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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86화 (185/250)

186화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나라에서 평화를 찾다니. 이도하가 제풀에 혼자 픽 웃었다.

“악마 숭배에 마녀사냥이라더니.”

사람들이 약간 정신 나간 것처럼 모든 일에 편견 없이 재미만 찾는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세상이 활활 불타오르는 그런 느낌은 확실히 아니다.

“악마가 불사를 이뤄 준 것 같지도 않지?”

이도하의 손끝을 닦아 주며 시오한이 태연히 말했다. 그랬더라면 왕이 포어 레펜스 공작에게 그런 왕명을 내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불사 같은 게 가능하면 인소더블이게.”

그런 특기를 가지고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말 인소더블이다. 더군다나 타인을 불사로 만들어 주는 특기를 가졌더라면, 세상이 정말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아무리 세상 무지하고 무관심하게 살았던 저도 몰랐을 리 없고.

“치료가 가능한 특기자일 것 같은데. 보아하니 이 시대엔 아직 계약자도, 계약주도 없잖아. 상처를 치료하거나 병을 낫게 하는 특기를 가졌다면 진짜 ‘마법’처럼 보일 거 아니야. 정말 불사 같은 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줬을 거고.”

가엘. 이도하가 지하 감옥의 흔적 속에서 본 소환주는 정말로 간절하게, 그저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고, 그저 살고 싶어 했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건데, 이런 식이라면 그 이유가 병이나 상처였을 가능성이 컸다. 이도하는 다시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차갑고 싸늘한, 음습한 공기. 역겨운 피 냄새. 살려 달라고 빌던 갈라진 목소리, 붉게 어른거리던 촛불. 바닥에 대고 엎드린 몸뚱이. 철컹- 쇠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 낯선 바람 냄새, 당혹과 경악, 불신으로 찬 푸른 눈동자.

‘당신은 뭐요?’

“…어.”

문득 무언가 깨달은 이도하가 일어섰다. 푸른 눈동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마주쳤던 그 푸른 눈동자를, 그는 본 기억이 있었다. 헐, 이도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새끼였어.”

이도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건, 우르슬라의 기억 속이었다. 번뜩이는 칼날, 절규, 꽃잎처럼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 그 모든 것을 차갑게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지하 감옥의 흔적 속에서 보았던 그 푸른 눈과 겹쳐진다. 분명 같다. 동일인이었다. 일그러지고 뒤엉켜 아무것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그 기억 속에서 본, 분명 그 눈이다!

“이 새끼야, 시오한. 엘하시온을 죽인 게 이 가엘인지 뭔지 하는 놈의 계약자라고!”

이도하가 탁탁 제 머리를 두드리며 멍한 정신으로 말했다. 돌대가린가? 어떻게 여태 그걸 몰랐을 수 있지? 물론 그때 제가 영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다. 그래도 이도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한둘도 아니니 다 비슷비슷한 게 아니냐고 합리화할 수도 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아주 똑같았다. 당혹감에 차 있던 푸른 눈동자. 번뜩이는 칼날이 비치던- 차가운 푸른 눈동자.

“와. 뭐지.”

생각에 잠길 때 그가 늘 그러하듯, 시오한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제 머리를 두드리는 이도하의 손을 잡아 내리며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계약자가 또 다른 계약주를 죽이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만… 교묘하네.”

시오한이 말했다. 아직 계약주도, 계약자도 없었던 시대. 다른 세계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시대에 나타난 최초의 계약주, 아주 먼 미래로부터 소환되어 온 또 다른 계약자. 그들 사이에 얽힌 맹약. 황금색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았으나, 잠깐뿐이었다. 어느새 이도하의 앞에 선 그는 곧 빙그레 웃으며 혼란에 빠진 이도하의 턱 밑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정신 차리라는 듯이.

“그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내 조상님을 몰래 훔쳐보는 게 낫겠는걸.”

“어?”

가엘이라는 그 마법사는 그저 살고 싶어 했고, 그뿐이었다. 그러니 이용한 게 그의 피건 남의 피건 하여간 그 기원으로 불려 온 계약자도 그에 상응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런데 그런 이유로 불려 온 계약자가 남의 계약주를 죽일 이유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이 새낀 진짜 뭐지? 이도하는 손발이 다 근질근질했다. 그 가엘이라는 마법사가 지금 이 제도 어딘가에 실존하고 있다. 그걸 아는 마당에 이렇게 궁리하고 있으려니 훌륭한 한국인인 이도하는 정말 속이 다 터질 지경이었다.

“화이람, 이제 곧 다 일어날 일이야.”

시동이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른 이도하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시오한이 말했다.

“설마 날 혼자 둘 생각은 아니지?”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이도하가 되물었다.

“난 그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엉?”

시오한이 아주 가련한 얼굴로 말했다. 알면서도 껌뻑 속아 넘어갈 얼굴이다. 이도하가 정신을 차렸다. 과연, 이건 문제였다. 천 년 전으로 일단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게 짠, 하고 해결될 것 같았지만 이 일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당사자의 기억을 읽는 것과 다르게, 이렇게 되면 모든 걸 직접 발로 뛰어서 알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둘이 찢어져 가엘이라는 마법사와 엘하시온에게 각각 붙는 게 가장 효율적이긴 하다. 뭐든 양쪽 말은 다 들어봐야 한다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이 산산조각 난 퍼즐을 제대로 끼워 맞추자면 그게 가장 이상적일 테였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럴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시오한과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특기를 쓰지 못하는 저는 정말 24살 대학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도하는 빈말로도 제가 생활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으며, 일반적인 24살 대학생이 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다. 뭘 알아내기는커녕 1시간도 안 돼서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들켜 큰일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도하가 덥석 시오한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아니, 내가 안 되지. 어딜 가.”

흘긋, 제 옷깃을 내려다본 시오한이 눈을 휘었다.

“근데 무슨 수로?”

하나는 귀하신 몸이 돼서 왕궁에나 가야 볼 수 있다지, 하나는 왕 다음가는 공작가의 금지옥엽이지. 게다가 우르슬라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이도하는 제아무리 시오한이라고 해도 없는 사람처럼 그 둘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봤다. 생활력이 없기로 따지면 시오한은 저보다도 바닥이고, 애초에 머리를 잘라도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다.

“대체 왜 그냥 한 명이라도 옆집 아저씨면 안 되는 건데, 응? 아까 그 술집 사장님, 그 전의 옷 가게 사장님, 뭐 이런 사람들 말이야.”

어떻게 된 게 하나라도 쉬운 게 없다. 창의력이라고는 없는 이도하는 특기 없이 그 둘에게 들키지 않고 모든 걸 알아낼 어떤 기발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24살, 남자. 특기를 빼면 저는 정말 그게 전부인 것이다. 그게, 그렇게 되길 엄청 바라기는 했으나… 지금은 정말 아니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특기가 똥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정말 통탄할 일이었다.

“진짜 쥐뿔도 없네.”

“화이람, 날 가지고서 어찌 그런 말을 해.”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깜깜한 밤에 곱게 웃으니, 황금색 눈동자가 유독 두드러진다. 별이 밝게 뜬 하늘에는 달이 없었는데,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러니까 다들 홀리지. 이도하가 답삭 그를 끌어안았다. 난데없이 어리광을 좀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와락 달려드는 기세에 시오한이 그를 받아 안으며 몇 발자국 물러섰다.

“형, 도와주라.”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화이람. 말했지만, 그대 없이 내가 무엇을 하겠어.”

“안 된다니까.”

“그대가 간과한 게 있어.”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황금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천 년 전이라고 해도, 이곳은 내 세계잖아.”

후- 시오한이 가볍게 입김을 불었다. 앞머리가 날리고, 입김이 스친 이도하의 눈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다 사라졌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시오한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다시 손을 밀어 넣으며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섰다. 이도하는 아주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손가락 사이로 타인의 온기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처럼, 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하는 제 어떤 감각 사이로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매끄럽게 타고 들어오는 느낌.

등줄기에 솜털이 오소소 돋고, 묘한 열기가 감돌아 차올랐다. 이도하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싸늘한 냉기가 흩어지며 순간적으로 반짝거렸다. 이도하의 특기였고, 그에게서 발동된 것이었지만, 그가 한 것은 아니었다.

“난 그대의 계약주고. 사실 마력 조절은 내 의무지. 그대의 말처럼 내키는 대로 힘을 쓰는 건 조심해야겠지만… 가벼운 정도야.”

“…여태 한 적 없잖아.”

저가 물정 모르는 애처럼 다 끌어다 써도 아무 말이 없더니. 제게 오는 마력을 다시 다 돌려주는 마당에 특기를 쓰면 어찌 될지 모른다. 그래서 특기를 아예 쓰지 않기로 했던 이도하는 왜 또 위험한 짓을 하느냐, 하는 타박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섬세한 마력 조절 같은 건 시오한이나 되어야 가능했다. 게다가 이렇게… 그가 제 특기를 조절하는 것까지 가능할 거라고는 정말 생각 못 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알는지.”

시오한이 깊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이도하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 진짜 날 망종으로 만들고 있는 거라니까.”

“얼마든지.”

시오한이 말했다. 그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섰다.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물러서다, 다시 식탁에 걸터앉게 되었다. 겨우 조금 낮아졌을 뿐인데, 반 뼘의 차이가 훌쩍 늘어났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어둠, 까만 머리, 마치 특기자들의 섬광처럼- 기이한 빛을 머금은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하다.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의 시선이 그의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역시 검은색은 아니다.”

이도하가 말했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한 손을 올렸다. 손끝이 대충 뻗친 머리칼에 닿는 순간, 출렁- 황금색 머리칼이 이도하에게로 쏟아졌다. 빛이라고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주 연약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잠깐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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