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입이 삐뚤어져도 제가 방금 상냥했다고는 말 못 할 것 같은데. 시오한의 이 강철 콩깍지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끔 이렇게 치고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아니면 혹시 반어법인가… 잠깐 할 말을 잃었던 이도하는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시오한의 콩깍지야 하루 이틀 역사가 아니니 지금 여기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 된다.
“말을 안 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태 이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전부 저라는 걸 이도하는 깨달았다. 시오한은 늘 곁에 있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따라와 주었을 뿐. 그는 처음부터 맹약에 대해 그리 궁금해하지도 않았었다. 정말 지금만으로 다 충분하다는 듯이 굴긴 했다. 몇 번 입을 달싹인 이도하가 말했다.
“…혹시 내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거라고 해도 말이야.”
어쩌면 맹약이 뭐든지, 우르슬라가 몇 번의 시간을 돌리고 있든지 아무것도 모르는 셈으로 치고 내버려 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 인생이 퍽 다사다난해지긴 했지만, 시오한의 말마따나 시간이 어떻게 뒤엉켜 있든 어디까지나 계약이 그들을 이어 준다면 사실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의 말처럼, 그가 다 괜찮다고 한다면.
“뭔지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시오한. 난 그렇게는 못 해.”
시오한이 살피듯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찬찬히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꼭 그를 새겨 두는 것 같았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구겨진 이도하의 미간을 펴 주며, 그가 잔물결처럼 웃었다.
“응, 화이람.”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거지?”
“해 줄 말이 없는걸. 이건 그냥, 내가 겁쟁이라 그런 거야. 그대를 불안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 마치… 어리광 같은 거지. 다만 서툴러서.”
“뭔가 걸리는 게 있긴 하다는 말이잖아.”
“모르겠어,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느낌 같은 거야. 말했다시피 난 겁이 많고.”
시선을 마주한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도하는 집요하게 시오한을 살폈고, 시오한은 가만히 마주 볼 뿐이었다. 정말 숨기는 것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도하가 이따금, 아니 거의 자주 잊곤 해도 그는 위정자였다. 심지어 매우 훌륭한 위정자다. 그가 작정하고 뭔가를 숨기고자 하면 이도하는 그걸 제가 들춰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혹시 당신도 사람과 마력 그 사이 어디에선가 태어난 거면 지금 말해. 난 편견 없다.”
이도하가 말했다.
“응?”
시오한이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레무스 비숍. 당신이 말한 그 ‘불꽃’. 그 사람도 당신이랑 비슷한 말을 했단 말이야. 느낌인지 뭔지가 안 좋다면서. 일반적인 사람은 못 느끼는 육감 같은 게 있는 거면 말하라고. 놀랍지도 않을 것 같다.”
오즈의 사람들은 애초에 뭔가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시오한은 확실하게 남다른 게 분명했다. 범상치 않은 수준을 초월한 마력부터 시작해서, 검을 쓰는 방식이나 동전 몇 개로 마트 전등을 다 터트려 버리는 일이나, 하여간에.
“그자가?”
“뭔 구멍이 뚫린 것 같다고 하더라고.”
대수롭잖게 말하며 이도하가 흘긋 시오한을 살폈다. 그의 입술이 매끈하게 미끄러졌다.
“화이람, 내 앞에서 다른 사내 이야길 하는 거야?”
“엉?”
“…혹시 그대가 좋아하는 게 금발이었나?”
시오한이 미심쩍게 물었고, 어처구니가 없어진 이도하가 입을 딱 벌렸다. 그는 기가 차 항변하려 했으나, 문득 레무스 비숍의 그 머리를 보고 시오한을 연상한 적이 있긴 하다는 걸 떠올렸다. 어젯밤에도 굳이 머리카락을… 갑작스러운 자아 성찰의 시간에 이도하는 입이 바싹 말랐다. 에이.
“…아니, 당신인데.”
이도하가 얼른 좁다란 방을 나섰다. 그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본 시오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따라나섰다. 등 뒤로 달칵 문이 닫혔다. 아무도 남지 않은 빈 연구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몇 장이 팔랑, 나부꼈다.
***
“이런 데서 보자고 할 줄은 몰랐어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석한 잿빛 머리칼 사이로 빛바랜 청동 같은 눈동자가 엘하시온을 바라보았다. 이제 채 서른이 되지도 않았는데 눈가에 난 주름마다 피곤이 박여 있었다. 처진 눈꼬리조차 지쳐 보인다.
남자의 몸에 피곤과 우울, 고독 같은 것이 옷자락에 스며든 겨울 냄새처럼 묻어 있었다. 담담히 서 있을 뿐인데도, 마른 몸을 감싼 두꺼운 외투가 남자를 더 왜소하고 힘겨워 보이게 했다. 마른 풀을 밟고 다가오는 엘하시온을 보며 남자가 언뜻 미소 지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새삼 아주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은 그는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왜요, 시체라도 파낼 것 같습니까?”
“…그렇게 보지 않을 거라고 장담은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걱정 마십시오. 마녀를 만났다는 공자와 악마를 불러냈다는 마법사가 묘지에서 만나는 게 퍽 그럴듯한 그림이긴 합니다만, 제 부모님의 묘이니. 아들이 인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불행에는 다들 조심스러워지는 법이거든요. 게다가 여긴 오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남자, 가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엘하시온이 흘긋 주변을 살폈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이 낮은 언덕은 성의 외곽에 자리한 묘지였다. 묘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비석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꽃이 놓여 있는 곳도, 흙과 먼지만 쌓인 곳도 있었다.
가엘이 앞에 두고 선 비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꽃도 먼지도 없이 그저 깨끗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주 작은 쥐 한 마리가 비석 옆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얼른 숨는다. 엘하시온의 눈이 주변을 훑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가엘이 말했다.
“함께 오지 않았습니다. 부르지 않아서.”
이 뜬금없는 말을 엘하시온이 당연히 알아들을 거라는 듯. 엘하시온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조금 더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비석에는 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하시온의 무무릎 높이에나 간신히 닿을 만큼 작았다. 가엘이 물었다.
“마녀라고들 하던데.”
“…정원사가 그렇게 높이 올라와서 가지치기를 하는 줄은 몰랐거든요. 숨긴다고 숨겼는데. 나 화초잖아요.”
진짜 몰랐지… 엘하시온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고, 가엘이 옅게 웃었다. 언젠가 그가 엘하시온더러 온실 속의 화초가 따로 없다고 했던 말을 일컫는 것이었다.
“숨을 만한 능력이 있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 걸 바란 게 아니라.”
“하기야, 공자님이 그런 걸 바랄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가엘은요.”
엘하시온이 말했다.
“나 거기 갔다 왔어요. 그 감옥에.”
가엘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기우는 해가 잘 묶어 놓은 엘하시온의 머리칼 위로 찬란하게 반짝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또렷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엘하시온은 그보다 조금 더 작았다. 그러나 포어 레펜스 공작은 대단한 장신이고, 대대로 역사에 이름이 남긴 기사들을 많이 배출한 그의 가문 사람들도 다 키가 큰 편이었다. 엘하시온도 앞으로 한참 더 클 것이었다.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바로 달려가시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날 바로 청소해 버렸다고 들었으니 다행입니다. 몹쓸 건 보지 않으셨겠어요.”
“맞죠? 소환.”
“이미 보셨다면서 또 물으시는 겁니까?”
“뭘 바랐어요?”
엘하시온이 물었다. 가엘이 짧게 웃었다.
“공자님, 진짜 궁금한 걸 물어보세요. 대답해 드릴 거고, 그러려고 만나 뵙겠다 한 거니. 저도 묻고 싶은 게 있고요. 이미 뻔한 것들로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가 마법사가 된 이유. 진리를 비틀 방법, 진리를 벗어날 방법을 연구하게 된 것이 그 선천적인 병 때문이라는 건 이 제도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하게 함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이었어요?”
엘하시온이 다시 물었다.
“우리가 얘기한 건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공자님이 얘기한 거지요.”
가엘이 대답했다.
“다른 세계가 존재할 거라는 것도. 아마 이 세계와는 다른 법칙을 갖고 있는 그들이라면 이곳까지 그들의 법칙을 갖고 오게 될 거라는 것도. 그럼 이곳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다 공자님이 한 얘기 아닙니까. 전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인데요, 공자님.”
그가 말했다. 약간의 웃음을 띤 채였다.
“그렇게 소망을 듣고 이곳에 와서,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뤄주는 게, 살려 달라고 간절히 빈다고 해서 달려와 그렇게 해 주는 게, 그런 달콤하고 솔깃한 게 악마가 아니고 도대체 뭐겠습니까?”
엘하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물, 대가, 그런 거란 말이에요?”
스물아홉 명. 그 감옥에는 스물아홉 명이 갇혀 있었다. 그들을 모두 죽였다.
“시도해 볼 만했죠. 목숨을 살려 달라는 소원인데 비슷한 것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뭔가 다른, 깊은 이유가 있을 줄 아셨나 봅니다.”
“…….”
“뭐든 끝에 다다라서는, 다 간단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됐어요?”
가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비스듬히 시선을 돌렸다. 이름 두 개만 남은 비석으로. 건조한 시선이었다. 그가 불러낸 이가 어떤 이든 애초에 불사 같은 걸 이뤄주지는 못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그가 바랐던 최소한의 소원조차도 이루어주지 못한 게 틀림없다. 가엘은 제 부모님의 묘를 보러 온 게 아니었다. 제가 묻힐 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차라리 자기 목숨을 바치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가엾게 여겨 줬을지도 모르는데.”
색이 바랜 청동색 눈동자가 의외라는 듯 엘하시온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화가 나신 겁니까?”
“이제 알 거 아니에요. 악마 같은 게 아니에요. 가엘이 말하는 것처럼 그냥 달려와 주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빈다고 해서 그냥 조건 없이 바라는 걸 해 주는 것도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를 돕는 정당한 계약 관계라고요.”
“계약이요?”
가엘이 물었다. 엘하시온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공자님.”
가엘이 물었다.
“뭘 기원하신 겁니까?”
“…‘미래’요.”
엘하시온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