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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85화 (184/250)

185화

“가엘이요? 옛날이라면 모를까, 요즘에는 귀한 몸이 되셔서 왕궁에나 가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쉽다. 주인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1년 전까지만 해도 가엘은 이 펍에서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렇구나. 두 남자는 잠깐 또 눈짓을 나누었다. 곧 까만 눈의 남자가 조금 상냥하게 웃으며 주인장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보란다. 뭔가 또 흥미로운 얘기일까 싶어, 주인장이 몸을 낮추고 슬금슬금 다가갔다. 귀를 가져다 대는 척하며 둘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려고 하는데, 별안간 튀어나온 손이 그의 멱살을 확 틀어잡았다. 억-! 바 위로 몸을 낮추고 있던 주인장은 거의 그 위에 엎어지다시피 했다.

“우리 친절한 사장님, 이것저것 얘기해 줘서 고마운데… 우리 얘기는 안 했으면 참 좋겠다. 어때요?”

머리 위에서 남자가 속삭였다. 검은 눈의 남자였다. 머리꼭지와 귓가로 입김이 느껴졌고, 그건 꼭 맹수의 아가리 앞에 머리를 들이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등골이 주뼛 서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키다 훤칠하긴 하지만 떡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것도 아니며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제제제제가 뭐, 뭐, 뭘 말하게요, 전 아, 아무것도 모릅니다, 몰라요!”

주인장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그는 정말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 까만 눈의 남자를 화이람, 황금빛 눈의 남자를 시오한이라고 서로가 부르는 걸 듣긴 했지만, 시오한이라는 남자가 포어 레펜스가의 금안과 꼭 닮은 황금색 눈동자를 갖고 있다는 걸 보긴 했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렇죠, 아무것도 모르죠. 우린 여기에 온 적도 없는데 사장님이 뭘 알겠어요, 맞죠?”

“마, 마,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죠.”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이 풀렸다. 그러고도 등골이 시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인장은 엎어진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등을 탁탁 두드려 주었다.

“그럼요. 혹시라도 어디서든 이상한 소문이 들리거나, 뭐 하여간 비슷한 얘기가 들리면… 대가리 깨 버릴 거니까.”

부드러운 말에 무서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제가 얘기를 안 해도 이 둘을 여기서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물론 저만큼 가까이서 본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이 둘이 여기 잠깐 앉아 있는 동안에만 시비와 수작이 걸린 게 다섯 번인데! 그리 소동을 일으켜 놓고 뭘 여기에 온 적이 없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매우 맞을 것 같아, 주인장은 허겁지겁 고개만 끄덕였다. 잘 먹었어요. 다 맛있네. 엎어진 주인장의 어깨를 잡고 손수 일으켜 준 남자가 말했다. 그는 가볍게 손까지 흔들어 주고는 펍을 나섰는데, 당연히 돈은 내지 않은 채였다.

“하여간 그놈의 입이 방정이지.”

펍 바깥은 이미 까맣게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달이 없는 하늘에는 별이 아주 흐드러지게 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까만 눈의 남자- 이도하가 말했다. 착잡한 어투였다.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세상이 다 똑같다더니. 천 년 전이래도 어째 다른 게 없다. 이 펍의 주인은 가벼운 입만큼이나 표정도 어찌나 솔직한지, 생각하는 게 아주 눈에 훤하게 보였다. 요령 없이 물어 대는데도 이놈들은 뭔가 하는 관심 따위도 없어 보였다. 저래서 제 명에 살려나 모르겠다.

“가엘이라는 마법사 말이야. 맞는 것 같지?”

이도하가 말했다. 입김이 뿌옇게 피어올라 검은 하늘로 흩어졌다.

“그 지하 감옥에 있었던 소환진의 주인.”

우르슬라의 소환진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천 년 전의 흔적 속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왔던 또 다른 계약주. 어쩌면 최초의 계약주일지도 모르는 사람. 불사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악마를 불러냈다는 마법사. 차가운 냉기와 코를 찌르는 피 냄새 속에서 울부짖고 있던 사람.

진짜 기분 이상하네. 이도하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우르슬라를 보았을 때를 빼면 저와 시오한이 천 년 전의 시간 속으로 돌아와 있다는 게 딱히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오랜 흔적으로만 읽었던 이가, 흔적에만 지나지 않고 정말로 이 시간 속 어딘가에 이름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화석으로만 접하던 공룡을 실제로 마주하면 이런 기분이 들려나.

“그대의 말대로네.”

옆에 선 시오한이 말했다. 별이 총총 뜬 하늘을 올려다보며 슬쩍 눈길만 돌려 이도하를 본다. 이전에 소환진의 흔적을 읽은 이도하가 했던 추측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가 기억 속에서 읽었던 그 피 냄새는 소환주 본인의 것이 아니라, 희생시킨 감옥 안 죄수들의 것이 아닌가 했던.

최초의 계약은, 어쩌면 정말로 악마를 기원하는 소원이 아니었을까 했던.

그리고 남의 목숨을 바쳐 가며 제 목숨을 살려 달라는 그 기원에 불려 온 것이 바로 제 세상의 특기자였던 것이다.

“…참 나.”

악마라. 그럴 수도 있겠다. 착잡한 한숨을 내쉬는데, 별안간 시야가 가려졌다. 어느새 시오한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밤하늘을 뒤로하고 그를 바라본다. 검게 물들인 짧은 머리칼이 밤바람에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그가 이도하의 손을 잡더니 깍지를 끼고 제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도하가 잠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순정만화 같은 짓이냐. 이도하가 습관처럼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밤중이라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뭐, 본다 한들 어쩔 것인가. 천 년 전인데. 이도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화이람, 나 해 보고 싶은 게 있었어.”

“뭔데?”

의외의 말에 이도하가 되물었다. 시오한이 눈을 휘었다.

***

“…….”

이야. 이도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냥 이렇게 감탄하고 말았다. 품에 이불과 시트, 베개까지 각종 침구류를 안고 이렇게 있으려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이제라도 말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식탁 위에 각종 먹을 것들을 우르르 내려놓는 시오한은 정말로 신이 나 보였으므로, 아무렴 다 어떤가 싶기도 했다.

“나 이런 거 본 적 있는데.”

“빈집 털이를?”

빈집 털이를 하는 중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구나. 엄밀히 말해서 이걸 빈집 ‘털이’라고 해야 할지는 좀 애매하지만. 시오한이 고작 맥주 몇 모금으로 취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나, 어쨌든 이도하는 그가 매우 제정신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박물관 털이. 거긴 가출한 남매였거든. 갈 데가 없으니 박물관 침대에서 막 자고 그러더라고. 저거 완전 난놈들이다 했었는데.”

그게 어렸을 때 봤던 영화였던가, 책이었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다만 박물관에서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만은 아주 인상 깊었다. 그런데 그 빈집털이를 제 황제가 할 줄이야. 게다가 여긴 그 커다란 박물관도 아니고, 남매가 잤던 것처럼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데다가 역사도 깊은 침대도 없었다. 침구류를 안은 이도하가 슬쩍 몸을 기울여 들여다보니, 작은 방 안에 있는 침대는 제 침대만큼이나 소박했다.

“난놈이라고 하면 나만큼 난놈이 또 있겠어?”

“그거야….”

이도하가 한번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딱 그만큼 평범하고 소박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벽은 목재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었고, 바닥은 조금 삐걱거렸다. 식탁에 의자, 침대, 선반까지 간단한 가구들은 갖춰져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렇긴 하지.”

이도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시오한이 뭔가를 잡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우르르 침구류를 쏟아 낸 뒤에 가서 보니, 그는 조그만 종이 상자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 상자를 정확히 오백으로 등분하라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하고 해낼 사람이 또 왜 이런 데서 헤매고 있냐. 진짜 보통은 아니다.

보다 못해 상자를 빼앗아 든 이도하가 포장을 뜯었다. 뭔가 했더니 동그란 고기 경단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천 년 전에도 포장 음식은 있다. 이도하가 하나를 손으로 집어 두리번거리는 시오한의 입에 넣어 주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먹으면서도 시오한이 움찔 놀랐다.

“뭐 찾아?”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을 텐데. 그러나 고개를 흔든 시오한은 아주 생소한 얼굴로 이 경단을 집어 올리더니, 아주 즐겁게 이도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짭짤하고 달달하게 간이 되어 제법 맛이 있다. 우물거리며 식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이도하가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도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데, 휑한 데다가 뭘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훔쳐 와 어수선하기까지 하니 꼭 이사를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집은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었다. 이도하의 세계식으로 표현하자면, 미분양 아파트쯤 될 것이었다. 이 시간에 와서 사기도 치고 도둑질도 하고 아주 줄기차게 뭘 훔치게 되더니 이제 빈 집에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집이 갖고 싶다’고 하는 게 무슨 말인가 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했는데 이것도 썩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살살 고개를 든다.

집이 필요하긴 하지. 왕이 공작에게 준 시간이 120일이라고 했고, 그중 50여 일이 지났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앞으로 최대 70일 남짓이 남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매번 여관 신세를 지는 것도 꽤 눈에 띄는 일이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여전히 빈털터리였다.

이도하의 입에 경단을 하나 더 넣어 주고, 제 입에도 하나 넣은 시오한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헝겊으로 손을 닦으며 옆에 와 걸터앉았다. 휑한 거실 너머 커튼 하나 없는 창밖으로 커튼이 쳐진 옆집이 보였다. 그 너머로 깜깜한 하늘도, 가득 뜬 별도 보였다. 지붕이 드리워지니 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저 조그만 것들도 빛이라고 창문 모양의 그림자가 생겼다.

“…이럴 줄은 몰랐네.”

이도하가 말했다. 찌르륵, 찌르륵, 곤충들 우는 소리가 평화롭다. 이도하는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해졌다. 앙그라엘. 천 년 전에 멸망한, 이름조차 잊힌 왕국. 왕은 불사를 꿈꾸다 아들과 딸을 죽이고, 악마 숭배와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절. 무슨 세기말적 느낌이 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한적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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