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엘하시온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언뜻 듣기에는 똑같은 말 같다.
“죽기 싫다… 죽기 싫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영.”
이올라가 까딱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엘하시온이 찡그린 눈썹을 긁적였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또 모르겠는, 애매하고 곤란한 얼굴이었다.
“세상엔 별 특기가 다 있으니까, 그런 기원으로 불렀다면 어떤 특기자가 불려 왔을지 알 수 없지.”
“하지만 이올라. 상처를 낫게 하거나, 병을 치료해 주거나, 그런 것 말고도 정말 죽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있어?”
“…아니.”
이올라가 대답했다.
“있어도 그런 사람은 아마 소환이 안 되겠지. 난 이올라를 소환하는 데도 죽을 뻔했잖아?”
엘하시온이 경쾌하게 말했다. 그때가 다시 생각났는지 이올라가 이마를 짚었다.
“목숨을 대가로 바치면, 목숨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턱을 괸 엘하시온이 겹겹이 겹쳐진 종이 위로 어지럽게 모양을 갖춘 거대한 소환진을 바라보았다. 좀 다른 방향으로 보면 뭐가 생각날까 싶어 그가 삐딱 고개를 기울였다.
“가엘이 악마를 소환하려고 한 건 아니었을 거야, 이올라. 자기가 뭘 하는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상관없었던 거겠지.”
음. 엘하시온은 무언으로 동의했다. 이올라의 말이 맞았다. 가엘도, 엘하시온도 마력으로 다른 세상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어떤 세계일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 그는 절박함이 무엇보다도 컸을 것이다. 그러니 그게 악마든, 그저 또 다른 세계의 사람이든, 자길 살려 주기만 한다면 사실 다 상관없었겠지.
“문제는 그래서 그게 정말 의미가 있었느냐는 거야. 그런 식으로 목숨을 담아낸 소환이 정말 뭔가 다른가, 하는 것. 하지만 그랬다면 왕이 네 아버지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테지. 불사는커녕 그 병이 낫기는 했는지가 더 의문이라고.”
이올라가 신랄하게 말했다. 턱을 괸 엘하시온은 소환진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조금 남은 젖살이 반죽인 양 뭉개져 밀려 올라간 얼굴은 뚱해 보이기도 했고, 느리게 깜빡거리는 눈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기도 했다. 황금색 눈동자 속 검고 동그란 동공만이 또렷하게 소환진을 향하고 있어, 그가 뭔가 생각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왕궁에 불려간 이후로 가엘은 전혀 소식이 없는걸.”
엘하시온이 말했다. 턱을 괴고서 말하니 발음이 뭉개져 꼭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시선은 여전히 소환진에 고정된 채였다.
“연락을 해 본 거야?”
“응. 다들 가엘이 악마를 불러냈다는데, 아무리 들어도 소환 같아서. 근데 무슨 사람을 죽여 피를 바쳤다고 하니까….”
그러나 왕궁으로 서신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도, 가엘을 만날 수는 없었다. 연락도 닿지 않았다. 가엘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그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고 한들, 물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엘하시온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이미 죽었을 수도 있어.”
“이올라….”
“미친 왕이잖아. 악마를 불렀느니 뭐니 해서 데리고 왔더니 영생을 이뤄 주지도 못하는 사기꾼 하나를 살려 둘 이유가 있겠어?”
엘하시온이 얼굴이 조금 더 뚱해졌다.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미간이 모이면서 몸까지 점점 더 둥글게 구겨진다. 보다 못한 이올라가 가서 엘하시온의 허리를 쿡 찔렀다. 악-! 엘하시온이 기겁을 하며 옆으로 뒹구르르 굴렀다. 똑바로 앉아. 이올라가 말했고, 엘하시온이 얌전히 좀 더 점잖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체 높은 공작가의 공자님다운 우아하고 품위 있는 자세였다. 이올라가 픽 웃었다.
“가엘은 똑똑하니까. 어쨌든 그가 누군가를 소환한 것만은 사실이고.”
비록 불사 같은 허황된 꿈을 이뤄 주지는 못했을지라도, 정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했다. 이전까지 왕에게 불사가 간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가능한 꿈이었다면, 가엘로 인해서 그게 실현 가능한 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포어 레펜스 공작에게 그런 왕명을 내렸다고 하면 몹시 납득할 만했다. 실패하면 싫은 소리나 해 대는 공작을 치워 버리는 것이고, 성공하면 좋고.
“어쨌든 결국 미친 왕한테 사기를 치고 있다는 소리잖아. 파리 목숨이네. 저 살자고 또 웬 애꿎은 목숨을 잡을지도 몰라.”
“…….”
엘하시온이 울상을 지었다.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이올라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눈치를 본 그녀가 말했다.
“…음, 엘. 네 아버지를 말하는 건 아니고.”
“아냐, 이올라. 아버지는 괜찮을 거야. 그냥 정말 앞으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삶에 대한 가엘의 욕망과 갈망을 엘하시온은 사실 상상하기 어려웠다. 가엘이 좀 우울하기는 해도 설마 누군가를 해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런 가엘이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미친 왕의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무슨 짓까지 할지는 과연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못 찾을 테지만, 나도 저쪽에서 가능한 한 기록을 뒤져 볼 테니까… 섣불리 행동하지 마, 엘. 엮이지 않는 게 좋겠어.”
“천 년 전에 그쪽에서 소환된 사람을 찾아보려고?”
엘하시온의 눈이 반짝였다. 이올라가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것도 그렇고… 좀 걸리는 것도 있어서. 기대하지는 마.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실망해도 돼.”
빙그레 웃는 엘하시온을 보며 이올라도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가야 할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엘하시온의 눈이 다시 소환진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잠시 망설인 그녀가 말했다.
“엘, 호기심이-.”
“호기심이 고양이도 죽인다고.”
벌써 여러 번 이 잔소리를 들은 엘하시온이 그녀의 말을 낚아챘다.
“계속 궁금했는데, 이올라. 왜 고양이야? 이해가 안 가서.”
“…아.”
그렇구나. 아무리 언어의 특혜가 있어도 무려 천 년의 시간이 어긋나 만난 인연이었다. 엘하시온이 이해를 못 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지 못했다. 이올라가 설명했다.
“내 세계에서는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는 말이 있거든.”
“진짜?”
“진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민담 같은 거야.”
“민담도 있구나.”
그렇게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이들이 잔뜩 있는 세계에도. 엘하시온이 조금 감탄했고, 이올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엘하시온은 그녀의 세계를 무슨 환상과 동화처럼 생각했지만, 그녀가 사는 세계도 사실 이곳과 별다를 것이 없다.
“목숨이 아홉 개나 있어도 호기심 때문에 죽는다고, 엘.”
“응, 조심할게. 걱정하지 마.”
엘하시온이 그녀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이올라의 얼핏 찌푸린 시선이 소환진으로 향한다. 그러나 금방 그녀의 형상은 흐려져, 푸른 알갱이로 흩어졌다. 엘하시온은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빛무리들이 사라질 때까지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소환진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내려간 그는 앞에 서서 물끄러미 소환진을 바라보다, 문득 종이 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밟힌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조금 흩어졌다. 엘하시온은 종이들을 밟으며 소환진의 중앙까지 걸어갔다. 가장 가운데 서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력… 피. 생명….”
탁탁, 엘하시온이 발을 굴러 보았다. 물끄러미 소환진을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까만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별이 흐드러지게 뜬 밤하늘에 어렴풋이 구름이 흘러가는 게 보인다. 황금색 눈동자가 묘하게 가늘어지는 순간-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엘하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머리까지 울렸다. 지금은 꽤 깊은 밤중이었고, 이 시간에 누군가 그의 문을 두드릴 일은 없었다. 엘하시온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저, 도련님. 궁에서 심부름꾼 아이가 왔어요.”
익숙한 사용인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긴장을 푼 엘하시온이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가 문을 열었다. 사용인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밤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런데 그 녀석이 내일 아침에 오라는데도 안 된다고 그러고, 정 그러면 서신을 전해 주겠다고 하는데도 직접 주지 않으면 자기는 정말 큰일 난다고 울어 대는 통에….”
“서신?”
“궁의 심부름꾼인 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누구 편지를 가져온 건지는 말을 안 해서 함부로 데리고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선에서 그냥 보내 버릴 수도 없고… 어떡할까요?”
왕궁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다양한 하인도 조수도 있다. 보통 고용인은 주인과 함께 드나들지만, 아닐 때도 많았다. 그런 경우 고용인들은 궁 출입증을 따로 가지고 다니곤 했다. 사용인이 말하는 아이도 그런 경우일 터였다. 엘하시온은 공작가의 공자이니만큼 궁에도 아는 이가 많으니, 사용인 입장에서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나르인가?”
“왕자님의 시동은 아니었습니다만….”
사용인이 말을 흘렸다. 왕자의 시동이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 그것도 확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데려올래?”
“예, 도련님.”
잠시 후 사용인이 데리고 온 아이는 정말 엘하시온도 처음 보는 아이였다. 12살쯤 된 것 같은 아이는 몹시 마르고 불안해 보였다. 울었다고 하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도 축축했다. 대체 누가 보낸 건지 감도 안 잡히던 차에, 엘하시온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내리깐 아이가 서신을 내밀었다. 얼마나 품에 꼭 안고 있었는지 꾸깃꾸깃해진 서신에는 따뜻한 온기가 묻어 있었다.
“……?”
인장도 찍혀 있지 않고 대충 찍어 누른 것 같은 왁스뿐이다. 서신을 뒤집은 엘하시온의 눈이 커졌다.
가엘 마제스.
서신은 그에게서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