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던 듯 가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조금 뒤에야, 입술을 달싹인 그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답네요. 불려 온 존재가 예지 능력이라도 갖고 있습니까? 공자님에게 미래를 알려 주던가요?”
“아무것도.”
가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 자체가 미래예요.”
“…….”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던 가엘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엘하시온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오래된 청동 같은 눈동자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체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법이 없었다. 눈이 부신 사람처럼 늘 저 눈동자는 내리깔린 잿빛 속눈썹 아래 숨어 있었다. 그랬었다.
“미래의 존재를 부른 거로군요?”
그를 똑바로 보는 가엘의 눈에 어떤 빛 같은 것이 스쳤다. 뒤로 물러서며, 엘하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말했다시피, 이올라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이올라?”
가엘이 조소를 머금었다. 이올라- 시간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었다.
“신을 소환하고 그걸로 만족하셨군요. 그것도 공자님답습니다.”
알 만하다는 듯 말한다. 뭔가를 꽉 억누른 듯한, 사뭇 신랄한 어조였다. 엘하시온은 그가 뭘 기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뭘 생각하든, 이올라는 아주 한참이나 더 먼 곳에 있었다. 그를 도와줄 수 없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을 터였다. 엘하시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기우는 해가 비추고,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묘지에. 죽을 자리를 앞둔 가엘의 앞에서. 엘하시온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르쳐 준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워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을 붙인 것뿐이에요.”
거짓말이다. 이올라는 처음부터 이 계약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인 것은 맞지만,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고, 이곳에서의 이름을 요청한 건 그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하시온을 의아해하며 이올라가 다 가르쳐 주었었다.
여기가 적당하겠다면서 내민 그녀의 손목에 손을 대는 순간, ‘이올라’라는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에 모든 게 안정되는 걸 엘하시온은 분명 느꼈었다. 아마 가엘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 같은 것도 아니에요.”
“그래요, 정당한 계약 관계라고 하셨죠.”
가엘이 말했다.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이라고 했던 엘하시온의 말을 믿는 눈치도 아니었다.
“계약이라….”
빛바랜 눈동자가 스치는 순간, 엘하시온은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초조해졌다. 그가 입술을 꾹 물었다.
“소환은 마력을 소모하죠. 능력을 빌려주고, 마력을 받아 가는 겁니까?”
“…….”
“여기서는 별 쓸모를 찾지 못한 마력이 그들에게는 유용한가 봅니다.”
“가엘. 나랑 가요.”
엘하시온이 말했다. 조금 놀란 듯, 가엘이 눈이 순간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나랑 가요. 맞아요. 이건 누가 소원을 들어주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서로에게 가치 있는 것을 교환하는 정당한 거래죠. 가엘, 저쪽 세상에는 더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많다고 했어요. 가엘의 소환은 실-.”
쏟아 내던 엘하시온이 멈칫했다. 입술을 깨문 그가 말했다.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게 진짜예요. 진짜 마법이요. 아픈 사람들을 낫게 하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한순간에 더 멀리 가고, 우리가 늘 상상만 했던 그런 것들 있잖아요. 마치 다른 나라와 교역을 트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다른 세계일 뿐이지.”
“…….”
“나을 수 있다고요, 가엘도. 실패라고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실패해야 알잖아요, 뭐가 잘못됐는지. 그럼 이제 잘못하지 않으면 돼요. 그런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요.”
“…모르겠네요.”
가엘이 픽 웃었다. 비소 같은 게 아닌 그냥 웃음이었다. 허망해 보였다.
“제대로 된 방법을 정립하기만 하면 돼요. 더 많은 이들이 소망하고, 더 많은 이들이 불려 올 수 있어요. 거의 다 왔잖아요. 우리가 길을 튼 거라고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그가 다시 엘하시온을 보았다. 눈길이 흔들렸다. 실바람에 닿은 여름 이파리처럼 아주 찰나였다.
“꼭 공자님이 악마 같습니다.”
“…진심이에요.”
“하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엘하시온이 놀랐다. 그를 꽤 오래 알았지만, 가엘이 저렇게 소리를 내서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 웃음은 저문 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하- 헛웃음이 쐐기를 박았다. 엘하시온이 움찔했다. 그 짧은 웃음이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 같다. 입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꽤 솔깃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돌아가 봐야 해서요.”
그림자가 느껴지는, 평소처럼 음울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제 말처럼 그는 정말 돌아섰다.
“가엘!”
엘하시온이 달려가 그를 잡았다.
“서신은 왜 보낸 건데요. 날 왜 보자고 했는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요.”
“마녀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요.”
“왜요. 도움을 받고 싶었던 거잖아요!”
“이제 됐습니다.”
“…왕이 시킨 거예요?”
“…….”
가엘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뽀얗게 피어오른 입김이 그는 한 번도 피워 본 적 없는 담배 연기처럼 가늘게 피어올랐다 금세 흩어졌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행동도. 특히나 요즘 같은 때에는 더더욱 그래야 할 텐데요.”
왕이 두려워하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포어 레펜스 공작에게 지킬 수 없는 왕명을 결국 내린 지금. 연이어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가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다문 채로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가 다시 말했다.
“온실 속 화초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공자님. 세상은 공자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약합니다.”
절 잡은 엘하시온의 손을 떼어 낸다. 짧은 눈길이 잠시 머문 뒤에, 그는 엘하시온을 스쳐 사라졌다. 언덕을 내려가는 걸음에는 망설임 하나 없었다. 고집스럽기까지 했다. 엘하시온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느슨하게 땋은 황금색 머리칼 위로 기우는 해가 가지만 남은 나무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참 후에야, 그는 발걸음을 떼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텅 빈 묘지에서 바스락, 마른 풀이 밟히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가엘이 서 있던 비석 앞에 어느새 이도하가 서 있었다. 파랗게 물든 눈동자가 이름 두 개만 새겨진 작은 비석을 내려다본다. 발치에서 쥐가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찍찍, 울음소리를 냈다. 두 발로 일어서 수염을 떨던 쥐가 움찔 고개를 돌리더니,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다가온 발등에 앞발을 얹고 거의 올라탄 쥐가 한껏 고개를 들고 찍찍거렸다.
“내려와, 인마.”
쥐가 항변하듯 열심히 울어 댔다. 시오한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쥐가 기쁜 듯 그의 발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걸 본 이도하가 눈썹을 치떴다가 미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가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햇빛에 비쳐 반짝 빛난다. 둘의 시선이 언덕 아래로 향했다.
***
덜컹, 마차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벽에 머리를 찧을 뻔한 가엘이 눈가를 찌푸렸다. 앞쪽에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하는 소리가 났다. 귀족 가문의 마차였다면 아주 혼쭐이 났을 일이다. 그러나 제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마차를 잡아타면 흔히 있는 일이라 그는 곧 신경을 껐다. 애초에 그는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잠까지 잘 수 있는 그런 마차를 타 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창가로 시선을 주었다. 가엘은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제도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어깨와 머리가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창밖만 응시하던 그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평범한 손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특별히 더 늙지도, 더 곱지도 않고 그냥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다들 가지고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손이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뒤집어 보았다. 손바닥은 손등과는 조금 달랐다. 살갗이 얇아 보였고, 그래서 그 아래 피부가 비치는 것처럼 아주 붉었다. 여기저기에 흉터 자국도 있었다.
제 손바닥을 매만져 보던 그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약간 자란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는 손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아주 지그시 힘을 주었다. 어느 순간 그가 눈가를 찌푸렸다. 조금 더 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손바닥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가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맺힌 손바닥의 상처와, 피가 묻은 손톱 끝을 그가 노려보았다. 눈길이 몹시 사나웠다. 속에서 뭔가 받쳐 오르는 것처럼 숨을 몰아쉰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에 가슴만 오르락내리락 씨근거렸다.
쾅! 순간 가엘이 주먹을 휘둘렀다. 되는대로 휘두른 주먹이 마차 벽을 때리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가 마차 벽에 뒷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망할….”
목소리가 떨렸다. 내내 차갑고 딱딱하던 얼굴도 한 겹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애써 울음을 참는 아이처럼 몹시 연약해 보였다. 덜컹-! 마차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가엘이 눈을 떴다. 그는 절 향해 손을 뻗는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에 낭패감이 스쳤다.
“누-!”
“쉿.”
남자의 손이 순식간에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검은 눈동자에 불꽃이 일듯 기이한 푸른빛이 확 번졌다. 흔들리는 마차, 약간 때가 탄 마차 내부의 모습, 시야를 가득 채운 남자의 모습이 씻겨 나가듯 사라지고 모든 게 까맣게 변했다.
돌벽에서 묻어 나온 차갑고 탁한 냄새가 난다. 공기 중에는 축축한 습기가 어려 있고, 곧 그 떫은 냄새를 덮고 피 냄새가 물씬 피어올랐다. 가엘은 피바다 속에 엎드려 있었다. 무릎이며 팔꿈치에 피가 진득하게 엉겨들며 그를 붙잡고, 바닥에 박았던 머리칼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피 속에 잠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안 된… 안 된다고?]
[…그런 건 해 줄 수 없소.]
낮고 거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안타깝다는 듯, 느릿느릿하게. 한 겹의 막에 부딪혀서 나는 소리처럼 말이 둔탁하게 웅웅 울렸다. 철커덕- 쇳소리가 났다.
[안 된다고?]
[나는…. 사과드리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발, 그럴 리가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