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90화 (189/250)

190화

A4 용지와 비슷한 종이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한 귀퉁이에서 다른 귀퉁이로 호선을 그리며 쭉 가로지른 선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도하가 머그잔 아래에서 종이를 빼냈다. 다른 뭔가가 있나 싶어 햇빛을 향해 비춰 보았으나, 물에 젖었다가 마른 듯한 동그란 자국뿐이었다.

“바닥이야.”

시오한이 말했다. 고개를 내린 이도하는 제 발밑에 종이 하나가 더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른 발을 치웠다. 그리고 그 옆으로, 굴러떨어진 것 같은 동그란 그릇 아래 깔린 또 다른 종이도 눈에 들어온다. 미간을 구긴 이도하가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보자, 잡동사니가 있는 대로 뒤섞인 난장판 속에서 보이는 게 있었다. 이도하가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발밑의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한쪽 눈을 감고, 종이를 들어 올렸다. 옷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려 놓은 것 같았던 종이 옆으로, 제 손에 든 것을 대어 본다. 흐릿해진 시야로 선 두 개가 이어졌다.

“…소환진이잖아.”

대충 낙서를 하고 던져 놓은 것 같던 종이들은 모두 이어져 소환진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을 가득 채울 크기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건 어찌 됐든 이 방이 어지럽기는 했기 때문이며, 온갖 잡동사니들이 종이 위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소환진이다.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소환진. 우르슬라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소환진.

“흔들림이 있었던 것 같지?”

고개를 꺾어 천장을 살펴보며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의 말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은 꼭 위에 대충 얹혀 있다가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제 발 옆에 떨어진 펜을 발견한 이도하가 주워 올렸다. 끝에 잉크가 말라붙어 있었다.

“얼마 전에… 땅이 흔들린 적이 있다는데.”

이도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펜을 쥔 손끝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다가온 시오한의 손이 그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모두가 잠들었을 밤중이었다지. 그래서 미처 느끼지 못한 자들도 많다고. 땅이 흔들린 게 아니라 하늘이 흔들린 것 같기도 하고. 꼭 세상이 한 번, 아주 찰나에 딱 한 번 크게 흔들린 것 같았다… 어느 마법사가 그러던걸.”

“…밤.”

이도하가 그 말에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동이 트고 정오가 지날 즈음에… 감옥을 청소하러 갔던 인부가 성문에서 붙들렸고, 간밤에 감옥에서 있었던 일이 알려졌다고 해.”

이 세계에 지진 따위의 자연재해는 없다. 화산도 하나 없는 곳이고, 기록된 역사 중 쓰나미 같은 게 일었던 적도 없었다. 시오한의 치세까지 기록된 가장 큰 재앙이 ‘그’ 재앙이다. 천 년 전이라고 하지만 같은 세계다. 그러니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린 일 따위가 자연재해일 리도 없다. 그리고 이도하는 자연재해가 없는 이 세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소환이, 세계를 건드린 건가?”

하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된 백여 년 전부터 지금 이도하의 시간까지, 수많은 소환이 있었어도 그런 일은 없었다. 마력으로 특기자들을 이곳에 눌러 앉히는 건 여태껏 누구도 의심한 적이 없는 완벽하고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 어린 제가 그런 식으로 멋대로 세계를 뚫고 넘어가기 전까지는 어떤 문제도 일어난 적 없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가엘의 소환이 다른 소환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 두 가지뿐이다.

“시오한, 혹시 날 소환했을 때….”

“그런 적은 없었어.”

시오한이 대답했다.

“그대가 처음 내게 왔을 때도, 그다음에도.”

“…그럼 하나뿐인데.”

첫 소환.

모든 소환 중 가장 첫 번째. 최초의 소환, 최초의 계약. 이도하가 다시 제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종이를 가로지른 하나의 선이 그려져 있을 뿐인. 중간에 흐릿하게 번진 자국이 남아 있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도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시오한, 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움찔 놀란 이도하가 돌아보았다. 창문이었다. 주먹만 한 조그만 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도하가 손을 내밀자, 새가 그 위로 포르르 날아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마주 보는 까만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푸른빛이 감돌다 사라졌다. 새는 뭔가 바라는 것처럼 그의 손바닥 위를 잘게 쪼다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창문 밖으로 포르르 날아 사라졌다.

“외출하셨대, 당신 조상님.”

“바쁜 조상님이네.”

시오한이 까딱 눈썹을 들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가엘이 천 년 전 그 감옥에 있던 소환진을 그린 주인이며, 그 소환진으로 불려 온 계약자가 엘하시온을 죽인다는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나, 맹약에 대해서 뭔가 더 알아낼 만한 게 있길 바라며 이 난장판을 뒤지는 것보다 엘하시온의 뒤를 따르는 게 더 생산적일 것 같았다.

바깥의 기척을 살피고 이 조그만 연구실을 나서려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시오한이 우두커니 서서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종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자른 까만 머리칼이 까마귀의 깃털처럼 흔들렸다. 내리깐 눈에 검게 물들인 속눈썹이 황금빛 눈동자를 가린다. 긴 외투 자락이 그림자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굳은 채 그를 응시하던 이도하가 어느 순간 덥석 그를 붙잡았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그를 보고,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를 띤 채였다.

“왜 그래?”

“그냥. 잠시 생각하느라고.”

“뭔데?”

“…….”

시오한은 잠시 답이 없이 가만히 이도하를 바라보다, 그의 이마 부근에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화이람.”

“말해.”

“어쩌면, 그저 모르는 게 좋을지도 몰라.”

“뭐?”

“다 알 필요는 없을 수도 있어.”

“…무슨 소리야?”

이도하가 와락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당당하게 가게에서 훔쳐 입고 나온 단정한 옷자락이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오한은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봐도 봐도 모자란 것처럼. 모든 걸 묻어 버리고 잊어버렸던 이도하가, 이따금 그대로 잠겨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던 눈으로 여전히.

“화이람, 그대가 왜 이토록 그 여인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는지, 맹약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는지 기억해?”

시오한이 물었다. 마치 어느샌가 이도하가 그걸 잊어버렸다는 듯이.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시오한이 손이 속눈썹에 걸리는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냈다. 여린 눈꺼풀에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스친다.

“시간 때문이잖아.”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이었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시오한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며 저와 계약을 하고 싶어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그렇게 거부해 대던 저를 소환해 낼 수 있었던 방법이 궁금했다. 그가 목숨을 걸었던 이유도, 목숨까지 걸어 가며 해낸 계약이 도대체 뭐가 다른 건지도. 일반적이지 않았던 이 계약이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제게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

그러다가 우르슬라에게로 이어졌고… 우르슬라에게로 이어졌던 그 모든 게 누군가의 의도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쯤 사실 이도하에게 맹약이 일반적인 계약과 무엇이 다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저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양몰이를 당하듯 몰려 가고 있었다는 것도 다 상관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우르슬라가 붙잡고 놔주지 못하고 있는 시간. 뒤엉킨 시간. 언제 다시- 얼마나 더 틀어질지 모르는 시간.

“화이람, 나는 다 괜찮아.”

“시오한, 말을 해. 뭔데? 왜 그런 말을 해?”

옅은 한숨이 이도하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뺨을 매만지는 시오한은 대답이 없었다. 망설이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이야?”

“그때와는 달라, 화이람. 맹약이 무엇이든, 하나는 증명했지. 그대와 나를 이리 이어 주고 있으니 나는 그것으로 족해.”

와락, 이도하가 그를 끌어당겼다. 시오한이 순순히 끌려왔다. 버티고 서면 꿈쩍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내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 망할 거짓말쟁이야.”

시오한이 눈을 찡그렸다.

“망할은 너무한데….”

“족하기는 뭘 족해. 그런 걸로 족한 인간이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냐? 알긴 알아? 천지 분간 못하는 꼬맹이가 백날 사랑스러워 봐야 죽어도 섹스는 못 해. 하면 개놈이지. 노인 공경하고 살래?”

“…화이람.”

아찔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시오한이 신음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도하는 거침없었다.

“내가 안 족해. 내가 안 괜찮고, 내가 안 된다고.”

“거짓말이 아니야, 화이람. 내가 어찌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끝까지? 이도하가 인상을 쓰는데, 시오한이 쿵, 이마를 맞대었다.

“그저, 가치라는 건 상대적인 법이라.”

“…뭔 소리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시오한이 눈을 휘며 웃었다.

“어찌하면 그대가 날 더 사랑해 줄까, 하는 생각?”

“…….”

이도하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시오한에게서 현실성을 한 움큼쯤 더 없애 주는 긴 황금색 머리칼은 사라졌지만, 머리가 짧고 까맣게 됐다고 해서 그 얼굴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더 위태롭고 위험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선명해 맹수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되는 게 제가 이상한 건 아니다, 생각하며 이도하가 말했다.

“…미친 건가?”

“이런.”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혹시 내가….”

시오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다. 짧고 다정한 입맞춤 끝에 시오한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화이람. 그저, 그대가 이리 상냥하니 내가 욕심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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