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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89화 (188/250)

189화

“친했다기보다는, 뭐랄까, 포어 레펜스 공자님은 원래 아무하고나 다 친해요. 워낙에 사교성이 좋으신 분이라. 마탑 근처의 고양이들하고도 친하신데요, 뭐.”

서고에 책을 끼워 넣으며, 여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햇살이 서고 안으로 따뜻하게 비춰 들어오는 정오였다. 앉아 있으면 딱 곯아떨어지기 좋은 때라 그런지 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교류는 있었다는 얘기네요.”

“그랬죠. 학문적으로는 그 사람이랑 뭔가 맞는 게 있으셨나 보죠.”

학문적으로는? 게다가 물어본 건 가엘에 대해서였는데, 어느새 포커스가 묘하게 엘하시온으로 넘어갔다. 이 시큰둥한 반응이나, 가엘에 대해서 물었을 때의 그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나. 이 여자는 가엘이라는 마법사에게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인간적으로야 별로 맞을 게 없다?”

“인간적으로 가엘 마제스와 맞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모르겠네요.”

“어떤 사람이기에요?”

여자는 조금 높은 곳에 책을 꽂으려 및 책장을 밟고 서려는 참이었다. 하는 모양이 아무래도 위태로워 이도하는 여자의 손에서 책을 가져가 대신 꽂아 넣으며 물었다. 여자가 흘긋 이도하를 보았다. 당최 당신 같은 사람이 왜 그런 인간에게 흥미를 가지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이도하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시종일관 우울한 인간이죠. 어둡고, 음침하고. 그러는 주제에 말이라도 걸면 퉁명스럽고 냉소적이고. 왜 있잖아요, 혼자서 세상을 따돌리는 부류.”

“아?”

“그냥 늘 혼자 비극적이에요. 선천적으로 병이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아팠다는 건 알겠는데, 아픈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나까지 병드는 느낌이라고요.”

“큰 병이래요?”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던데, 죽을병이긴 한가 봐요.”

그럼 그게 큰 병이잖아. 뭐라는 거야. 이도하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책장에 마저 책을 꽂아 넣고, 잘못 들어간 책들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좀 마르긴 했는데 아픈 데가 있어 보이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겉으로 봐서는 그냥 멀쩡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낌새도 없었나 봐요? 뭐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

“좀 더 아파 보이긴 했어요. 진짜 병자처럼. 그게 다예요.”

몇 권의 책을 트레이에 얹은 여자는 이도하를 한 번 보고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런데 책장 사이를 막 빠져나가던 여자가 우뚝 멈춰 섰다. 왜 저래. 이도하는 별생각 없이 여자를 비껴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그도 멈칫하고 말았다. 아무도 없던 서고의 책상에 그가 앉아 있었다.

기다란 창으로 스며들어 오는 햇살을 받으면서, 시오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턱을 괸 그가 이도하를 보자 빙그레 웃었다. 다시 짧게 자른 검은 머리칼이 햇볕에 반짝인다. 이도하가 제 앞에 멈춰 선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귓가로 고개를 낮추었다. 시오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를 마주 보는 이도하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지금 본 건 잊어버려요. 여기엔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아무도 없고. 그럴 수 있죠?”

“네. 그럴 수 있죠.”

이도하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자는 곧장 트레이를 끌고 정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시오한을 지나쳐 서고를 나갔다. 서고의 문이 닫히는 걸 본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다가갔다. 둘만 남은 서고는 공기가 유영하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몹시 조용했다. 책상 위에 걸터앉는 작은 부딪힘마저 들릴 정도로.

“금방 왔네.”

다시 검게 물든 머리칼에 손을 대며 이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의 얼굴에 만족감이 번졌다.

“그대가 없으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정말 가녀리게 어깨까지 떤다. 이도하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누가 보면 정말로 영락없이 가녀린 미인으로 볼 모습이었다. 시오한은 눈에 띄게 키가 컸고 균형도 잘 잡혀 있었으나, 실제로 그 옷 아래에 감춰진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직접 만져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지도 못할 테고… 이도하도 그랬다. 그러니 이렇게 가증을 떨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이다.

“…어디 가서 그러지 마.”

이도하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생김새에 홀라당 넘어가 손이라도 댔다가는 누구든 몸이 조각조각 날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든 별로 좋지 않았다. 전혀 모르겠다는 듯 웃으며 시오한이 그의 손에 머리칼을 부볐다. 이도하가 손끝을 오므렸다. 약간 아찔한 느낌이었다.

망할. 진짜 가증스럽고 엄청나게 키스하고 싶다. 큰일 났네. 한탄하며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짧은 입맞춤 후, 이도하가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오한이 낮게 웃었다.

“생각처럼 그렇게 완전 돌아 버린 인간은 아닌 것 같아. 가엘이란 마법사 말이야. 당신 조상님이랑도 꽤 가깝게 지냈던 모양이던데. 학문적 견해가 맞았다나 어쨌다나.”

눈을 문지르며 이도하가 말했다. 느른한 정오의 햇빛이 쏟아지니 잠이 몰려왔다.

“근데 둘이 뭐 경쟁을 할 사이도 아니고. 하나는 평범한 마탑의 마법사에 하나는 귀한 댁 도련님이잖아. 게다가 그때 흔적에서도 봤지만 가엘은 다른 거 없어. 사는 거. 그 인간이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이었다고. 그래도 둘이 뭐든 통하는 게 있었다고 하면… 둘 다 맹약에 대해 아는 건 그렇다고 쳐도, 엘하시온을 죽일 이유가 도통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도하가 투덜거렸다. 둘 사이의 관계를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둘에게 직접 접근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 주변을 둘러 알아보려고 해도, 두 사람의 평판이 이렇게 극단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엘하시온은 무슨 긍정과 친화의 아이콘처럼 누구나 좋아하지만, 가엘은 완전히 그 반대였다.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별로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엘하시온 같은 포어 레펜스의 공자님이 왜 그런 마법사와 어울렸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연구실이 비어 있대.”

시오한이 일어서며 말했다.

“가엘이 궁으로 불려간 이후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는데… 어때?”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며 이도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궁금하긴 한데 또 일어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더니, 그가 딱 그랬다. 책상에서 슥 미끄러져 내려오는 이도하를 보는 시오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집에 갈까?”

“꼬시지 마, 변태야.”

“하하.”

마탑 내부는 마치 미로와 같았다. 이 길이 저 길인가 해서 가면 아니고, 전혀 아닌 것 같은 곳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으며 도대체 알 수 없는 곳에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건물을 이런 식으로 지었는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여기가 바로 괴짜들이 다 모인 곳입니다, 하고 보여 주는 것 같다. 시오한의 거의 육감에 가까운 방향감각이 아니었다면 이도하 혼자서는 죄다 부숴 버리지 않고는 길을 찾지 못할 곳이었다.

“개판이네.”

눈에 띄지 않게 가엘의 연구실에 들어선 이도하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한 사람도 병들겠다.”

그도 썩 정리하고 사는 편은 아니고, 깨끗하든 더럽든 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도하가 보기에도 이 조그만 연구실은 정말 개판이었다. 사방에 종이가 널려 있었고, 옷과 책과 각종 도구들은 상자 하나에 몰아넣고 최선을 다해 흔든 다음에 다 쏟아부어 놓은 것 같았다.

시오한이 발치에 걸리는 옷을 슥 밀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표정은 평온했으나 발놀림에서 우아한 혐오감이 느껴졌다. 슬쩍 웃은 이도하도 주변을 훑었다. 쓰레기장에서 잃어버린 영수증을 찾으라고 하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여기 글자는 무슨 훈민정음 읽는 기분이라….”

책상인지 옷 더미인지 산처럼 솟아 있는 무언가에서 한 뭉치의 종이를 찾아낸 이도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종이 더미를 거꾸로 뒤집었다가, 아예 옆으로 돌려 보았다.

“글씨도 개판이네.”

“어디.”

시오한이 그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도하가 그래도 가장 제자리인 것 같은 위치로 종이를 돌려 놓았다.

“‘인티리언이 말한… 풀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 봤지만 그건 그저 잡초에 지나지 않았다…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일지야?”

“글쎄, 이게 일지인지, 낙서인지….”

시오한이 팔을 뻗었다. 껴안듯 넘어오는 팔에 이도하가 잠깐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입을 벌렸다가, 그냥 닫는다. 그동안 시오한이 종이 몇 장을 더 들춰 보았다. 그러다가 그가 한곳에서 멈칫했다.

“‘포어 레펜스 공자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손끝이 흘려 쓴 문장 하나를 가리켰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기에는 졸면서 쓴 글씨 같았다. 통 알아보기가 힘들었으나, 문장 끝에 찍힌 점 세 개는 눈에 들어왔다. 점점 더 꾹 힘을 줘 눌러 찍은 것 같은 이 세 개의 점 중 가장 마지막 것은 번진 데다가, 옴폭 파여 있기까지 했다. 한참이나 그곳에 펜 끝을 대고 누르고 있었던 것처럼.

“끝이야?”

“응.”

그 뒤로 두어 장이 더 있었지만, 엘하시온이 거론된 문장은 없었다.

“뭔 낙서를 하다 말아.”

“여기, 화이람.”

시오한이 한쪽을 가리켰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옷, 뭔지도 모르겠는 각종 도구, 그리고 종이 더미와 쓰레기 사이에 그나마 비어 있는 곳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을 적당히 한쪽으로 밀어 놓은 것처럼 오른편으로 물건이 어지럽게 엉킨 채였다.

그리고 안이 텅 빈 머그잔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방금 찾아낸 종이 뭉치와는 다르게 비교적 깨끗하고 구김 없는 종이가 머그잔에 눌려 있다. 조그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이 종이를 팔랑거리며 흔들었다.

“…뭐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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