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가엘은 흐느끼고 있었다. 바닥에 끈적하게 흐르는 이 피가 제 절망인 양 그는 발버둥 쳤다. 머리를 조아리고 빌었다. 이게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는 더 버릴 것도 없었다. 가엘의 머리 위로 쇳소리가 섞인 거친 숨소리가 떨어졌다. 가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서 있던 그가 문득 말했다.
[어쩌면….]
철컥- 다시 쇠가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가 났다. 캉-! 뭔가 둔탁하게 떨어졌다. 가엘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스르릉- 검이 검집을 긁고 나오는 서늘한 소리가 이어졌다. 멍하니 고개를 든 가엘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를 마주쳤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툭- 뜨끈한 것이 가엘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핏방울이었다.
[될지 안 될지는… 나도 모르오.]
투둑- 연이어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가엘이 입을 벌렸다. 구역질 나는 비릿함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럼에도 떨어지는 피를 허겁지겁 받아 마셨다.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기어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온통 피, 피, 피다. 피 웅덩이 속에 주저앉은 그는 또 피를 받아 마시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 핏방울이 떨어지는 거친 손만이 그의 눈에 가득하다.
그때 꿀꺽꿀꺽, 울대를 넘어가는 소리만 울리던 동공 안에 발소리가 이어졌다. 다급한 발소리 수십 개가 동공을 두드리며 가득 채운다. 남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가 가엘의 앞을 막아섰다. 피 묻은 하얀 옷자락이 어둠 속에서 흔들린다.
입구에서 수십 명의 기사들이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달려 내려온 그들은 눈앞의 광경에 기함을 한 듯 찰나 동안 얼어붙고 말았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 악마다! 악마야!]
핑-!! 공기를 꿰뚫는 소리와 함께, 부지불식간에 석궁이 쏘아졌다. 콰득-! 뭔가 꿰뚫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저를 돌아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그 몸이,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아주 느리게 보인다. 철퍽- 마침내 남자가 질척한 피 웅덩이 속으로 추락했다. 피가 튀었다. 덜덜 떨며, 가엘이 얼굴을 닦아 냈다. 이미 그의 손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굴을 닦아 낸 게 아니라 더 더럽게만 한 것 같다. 멍하니, 그는 새빨갛게 얼룩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가엘은 기억에서 번뜩 깨어났다. 캄캄한 어둠도, 질척한 늪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절망감도, 코를 마비시키는 피 냄새도,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비명과 신음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마차가 달리고 있었고, 바깥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의 물가 같은 싸늘한 겨울 냄새가 난다. 기이한 빛이 맴도는 새파란 눈동자가 가엘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처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가엘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어깨를 잡아 누른 남자가 눈 위로 손을 덮었다. 몸에 근육이라고는 없는 가엘은 절대로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힘이었다. 귓가에 다가온 목소리가 속삭였다.
“쉬. 그냥 꿈꾼 거예요. 악몽 같은 거. 피곤해서 잠 엄청 온다. 도착할 때까지 좀 자죠.”
머리가 무거워졌고, 의식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가엘이 마지막까지 인지한 것은 어깨를 누른 손이 떨어지는 것과, 거의 들리지 않는 거친 욕설 같은 것이었다. 까무룩,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거세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보시오, 마법사님!”
“…….”
“무슨 잠을 그리 달게 잡니까? 다 왔어요!”
잠을 잤던가? 가엘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부가 참 희한하면서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과연 창밖으로 왕궁의 전경이 들어온다. 마차에서 잠을… 고개를 흔들어 애써 정신을 차린 가엘은 마부에게 삯을 치르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내부도 따뜻한 편은 아니었는데 밖으로 나오니 찬바람에 단번에 정신이 들었다. 그가 뻑뻑한 눈을 문질렀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별로 좋지 않은 꿈을 꾼 것은 분명했다. 불쾌한 감각. 매달리고, 울고, 흐느끼며 절망했던 그 감각이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었으니.
“마제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가엘이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기사 하나가 단숨에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내내 성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던 듯 코끝과 귀가 빨갰다. 왕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는 1군단의 기사였다. 표정이 좋지 않다. 그가 덥석 가엘의 팔부터 잡으며 말했다.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지? 빨리 가야 하니 바쁘게 움직여.”
가엘의 눈이 흔들렸다.
“전하께서 아까부터 찾으신다.”
그가 꾹 주먹을 쥐었다. 이미 상처가 난 손바닥으로 싸한 통증이 전해졌다.
***
이도하는 찌푸린 얼굴로 성문 안으로 거의 끌려 들어가다시피 하는 가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핏 봐도 영 대우가 좋지 않다. 가엘의 표정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안색이 창백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까지 하다. 아까 묘지에서 엘하시온을 보던 그 얼굴과는 전혀 달라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출세는 아닌 것 같네.”
시오한이 그의 앞으로 동그랗고 붉은빛이 나는 과일을 내밀며 말했다. 그가 턱을 들자,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따뜻한 빛을 띤 황금색 눈동자가 언뜻 드러났다. 이도하는 무슨 돈으로 이 과일을 샀냐, 하는 쓸데없는 질문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을 읽는 건 단순히 장면을 훔쳐보는 게 아니라 마치 그 기억을 경험하는 것과 같아서, 당사자의 감각까지 모조리 종합선물세트처럼 함께 느껴졌다. 가엘이 느낀 절망, 분노, 그리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피와 질척하게 사방에 가득 차 있던 피까지 다 제가 겪은 것처럼 생생하다. 때문에 이도하는 속이 매슥거려서 지금 상큼한 게 몹시 필요했다.
과일을 베어 물며 이도하가 시오한을 유심히 살폈다. 과일의 향을 맡아 보는 그는 몹시 평온해 보였다.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곧 시오한이 눈을 들며 빙그레 웃는다. 입 안에 가득 차는 상쾌한 달달함과 함께 곧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던 속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다.
그들은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 성문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느 정도의 특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지금 저 왕궁 담을 넘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시오한, 이게….”
이도하는 뭐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아주 혼란했다.
“그….”
“가엘의 계약자는 그에게 피를 주었고, 죽었지.”
“!”
이도하가 발을 멈추었다. 한 걸음 앞서간 시오한이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이도하가 물었다.
“본 거야?”
그가 읽었던 가엘의 기억. 시오한이 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대가 내 눈으로 본 것처럼, 나도 그대의 눈으로.”
“당신도 그게 된다고?”
“되던걸.”
한번 해 봤다, 하는 것처럼 시오한이 가볍게 말했다. 이도하는 영 얼떨떨해졌다. 제가 평소에 해 보니까 되더라, 하면 다들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건 제가 특기자이며, 또 계약자라서 가능한 줄 알았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시오한은 이미 그의 특기를 제 것처럼 쓰는 것이 가능했다. 새삼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렇구나. 제가 본 것을 설명할 필요 없으니 좋긴 하다. 과일을 한번 내려다본 이도하가 잠깐 묘한 얼굴을 했다가, 다시 발을 놀렸다. 시오한의 손이 자연스레 그의 손바닥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와 단단히 손을 잡는다.
“어, 아무튼, 그래. 피를 주고, 죽었다고.”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바닥에 새겨져 피로 채워지는 소환진. 피의 교환. 피, 피. 그놈의 망할 피. 디테일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아주 똑 닮았다고 할 만하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맹약이잖아.”
“그런데 계약자가 바로 죽었고.”
그 짧은 거리에서 석궁에 꿰뚫리고도 살아남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 순간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가엘의 기억 속에서야 남자는 천천히 쓰러졌지만, 사실 굵은 화살은 그를 거의 날려 버리다시피 했다. 흥건한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남자는 가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빛으로 점철된 시야로, 가엘은 푸른 눈동자의 빛이 사그라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정도 상처에서 회복할 만한 특기가 있는 건가? 가엘은 살려 달라고 빌었잖아.”
“계약자는 죽으면 시신이 사라지잖아,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몸에서 생명이 떠나면 더 이상 마력도 돌지 않는다. 마력이 돌지 않는 계약자의 몸은 더 이상 세계를 속일 수 없는 이물에 불과했고, 그들의 시신도 계약자들이 사소하게 잃어버리는 물건들처럼 사라지고 만다. 어디로 가는 건지, 어떻게 되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냥 소실되는 것이다.
“시신이 사라졌다면 가엘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으니 왕에게 불려 가지도 않았겠지.”
죄수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그들의 피로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괴이한 마법진으로 보였을 진을 그리고, 그 위에서 누군가의 피를 받아 마시고. 과연 악마 숭배의 현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모습을 보였으니 특이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가엘 역시 석궁에 꿰여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더라도, 시오한의 말처럼 왕이 그를 부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능력으로 상처를 치유해 살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죽였을 것이고.”
놀라고 공포에 질린 이들이 분별력 같은 것을 발휘할 수는 없을 테니. 사실 고작 석궁 한 발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엘의 기억이 끊긴 그 뒤로 이미 쓰러진 남자의 몸에 석궁 세례가 쏟아졌대도 놀랄 게 없었다. 능력을 발휘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이도하가 말했다. 하지만 그 푸른 눈동자는 분명 가엘이 소환한 계약자의 눈이었다. 엘하시온이 죽는 순간, 우르슬라를 돌아보던 눈. 우르슬라가 몇 만 번이 넘도록 되풀이해 마주친 눈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말뚝처럼 박혀 버린 눈.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