 덩어리들만 이리저리 흔들리다 슥 사라졌다. 에블린이 멍하니 제 두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휘둘러 봐도 아무것도 없다.
“언니 안녕, 해야지. 그런데 이비, 샌드위치는-.”
으아아앙!! 에블린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화들짝 놀란 엘하시온이 흠칫했다.
“에블린? 왜 그래?”
“언니가 죽었어!!”
“뭐?”
황당한 얼굴을 한 엘하시온은 곧 에블린이 단 한 번도 이올라가 돌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비, 언니는 원래 세- 집에 간 거야, 집.”
“누가 집에 저렇게 가? 언니는 사라졌잖아!”
에블린이 목 놓아 울며 말했다. 엘하시온은 진땀이 다 났다. 맙소사. 그는 허둥지둥 제 동생을 달래었으나,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본 아이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으아아앙- 세상 서러운 울음소리가 창문을 넘어 밤공기를 타고 번졌다.
“…천재 아니었나?”
그칠 줄을 모르는 울음소리와 쩔쩔매는 엘하시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허점이 좀 큰 것 같네.”
“좀이 아닌 것 같은데….”
이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마녀를 불러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정원사로부터라고 하더니, 웬걸. 아버지인 공작부터 시작해서 5살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 동생한테도 다 들켰다. 이 정도면 그가 이올라를 소환한 걸 모르는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르겠다. 머리가 비상한 건 둘째 치고 곱게 자란 공자답게 순진하고 어리숙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슬슬 실마리를 찾아 가는 것 같지?”
몸을 뒤로 좀 더 기대며 이도하가 말했다. 그 바람에 목 아래까지 걸쳐 놓은 담요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시오한이 담요를 가슴께까지 추켜올려 주며, 어깨에 덮은 것 역시 좀 더 여며 주었다.
공작가의 지붕 위에 걸터앉은 그들의 머리 위로 새까만 하늘에 별이 흐드러지게 뿌려져 있었다. 모래가 반짝이며 흐르는 것처럼 하늘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가볍게 숨을 내뱉자, 뽀얀 입김이 구름처럼 하늘로 번져 올라갔다.
“이대로 기다리면 곧 당신 조상님이 맹약을 만들어 내겠어.”
“아쉽네.”
시오한이 말했다. 유영하는 별을 바라보던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무릎에 턱을 괸 시오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좀 그렇네.”
이도하가 대답했다. 엘하시온은 점점 맹약의 개념에 다가서고 있었다. 아직 그들이 아는 맹약에 비해서는 빠진 부분이 많지만, 곧 엘하시온은 그 빠진 부분들을 모두 채워 나갈 것이다. 혼자서든, 어떻게든 가엘과 함께든. 머지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그들도 이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르슬라를 욕할 수만도 없겠다.”
별을 올려다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사위는 나지막한 밤 소리로 가득하고, 마침내 가장 좋아하는 언니가 죽은 게 아니라는 걸 믿은 에블린과 겨우 한시름을 놓은 엘하시온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속삭임처럼 작게 들려온다. 그들은 별 아래에 담요 두 개를 나란히 덮고 앉아 있었다. 그들을 쫓아올 사람도, 찾을 사람도, 그들이 해야 할 일도, 아무것도 없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곧 맹약이 뭔지도, 어떻게 하다가 우르슬라와 그녀의 계약자인 엘하시온이 그 모양 그 꼴이 되었는지 다 알게 될 텐데도 불구하고, 머물고 싶었다. 이 순간, 이 시간에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어쩌면, 이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특기도 쓸 수 있겠다, 마력 걱정도 없겠다, 내 계약주가 이렇게 능력잔데.”
“아무렴, 나는 준비된 계약주거든.”
시오한이 웃으며 말했고, 이도하도 숨김없이 마주 웃었다. 그가 문득 물었다.
“당신, 나랑 하고 싶었던 거, 그런 거 없었어?”
“그대와?”
“난 이미 어지간히 다 했잖아. 그때 왜, 학교에서 술 마시고 꽐라 돼서.”
시오한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놀랍네.”
“뭐가?”
“취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맨정신으로는 안 했을 짓들이었잖아.”
고삐가 아주 단단히 풀렸었으니. 이도하가 조금 머쓱하게 대답했다. 못 할 짓들은 아니었으나, 이성을 놔야 할 짓들이긴 했다. 그 바람에 다음 날 그 난리가 난 게 아닌가 말이다. 돌이키자면 짜증만 날 일들이라, 이도하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래서 당신은 하고 싶었던 거 있었냐고.”
“글쎄… 지금 이리 그대를 보고 있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도 이미 한 것 같은걸. 아야.”
이도하가 무릎으로 시오한을 쿡 찔렀고, 그가 엄살을 부렸다. 딱히 춥지도 않으면서 괜히 어깨를 부르르 떤 이도하가 거칠게 귀를 문질렀다. 귓가가 빨갛게 된 것도 추위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시오한이 즐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