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그대가 바라는 건 늘 참 소박하여서.”
“남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입술이 닿았다. 이번엔 좀 더 깊었다. 다시 사이로 파고든 허벅지가 아래에 닿는다. 이도하가 얕게 신음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바라는 건 늘 하나인데….”
시오한이 말했다.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가 등허리를 어루만지는 것 같아 절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시오한이 느리게 그 위를 핥았다. 다리 사이로는 시오한의 몸이 가득 파고들어 와 있었고, 한쪽 손은 깍지를 끼어 꼭 잡힌 채였다. 게다가 기운 몸으로 대충 식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으니 자세가 몹시 불안정했다. 이도하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입술이 도드라진 턱 선을 지분거리다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찌 소박하다 하겠어.”
“…당신이 생각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거면.”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시오한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추었다. 고작 이런 집, 고작 이런 평화, 고작 이런 것들. 사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누구든 보기에, 그는 그야말로 모든 걸 가진 완벽한 황제일 텐데. 그러니 시오한이 바라는 하나도, 소박했어야 할 바람인데.
“내가, 하필 네 위에 떨어져서.”
“응. 그대가 날 완전히 덮쳤지.”
이마를 맞대고 그가 조금 더 몸을 붙였다. 긴 속눈썹이 이도하의 눈꺼풀 위로 와 닿았다. 연한 살 위로 가볍게 쓸리며 간지럽힌다. 시야에 가득 찬 황금빛 눈동자가 다정하게 반짝였다.
“뭔지도 모르고 뭐든 그냥 바라고 있었는데….”
눈 밑, 이제는 존재조차 잊은 그 이름 위로, 시오한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대가 온 거야.”
“…세계 정복을 할 생각이었거든.”
잘게 입을 맞추던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음, 이도하가 그를 붙잡으며 잠깐 질끈 눈을 감았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와 빈틈없이 붙어 선 그가 그렇게 웃으니 몸이 흔들린 것이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좀 더 꽉 당겨 안으며 몸을 붙였다.
“진짠데. 엄청나게 재밌고 멋진 세계가 있다는데 난 못 간다잖아. 어, 이것 봐라. 한번 볼래? 그러면서. 거기선 내가 짱 먹어야지, 뭐 그런 심보였다고.”
“어렵지 않은 일이네.”
“어렵지 않기는. 다….”
다 말아먹을 뻔했는데. 이도하는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다른 손이 옷 아래로 들어와 허리를 어루만지며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빈집의 서늘한 냉기가 옷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와중에 손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그냥, 이대로 이곳에 있을까,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가 눈을 떴다. 시오한의 혀가 진득하게 입술 사이를 쓸었다. 입을 벌리자, 느릿하게 혀를 핥으며 뒤엉킨다. 황금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에서 그리 파고드니, 고개가 꺾인 이도하는 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같이 그가 제게로 가득 쏟아진다. 곧 입술이 떨어졌다. 달라붙어 있던 살갗이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다.
“이리 조용한걸.”
“…여기 망했잖아.”
이도하가 간신히 말했다.
“응, 그러니 말이야.”
이미 멸망한 왕국, 이미 죽은 사람들, 이미 지나간 시간. 결과가 정해진 과거. 그러나 환상도 기억도 아닌 채 실존하는 세상. 이도하가 옅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런 식으로 놓고 보니 꽤 솔깃하긴 했다.
엘하시온이니, 우르슬라니, 사실 그냥 다 나 몰라라 하면 그냥 남의 일로 끝나는 것이다. 커튼도 달고, 소파도 하나 훔쳐 온 다음 나란히 앉아 이런 고기 경단에 맥주나 한잔 하면서 그러는 것이다. 이야, 아주 임금이 미쳐 간다더라. 공작가에 난리가 났다더라. 그러든가 말든가 세상이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멀쩡히 굴러간다면, 맘 편히 다 놓아 버릴 수도 있겠다.
“혹하는데… 참자.”
황금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곧 그가 짧게 웃었다. 캄캄한 어둠 속이어선지, 꼭 씁쓸해하는 것 같다. 스치듯 찰나여서, 제대로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혼쭐날라. 사실 지금도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거든.”
마치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농땡이나 부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과 비슷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단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데도, 그냥 기분이 그랬다. 분주하고 치열하고, 다급하게 무언가에 닥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밤벌레의 울음소리나 들리는 이 고요도, 어수선한 이 빈집의 분위기도 그래서 영 생소한 것이다.
“안 될 건 또 뭐가 있겠어.”
그가 깊이 웃었다.
“왕은 영원을 욕심내고, 죄인들의 피로 점철된 감옥에서는 악마를 불러내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시대인데.”
다시 입술이 닿았다.
“좀 방탕하게 논다 한들.”
***
“다 됐다!”
끄악! 벌떡 일어나던 엘하시온이 허리를 붙잡았다. 한참을 엎드려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더니 목이며 허리며 무릎까지 아주 찌릿했다. 끙끙거리며 잠깐 신음한 뒤, 엘하시온은 신발을 훌러덩 벗어 버리고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와.”
바닥에 늘어진 것은 엄청나게 많은 종이였다. 누구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흘긋 보았더라면 나이 잘 먹은 점잖은 도련님이 이게 웬 유치한 장난이냐, 하고 타박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어지럽고 정신 사나운 낙서투성이 종이들이었다. 그러나 잘 보면,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아무렇게나 홱홱 그어 댄 것 같은 이 종이들은 모여서 아주 거대하고 복잡한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것 봐, 이올라. 정말 소환진이야!”
엘하시온이 외쳤다. 그가 달려가는 기세에 날아가 위치가 흐트러진 종이 몇 장을 바로 하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에 걸려 있던 짧은 갈색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안경 너머 옅은 푸른 눈동자가 조금 찌푸려졌다.
“정말이네.”
“봐. 악마 같은 게 아니라 이올라와 같은 세계의 존재가 틀림없다니까.”
엘하시온이 즐겁게 말했다. 몹시 뿌듯해하던 그는 싸늘하게 돌아오는 이올라의 눈길에 얼른 입술을 말아 넣으며 딴청을 부렸다. 이 종이들은 오늘 낮에 그가 탁본을 떠 온 것들이었다. 유령이 나타났다, 원혼이 영혼을 빨아 먹는다더라, 지옥문이 열려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사라진다더라, 하여간 별 희한한 소문이 다 돌고 있는 성문 밖 도리안의 그 지하 감옥에, 직접 가서.
그 지하 감옥에는 꽤 많은 죄수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들을 전부 죽이고 그 피를 바쳐 악마를 불러냈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이올라도 이미 들은 바였다. 그런데도 그곳에 갔다니. 진짜 악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식으로 나타난 이가 무엇이든, 제정신일 것 같지는 않으니 조심해라, 하던 이올라의 신신당부를 아주 깔끔하게 어긴 것이다.
엘하시온은 정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제가 직접 간 게 아니라 포어 레펜스의 훌륭한 기사인 무어 경에게 부탁을 했고, 저는 그냥 받은 것뿐이다 하고 둘이 입을 맞추면 이올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녀의 능력으로 시간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마력이 들었다. 엘하시온은 그녀를 잠깐 소환하는 것만도 간신히 해내고 있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괜히 그 쓸데없는 실험만 하지 않았더라면.
거대한 소환진을 보고 그놈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게 문제였다. 혹시 소환진의 크기도 소환에 영향을 주는가, 그게 정말 몹시 궁금해서 엘하시온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손바닥에다 겨우 들어갈, 아주 앙증맞은 크기의 소환진을 그리고 다시 기원을 담아 보았다. 매번 모이를 챙겨 주는 정원의 조그만 새가 이제 그만 제 손바닥에 한 번쯤은 올라오게 해 달라는 아주 소박하고 몹시 진실된 기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엘하시온이 알아낸 것은 소환진의 크기 따위는 소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이미 누군가를 불러낸 제가 기원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불러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앙증맞은 소환진에서 불려 나온 것은 새의 요정 따위가 아니라 그저 이올라였으니까. 그것도, 약속된 시간이 아닌 때에 갑작스레 소환되어 놀란 이올라. 그리고 곧 엘하시온이 자기가 당부했던 모든 걸 어기고 충동적인 실험까지 감행했다는 것에 화가 난 이올라.
호기심은 고양이도 죽인다며 어찌나 타박을 하던지. 엘하시온은 최대한 얌전하고 공손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양이도 죽인다는 말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할 길이 없었지만. 아무튼 엘하시온은 다시는 또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겠다, 하고 맹세해야 했다.
“정말 천 년 전에 계약자가 있었던 거구나.”
이올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약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설마 했더니.
“애초에 그 이론은 내가 처음 제시한 이론이었는걸. 그럼 이올라도 악마게?”
다시 빙그레 웃음을 띠며 엘하시온이 말했다. 전부 엘하시온 그가 떠올린 것들이었다. 다른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론도, 존재가 밝혀지기만 했을 뿐 통 어디에 쓸 수 있는 건지 알아내지 못한 마력으로 그 세계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론도. 다들 그를 똑똑하며 돈도 시간도 남아도니 심심해 어쩔 줄 모르는 괴짜 공자님 정도로 취급해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던 건 가엘 마제스뿐이었지만.
“악마라고 뿔이 달리고 날개가 달린 괴물이 아니야, 엘.”
이올라가 말했다.
“천 년 전의 그 특기자는 난데없이 전혀 모르는 세상으로 냅다 끌려온 건데, 계약-.”
멈칫한 그녀가 말을 고쳤다.
“부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를 거란 생각을 해야지.”
“가엘이….”
으음. 잠깐 적절한 표현을 고민한 엘하시온이 말했다. 가엘- 그 이름을 들은 이올라가 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거슬리는 것처럼.
“좀 우울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도탄에 빠트릴 만한 사람은 아닌걸. 그것도 아파서 그런 거고. 평생을 병과 함께 살았다고 했으니까.”
“죄수라지만 남의 목숨을 실험 쥐 취급한 인간이 그냥 좀 우울? 조금 더 우울하면 나라도 바치겠는걸.”
이올라가 코웃음을 쳤다. 냉소가 어찌나 찬지 방 안에 한기가 다 도는 것 같다. 게다가 과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지라, 엘하시온도 잠시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곧 제가 퍽 순진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여기서 설마 그 가엘 마제스가- 그 소심하고 조용한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다, 하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고작 반나절 전에 그 지하 감옥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온 참이었다. 피와 시체들은 전부 청소가 되어 없었지만, 비릿한 피 냄새는 여전히 유령처럼 축축하게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지. 침대에 풀썩 주저앉은 엘하시온이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올라, 가엘의 소원은 분명 ‘살고 싶다’였을 거야. 그럼 소환된 이는 분명 누군가를 살려 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악마라고 불릴 만한 짓을 할 수 있겠어?”
“‘죽고 싶지 않다’였을 수도 있어, 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