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마력, 그거면 되는 거라고. 어깨를 흔들며 웃은 가엘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가치 있다고?”
아폴리온이 작게 되뇌었다. 가엘은 제 말을 곱씹는 것 같은 아폴리온을 바라보았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몰랐던 거지요?”
“…….”
“더 많은 이들이 소망하고, 더 많은 이들이 불려 오고, 그런 게 당연해지는 그런 날도 오는가 봅니다.”
하하, 가엘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연신 흘러내려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남의 것인 양, 그는 웃고 있었다.
“왜 나는, 왜 나는 안 되는 겁니까? 나는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가엘.”
“왜 공자는-.”
목이 꽉 메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하하. 고개를 숙이자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아폴리온의 눈길이 떨어졌다. 그는 차갑고 거친 바닥에 점점이 얼룩진 자국을 응시했다. 그 순간, 창살을 쥔 그의 손끝이 푸른빛으로 화했다. 작은 조각조각으로 떨어져 나가듯 그의 몸은 점점 푸른빛에 잠식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 빛이 발치에 번진 걸 보면서도 가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두운 감옥 안이 깊은 물 밑에 잠긴 것처럼 잠시 푸르게 물들었다가, 곧 더 컴컴하게 가라앉았다.
***
탁탁- 펜 끝이 일정하게 바닥을 두드려 댔다. 멋들어지게 뻗은 깃털 끝이 다 헝클어지고 깃대가 구부러지고 있었으나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한쪽 무릎 위에 턱을 얹고 거의 구겨지다시피 한 엘하시온은 바닥에 늘어놓은 후 한 번도 치운 적 없는 종이 무더기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피…, 피….”
잔뜩 미간을 구긴 엘하시온이 중얼거렸다.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 애매모호하게 머릿속에 아른거리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피… 마력… 마력….”
툭- 엘하시온이 문득 손끝을 멈추었다. 그가 펜 끝을 위로 향했다. 날카로운 펜촉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가 그 위로 제 손끝을 가져갔다. 세운 펜촉 위로 손끝을 꾹 누르자, 움푹 들어간 살갗이 잠깐 저항하는 듯하더니 이내 따끔한 통증이 화끈하게 그를 덮쳤다.
“악!”
생각보다 섬뜩한 통증에 엘하시온이 순간 등을 바짝 세우며 부르르 떨었다. 손끝에 동그랗게 살짝만 맺히게 할 생각이었는데, 펜대를 타고 피가 아주 주르륵 흘렀다. 헝클어진 깃털 사이사이로 다 스며드는 것도 모자라 그 끝에 맺히기까지 한다. 종이 위로 피가 몇 방울이나 후드득 떨어졌다. 으아아, 하며 어쩔 줄 모르고 저 멀리 손을 떨어뜨렸던 엘하시온이 그 모습을 보았다.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잠깐 잊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하시온은 여러 번의 실험을 거쳐 마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머금고 전도하는 게 사파이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사파이어 원석을 잔뜩 사다가 죄다 가루를 내어 그 가루로 소환진을 그렸었다.
소환에 성공한 후 그 가루들이 죄다 사라진 게 단순한 소환의 여파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조화가 있어서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는 그게 꽤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가엘은 비록 제가 했던 짓이 제물과 같이 대가를 바친 것에 불과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엘하시온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원한 것과 달리 병을 고치는 것도, 영생을 손에 넣는 것도 실패했다. 그래도 어쨌든 가엘은 어떤 능력을 가진 누군가를 소환하는 데 성공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그 어떤 광물 따위보다도 사실 사람의 피가 가장 효과적인 마력의 매개체이긴 하다는 뜻 아닌가? 하물며, 혹시 그게 기원을 담는 이의 피라면….
“…….”
엘하시온이 피가 줄줄 나는 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붉게 얼룩진 종이와 제 손가락을 여러 번 번갈아 보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올라]?”
바닥에 삐뚤빼뚤하게 연결된 종이들과, 점점 더 검붉게 스며들어 가는 피까지 모조리 가리며 눈부신 소환진이 확 펼쳐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뭘 한 거야?”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엘하시온이 번쩍 눈을 떴다. 짧은 단발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여인이 황망하게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깐 눈만 깜빡인 엘하시온이 핫, 제 손을 바라보았다.
“오.”
엘하시온이 짧게 감탄했다.
“오?”
“앗.”
“엘, 이게 다 뭐야? 너 또!”
“아니, 이올라. 이건 정말 나도 모르게, 이거 그냥 찔린 거야! 아깝잖아!”
“아까우면 지혈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이올라는 두리번거리며 손수건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엘하시온은 그냥 몹시 아프고 불쌍한 얼굴로 손가락이나 내밀기로 했다. 곧 티 테이블 위에서 적당한 걸 찾은 이올라가 그의 손가락을 감싸고 아주 꽉 쥐었다. 엘하시온이 억, 하며 어깨를 흠칫했다가 얼른 말했다.
“잘못했어.”
“…….”
“진짜 나도 모르게 한 건데… 이올라, 얼굴이 왜 이래?”
“얼굴이 뭘?”
“일주일은 못 자고 굶주린 사람 같아.”
“정확하네.”
이올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엘하시온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냥 표현일 뿐이었는데!
“왜? 먹을 걸 좀 가져오라고 할까?”
“됐어, 이 정도 안 먹어도 안 죽어.”
“그렇지만 힘들잖아.”
엘하시온이 제 손을 살펴보는 이올라의 앞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순수한 걱정으로 찬 황금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올라가 별안간 그의 이마를 딱 때렸다.
“아!”
“그걸 아는 애가 이런 짓을 하니?”
“실수라니까….”
엘하시온이 이마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물론 이올라는 눈곱만큼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길이 흘끔 바닥으로 향했다. 흐트러진 종이 위로 피가 스며들어 본을 뜬 소환진의 선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 모습.
“그래서. 말해 봐, 엘. 뭘 하고 있었던 건데?”
슬쩍 눈치를 본 엘하시온이 순순히 털어놓았다. 정말 실수였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실수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피가 마력의 매개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전승에서도 그렇고, 피는 생명의 상징, 힘을 담는 그릇, 또는 힘이 흐르는 통로로 묘사되기도 하잖아?”
“네 생각은?”
“되는 것 같아.”
손가락의 피는 얼추 멎은 것 같았다. 좀 더 잡고 있어, 하며 이올라가 손을 놔주었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결국 만나고 왔구나?”
“…음.”
엘하시온이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이올라는 뭔가 애써 꾹 눌러 참는 얼굴을 했으나, 잠깐뿐이었다. 그녀는 그냥 엘하시온의 어깨만 툭 치고 말았다. 애초에 그녀가 걱정했던 건 그의 안전이었으니, 어찌 됐든 만나서 안전히 돌아왔으면 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엘하시온이 눈에 띄게 안심하며 활짝 웃었다. 그런 그를 보는 이올라의 눈에 잠깐 복잡한 빛이 스쳤으나,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렸다.
“봐 봐, 이올라. 마력에는 기원이 담기기도 하잖아. 다른 이의 피가 아니라 소환을 하는 당사자의 피를 담는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소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마법사가 그랬던 것처럼 피로 소환진을 그린다고? 자기 피로? 소환된 사람 얼굴만 구경하고 죽겠는걸.”
“죽지 않을 만큼만 하면….”
엘하시온이 말을 멈추었다. 다 끝내기도 전에 이게 꽤 멍청한 소리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올라가 지적했다.
“엘. 마력의 크기가 능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거라면 마력의 효율을 높일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가진 특기는 단순히 세냐 약하냐로 구분되지 않아. 힘의 크기가 마력과 아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사람이 바라는 소망은 다양하고, 특기도 다양하니까. 굳이 피까지 흘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던 이올라가 말했다.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사람도 첫인상이 중요한데, 이쪽은 지금 그 마법사님이 첫발을 완전히 망쳐 놨잖아.”
죄수라고는 하지만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을 도륙하고, 그들을 제물로 바치고, 피바다를 이룬 곳에서 악마를 불러내서 왕을 더 미쳐 돌아 버리게 만들고… 이 정도면 아주 그냥 찢어 놨다. 이올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치료를 할 만한 능력을 가진 이라면?”
삐뚤빼뚤해진 소환진 안으로 걸어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며 엘하시온이 물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이올라가 소환진 가장자리에 섰다. 그녀가 엘하시온을 가리켰다.
“생각해 봐, 엘. 너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낯선 세계, 널 어떻게 해서든 밀어내고 지워 내려고 하는 세계에 뜬금없이 불려 왔는데, 널 불러온 사람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 그리고 살려 달래. 근데 넌 그게 누군지 모르는 거야.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 근데 일단 자기랑 계약하고 나서 살려 달라고 하는 거지. 넌 어떻게 할 것 같아?”
소환진 위에 서서 이올라를 보며 엘하시온이 턱을 긁적였다. 잘 가늠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느낌은 왔을 것이다.
“나라면, 글쎄. 그게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능력은 소원에 맞춰지잖아. 그런 능력을 가진 이를 원했다면 그 사람이 바라는 것도 낫게 하는 힘 정도일 것 같은데?”
엘하시온의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올라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꼭 그렇지는 않아, 엘.”
“응?”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바람이 이루어지는 방법도 다양하니까.”
누군가를 낫게 하는 능력을 바랐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올라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돌렸다.
“아무튼, 별로 쓸 만한 방법은 아닌 것 같네.”
“그런가….”
엘하시온은 수긍했지만, 그럼에도 뭔가 걸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소환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렇게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뭔가 답을 찾을 때까지 궁리하는 그를 알아, 이올라는 그냥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턱을 괸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18살의 계약자를 지켜보았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엘하시온과 이올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앞에 조그만 여자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문고리를 잡았다기보다는 매달렸다고 봐야 옳을 것처럼 아주 조그만 아이였다. 풍성한 금발이 구불거리고, 동그란 눈동자는 황금빛이었다. 작은 당근이 그려진 하얀 잠옷이 아주 깜찍하다. 앙증맞은 한 손에 작은 쟁반을 들고 서 있던 아이가 활짝 웃었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