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그러나 시오한의 말처럼 가엘의 계약자가 지하 감옥의 그 순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역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른 걸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그건 분명 맹약이었다. 만약 가엘의 계약자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그리고 맹약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을 한날한시에 묶어 주는 게 맞다면, 이도하는 방금 전 가엘을 만나지도 못했어야 했다. 그 또한 그곳에서 죽었어야 했다.
맹약이, 그런 게 아니라면 모를까.
아찔한 느낌에, 이도하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시오한이 그를 바라보았다.
“…데려오지 않았다고 했을 때, 가엘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묘지에서 엘하시온에게 가엘은 그렇게 말했었다. ‘데려오지 않았다’고. ‘죽어서’ 데려오지 않았다, 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이도하는 거기까진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그대의 말이 맞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어.”
“그럼?”
“다른 방법도 있어,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그들이 가엘을 왕에게로 데려갔을 방법.”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죽지 않거나… 죽였어도 다시 돌아왔다면, 가능하겠지.”
상처를 회복해 다시 낫는 수준이 아니라, 화살 세례를 아무리 퍼부어도 남자가 죽지 않았다면.
“…죽지 않는다고?”
원래부터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다던 왕이 난데없이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까지 품게 된 이유. 간언을 올린 공작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불사’의 방법을 찾아오라는 왕명을 내린 이유.
“하지만 그런 특기는….”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수히 많이 스쳐 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높은 왕궁이 무심하게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
짙은 사향 냄새가 코를 찌른다. 폐부를 가득 메우고 머리를 얼얼하게 할 정도로 강한 향이 대전에 흐르고 있었다. 희뿌연 연기가 짙은 안개처럼 꽉 차 있어 단숨에 정신을 흐트러트린다.
천장과 기둥마다 제멋대로 자라난 식물들이 가지를 뻗었다. 덩굴과 이국의 꽃들이 뿔 달린 하얀 사슴의 휘장을 모두 가리고 숲처럼 무성하게 엮여 있다. 대전에서 실질적으로 대전 회의라고 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꽤 오래전으로, 회의와 보고, 간언보다는 음악 소리가 흐르게 된 지 한참이었다.
대신들이 서 있던 곳에는 온갖 진귀한 장식품이 따위가 널려 있었고, 왕좌로 오르는 계단에는 후궁들이 푹신한 방석을 깔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왕좌에 왕이 앉아 있다.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정복을 대충 갖춰 입고, 가슴 위에 책을 엎어 둔 채 몸을 기울였다. 왕은 왕좌와 거의 붙다시피 가까이 앉은 화려한 푸른 머리의 여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편안하게 흐트러트린 붉은 머리칼 아래 젊고 잘생긴 얼굴은 유쾌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선왕은 말을 타다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뒤 즉위한 14살의 왕은 이제 22살이었다.
“전하, 마법사 가엘 들었습니다.”
주춤거리는 가엘의 등을 밀며, 그를 데리고 온 기사가 고했다. 왕이 눈을 돌렸다. 머리칼과 같은 짙은 붉은 눈동자가 가엘에게로 향했다. 머리 위에 쓴 왕관이 반짝인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가엘이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왕의 시선을 느꼈다.
“대체 어딜 갔다 온 게냐? 한참이나 찾았지 않아.”
왕이 나긋하게 말했다. 벌벌 떨리는 제 손 사이를 응시하며, 가엘이 대답했다.
“송구… 송구합니다, 전하. 어떤 일로 찾아뵈셨나이까.”
“하하!”
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들었나? 찾아뵈셨나이까- 저런 엉터리 말투는 처음 들어 보는군.”
“배우지 못해 그러지요, 별수 있나요. 전하께 즐거움을 드렸으니 봐주실 생각이시지요?”
“말이라고.”
조곤조곤한 여인의 대답에 왕이 가볍게 대꾸했다. 별 쓸데없는 말을 다 한다 하는 말투였다.
“그래, 만나 보니 어떠한가? 쓸 만하겠어?”
왕이 물었다. 뚝, 가엘은 붉은 카펫 위로 떨어지는 제 땀방울을 보았다.
“쓸… 만하다 하심은….”
“포어 레펜스의 공자 말이다.”
가엘이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손끝이 카펫 위로 파고들듯 오므라들었다. 잠시 잠깐, 아주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갔으나 다 부질없었다. 설령 그가 만나고 온 게 정말 엘하시온 포어 레펜스가 아니더라도 이미 왕은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 소문대로 마녀가 맞더냐? 포어 레펜스 공작이 정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팔았더냐?”
가엘은 질끈 눈을 감았다.
“마… 만나지 못했나이다.”
“…만나지 못했다? 누구를, 그 꼬마 포어 레펜스를, 아니면 마녀를 말함이냐.”
왕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뚝, 다시 땀방울이 떨어졌다.
“마… 녀를 말하나이다.”
“…….”
왕이 잠시 침묵했다. 느리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푸드덕, 작고 날갯짓 소리도 났다. 뒤이어,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먼 왕좌로부터 절대 닿지 않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가엘은 그의 한숨이 제 온몸을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툭, 뭔가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저벅저벅 발소리가 이어졌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입을 꾹 다문 가엘의 호흡 또한 빨라졌다. 그리고 시야에, 짙푸르고 둥그런 신발 코가 들어왔다. 주위로 옷자락이 스르륵 주저앉으며 펼쳐진다.
“가엘.”
머리 위로 손이 내려앉는다.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고 사뭇 상냥하기까지 했다. 점점 뒤로 당기는 손길에, 가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지금 나와 질문 놀이를 하자는 게냐? 내가 너에게 궁금한 걸 계속 물어봐야 하는 게야? 내가 답을 구걸해야 하는 거냔 말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비루한 몸이 어리석어 감히 전하께서 구하시는 답을 알지 못해 그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구해? 내가 네게서 답을 구한단 말이냐? 내가 네게 구해 달라고 했더냐?”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에 못 박힌 것처럼 가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으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고 목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왕이 빙그레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가엘의 머리칼을 쥐었다. 잿빛 머리칼의 왕의 손아귀에 구겨졌다.
“말을 해 보래도.”
“…….”
“가엾게도 겁을 먹었구나. 염려 말아라, 내가 네게 얼마나 많은 자비를 베풀었지?”
하루, 이틀, 사흘… 이런, 손가락이 다섯 개밖에 없구나. 쪼그리고 앉은 왕이 다른 손으로 숫자를 세다 그만두었다. 어쨌든 한 손으로 다 세지 못할 만큼의 시간 동안 베풀었지. 왕이 중얼거렸다.
“네가 바쳐 올리겠다 고했던 그 영생을 기다리느라 말이다, 가엘.”
“여부가 있겠나이까, 전하.”
가엘이 말했다. 이곳에서, 바로 이 대전에서 고했었다. 지하 감옥으로부터 이곳까지 끌려와, 그가 제 입으로 고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왕에게, 영생을 바칠 수 있다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제게 불려 온 그 악마를 선보이며 그렇게 말했었다.
“허나 전하, 감히 아뢰건대, 포어 레펜스 공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소문… 소문에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공자는 마법사가 아니기에 진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가 만난 것 또한 마녀가 아니라 흔한 여인네에 불과하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찌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겠나이까. 그는, 그는, 무엇도 간절한 이가 아닙니다, 전하….”
가엘은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왕이 물끄러미 가엘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가 비죽 웃었다.
“그래… 대단하신 리오넬 포어 레펜스 공작은 고작 왕명에 자식을 바칠 인물이 아니지.”
“저, 전- 컥!!”
왕이 가엘의 목을 틀어쥐고 제게 끌어당겼다.
“하면 너의 그 악마나 다시 한번 불러 보거라.”
“저- 커헉!”
“아 참, 그래.”
왕이 손을 놓았다. 컥! 가엘 거센 기침을 토해 냈다. 눈물이 줄줄 흘렸고, 목은 불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바르작거렸다. 일어선 왕은 무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발로 그의 머리를 툭툭 걷어차며 보챘다.
“또 날 기다리게 하는구나.”
“소, 송구-.”
하,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비비적거린 그가 이내 퍽! 발을 휘둘렀다. 얼굴을 걷어차인 가엘의 고개가 크게 꺾였다. 피가 튀었으나 왕의 신발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렸고, 짙은 색 카펫에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았던 가엘이 곧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피가 쏟아지는 코를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굴렸다. 엎드리자,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나와 진득하게 떨어졌다.
“가엘.”
부름에 가엘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 뒤로 넘어간 피가 끓는 소리만 난다. 불쾌한 소리에 왕이 얼굴을 찌푸렸다. 헉, 헉, 숨을 몰아쉰 가엘이 비로소 제대로 말했다. 입 안이 피로 가득 차 불분명한 발음이 묘한 울림을 가지고 퍼졌다.
[아폴리온.]
그들의 발아래, 붉은 카펫 위로 푸른 소환진이 확 펼쳐졌다. 눈부신 푸른빛에 왕의 환하게 웃었다. 푸른빛이 번진 얼굴- 붉은 눈동자에 희열이 아른거린다. 소환진에서 푸른 불티처럼 떨어진 조그만 빛들이 떠오르며 점점이 모여들었다. 한데 뭉쳐, 곧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빛이 사그라들고, 나타난 남자가 눈을 떴다. 짙은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하하하! 이것 참! 볼 때마다 신기하구나!”
왕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두운 옷에 가죽 외투, 짙은 녹색의 망토를 걸치고 있는 남자는 일견 남루해 보였다. 옷에는 흙먼지가 가득했으며, 머리도 며칠은 감지 못한 것처럼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덥수룩하게 수염이 난 얼굴도 온통 지저분하다. 푸른 눈동자만이 형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