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95화 (194/250)

195화

“어서 오게, 아폴리온.”

환영하듯, 팔을 벌리며 왕이 말했다. 남자- 아폴리온의 눈이 바닥에 널브러진 가엘에게로 향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본 그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소?”

“참, 그대는 치료 같은 건 하지 못한다 했었지. 여봐라, 궁의를 들여 가엘을 치료해 주거라. 마법사들이란 어찌 이리 나약한지.”

왕이 혀를 차며 말했고, 한쪽 구석에 대기 중이던 궁인이 재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왕을 보며, 아폴리온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맹수를 앞에 둔 듯 조심스럽고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흥미진진하게 그를 쫓았다. 바닥에 무릎을 댄 아폴리온이 가엘의 등 위로 손을 얹고, 코를 틀어막은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부러졌군.”

지그시 이를 문 듯, 수염으로 가려진 턱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입으로 숨을 몰아쉬는 가엘의 눈이 그를 향했다가, 순간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걸 본 아폴리온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푹- 살덩어리가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아폴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가슴을 꿰뚫고, 피 묻은 검 끝이 튀어나와 있었다. 가엘이 덜덜 몸을 떨었다. 그가 입을 벌리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피거품이 끓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폴리온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서 빛이 꺼지고, 천천히 그의 몸이 기울었다. 털썩, 시신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가엘이 경기를 하듯 크게 몸을 떨었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누가 내게 이 따위 싸구려 검을 건넸지? 팔이 아프구나.”

왕이 손을 털며 말했다.

“퀴아닌 상단의 단주랍니다, 전하.”

왕좌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 이 모든 것들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대답했다. 그래? 인상을 찌푸린 왕이 아폴리온의 시신 위에 발을 올렸다.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은 그가 끙, 힘을 주며 애를 쓰더니 한 번 더 검을 고쳐 잡았다. 시신이 들썩거린다. 발로 단단히 고정한 왕이 마침내 쑥, 검을 뽑아냈다. 팍, 피가 튀었다. 왕이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가서 이 검으로 목을 베어 와라.”

“예, 전하.”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 하나가 검을 주워 올렸다. 그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날을 제대로 벼리지 않은 장식용 검이었다. 그러나 인상을 찌푸렸던 것도 잠시뿐, 기사는 말없이 검을 챙겨 대전을 나갔다.

“물을….”

제게 튄 피를 옷에 닦아 내던 왕이 멈칫했다. 그가 제 손에 묻은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흘긋, 가엘을 한 번 본 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피가 잔뜩 튄 손등을 길게 핥아 올린다.

“…맛이 별로군.”

와인을 음미하듯, 혀를 굴리며 피를 음미한 왕이 희한하다는 듯 피 묻은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그가 천천히 번지는 피를 밟고 넘어가 꼬꾸라진 아폴리온의 시신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손을 핥으며,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를 응시한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떠는 가엘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느린 음악이 흐르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사이 한참의 침묵이 지나갔다. 움찔, 아폴리온의 몸이 흔들렸다. 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신기하고 진귀한 것을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쪼그리고 앉은 몸을 좀 더 가까이하며 흥분한 것을 숨기지 못했다.

곧 엎어진 아폴리온의 몸에서 긴 숨이 크게 흘러나왔을 때, 왕은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띠었다. 더듬거리며 바닥을 짚은 아폴리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왕의 붉은 눈동자가 환희로 물들었다. 입이 벌어지고, 그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대단해! 과연 악마다, 과연 악마라고 할 만해!”

벌떡 일어난 왕이 왕좌를 돌아보았다.

“보았느냐! 내가 정확히 심장을 꿰뚫었다! 분명히 죽었는데 이리 다시 살아나는구나!”

“그러게요, 전하. 과연 저 마법사가 자신할 만하군요. 머지않은 듯하네요.”

여인이 곱게 눈을 접으며 대답했다. 호응에 더 신이 난 왕은 거의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왕이 홱 돌아보았다. 형형한 붉은 눈이 가엘과 아폴리온에게로 향했다가, 그 아래 피로 더욱 짙은 빛을 띠게 된 카펫을 지나쳤다. 왕이 다시 가엘을 보았다.

“가서 이놈을 지하에 가두어라.”

아폴리온이 놀란 얼굴로 왕을 보았다.

“?! 전하!”

가엘이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궁의가 와서 대기 중이었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다.

“이것이다. 이거야. 생각해 보니 네놈도 처음부터 이자의 피를 받아 마시고 있었다고 했지. 바로 그것인데, 어째서 지금껏 내게 방법을 찾겠다고만 하고 있었지? 시간을 끌어 날 초조하게 해 보려고 했느냐? 거래를 하고자 한 게지.”

왕이 손을 내밀었다. 스르릉- 기사 하나가 다가와 검을 뽑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기사가 차고 다니는 검은 진짜였다. 평생 검이라고는 가벼운 운동 정도로밖에 휘둘러 본 적 없는 왕이 제대로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축 처진 검 끝이 엎드린 가엘의 얼굴 앞으로 향했다. 아폴리온이 다급히 말했다.

“잠깐- 그런 게 아니오!”

“아닙니다! 안 됩니다, 전하. 그의 피를 마셔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죽지 않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방법이 아니기에 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가엘이 절박하게 외쳤다.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발음이 다 뭉개져 가는데도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두 기사가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고 중이었다. 왕은 명령을 물릴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아폴리온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왕과 가엘을 번갈아 보았다. 이곳은 궁이고, 궁의 중심부인 대전 한가운데였다. 일단 왕의 명령에 고개를 숙여야 할지, 어떻게든 막아 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놈이라 안 되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왕이지 않느냐.”

왕이 버거운 검을 움직였다. 검 끝이 아폴리온을 향했다.

“마셔 보면 알 일이다.”

“전하!”

“직접, 내가 직접 하겠소.”

아폴리온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해치지 않는다는 표시처럼 왕이 쥔 검으로 손을 뻗었다. 왕이 흥미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검날을 잡았다. 꽉 쥐자, 금세 팍 피가 터진다. 창백한 검날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명을 따를 테니… 해치지 마시오.”

아폴리온이 말했다. 왕이 상냥하게 웃었다.

“어찌 해치겠소. 그대처럼 귀한 자를 부른 것이 가엘이라는 걸 내 잊지 않고 있지. 괘씸하여 잠깐 벌을 내리는 것뿐이니 개의치 마시오.”

왕좌에서 달려온 궁인 하나가 무릎을 꿇고 왕에게 잔을 건넸다. 금으로 주조되고, 보석으로 장식되어 실질적인 잔이라기보다는 전시해야 할 예술 작품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잔에 아폴리온의 피가 채워졌다. 찰랑거리는 피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왕이 단숨에 잔을 넘겼다.

꿀꺽꿀꺽, 치켜든 목에 튀어나온 울대가 오르내린다.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습을 응시하던 아폴리온이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가엘이 끌려간 대전의 문 너머를 바라본 그가, 음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

“…왜 갑자기 저리 되었소? 잘 설득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하의 공기는 서늘하고 음습했다. 마치 그가 처음 불려 왔던 그곳과 같았다. 짙은 피 냄새만 없을 뿐, 냉기를 내뿜는 돌벽도, 거친 바닥도, 창살도, 컴컴한 어둠도 전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것 같다. 옷에 범벅이 된 피 냄새가 어른거리기는 하니 어쩌면 아주 같다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공자를… 만나고 온 걸 들켜서 그렇습니다.”

코에 붕대를 감은 가엘이 대답했다. 창살 안은 그래도 그때의 그 감옥보다는 훨씬 나았다. 사람 몇 명이 들어가면 좁아 옴짝달싹 못 할 크기도 아니었고, 귀족에게는 끔찍하지만 평민에게는 꽤 괜찮은 침대도 있었다. 작은 책상과 의자도 있었고, 그 위에 조그만 등도 하나 있었다. 가엘은 의자를 끌어다 창살 가까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공자?”

창살 바깥에 선 아폴리온이 물었다.

“이전에 얘기했던, 당신과 같은 이를 또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포어 레펜스 공자요.”

“…위험하다고, 만나지 않겠다고 했잖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왕은 인내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엘이 허망히 미소 비슷한 것을 띠며 말했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그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 게 전부 그가 생각해 낸 게 아니었다. 따뜻한 햇볕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그 상냥한 공자는 그들이 이걸 함께했다고 말하지만, 가엘은 제가 훔쳐 온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왕에게 영생을 바치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조차 등불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롭다. 병을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왕의 손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아폴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았을 때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웅덩이 속에서 그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구렁텅이로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미안하오.”

“공자가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아폴리온의 말을 못 들은 양, 가엘이 말했다. 희끄무레한 빛을 등진 빛바랜 청동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도와주겠다고….”

침잠해 있던 아폴리온의 눈빛이 변했다.

“그 공자가 나와 같은 자를 불러냈다고 한 거요? 성공했다고?”

“나와는 달리, 정당한 방법으로… 더 나은 바람으로요.”

헛웃음을 지으며, 가엘이 말했다.

“‘미래’를 기원했다고 했습니다.”

아폴리온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좀 더 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붕대를 감은 손이 창살을 쥐었다.

“무슨…,”

“미래의 존재를 부른 겁니다. 더 앞날의 이를요.”

“!”

“악마도 뭣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생명을 제물로 받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마력… 마력이면 된다고. 그게 당신과 같은 자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기에, 힘을 빌려주는 정당한 계약 관계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