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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84화 (183/250)

184화

어느새 집중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까만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가 제 곁의 남자를 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의 남자가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느릿하게 주인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속눈썹 사이로 빛을 머금은 것 같은 눈동자가 주인장을 보았다.

어라. 주인장은 기시감을 느꼈다. 금안이 드물기는 해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빛을 머금은 것 같은 저 독특한 빛깔을 그는 또 본 적이 있었다. 저 눈은 분명 포어 레펜스의….

“그 마법사의 이름이 뭐지?”

황금빛 눈의 남자가 물었다. 주인장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그, 아마 그게….”

뭐였더라. 분명히 알고 있는데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 황제가 불러올린 마탑의 그 마법사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제도에서 나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었다. 이 거리에서는 알음알음 유명했고, 임금의 명으로 불려 올라간 이후로는 더 유명해졌다. 그는 두어 번이지만 이 펍에 온 적도 있었고, 주인장도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왜소한 몸집에 삐쩍 마른 몸,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칼에 바랜 청동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뭐였더라, 이름이. 이름이….

“가엘!”

마침내 기억해 낸 주인장이 말했다.

“가엘이에요. 가엘 마제스.”

“가엘?”

검은 눈의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가엘? 남자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뭔가 찝찝하다는 기색이자, 황금색 눈동자의 남자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황금색 눈동자는 포어 레펜스의 공자님이랑 참 닮았다, 하는 생각을 무심코 하던 주인장이 화들짝 놀랐다. 맞아, 포어 레펜스! 무심결에 생각하고 보니 생김새도 무척 닮은 것이다.

포어 레펜스의 공자님이 조금 더 여리고 막 핀 꽃처럼 어여쁘게 아름답다면, 이 남자는 그것보다 장대하고 장엄한 뭔가가 있었다. 걸리는 점은 검은 머리라는 것뿐. 포어 레펜스는 공작가의 명성 외에도 금발과 금안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다. 황금의 가호를 받는다는 칭호가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이, 어떤 가문의 누구와 혼인을 하든 포어 레펜스의 이름을 달고 태어나는 이들은 반드시 금발에 금안을 지녔다. 검은 머리칼은….

주인장은 찬물에 찰싹 뺨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 공명정대하고 고지식한 포어 레펜스 공작이 공작 부인을 두고 혼외자를 가졌을 리는 없지만, 게다가 저렇게나 장성한 혼외자를 두었을 리는 없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혹시나, 설마? 그렇다면 이건 정말 엄청난 이야깃거리임이 분명했다! 금발이 아니니 포어 레펜스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저 독특한 황금빛 눈동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포어 레펜스의 피를 잇지 않고서는 얻는 게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다. 맞으면 정말 대박이고, 아니면 뭐, 아닌 것이다. 한바탕 재미있는 일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주인장은 신이 났다.

“여보세요. 사장님?”

작은 목소리로 옆의 남자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검은 눈의 남자가 주인장을 불렀다.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에 벌써 들떠 있던 주인장이 얼른 대답했다.

“예, 예! 말씀하시죠!”

“왜 악마래요? 뭐, 뿔이라도 달렸나?”

“그야!”

주변의 눈치를 본 주인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리안 평원의 지하 감옥 말이에요, 거기 있던 죄수들이 죄다 죽었다잖아요. 물론 도리안 감옥의 죄수들이야 마탑에서 실험하려고 모아 놓은 죄수들이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 한 번에 다 죽었다는 건 좀 섬뜩하죠. 바닥에 피가 얼마나 질척했는지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던데. 그렇게 해서 불러낼 게 달리 또 뭐가 있었겠어요? 진짜 뭐가 나오긴 했대요. 다른 세계의 존재 말이에요!”

공작이 간언을 올리기 전, 그래서 임금으로부터 지킬 수 없는 왕명을 받기 전 온 앙그라엘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게 바로 이 이야기였다. 소문은 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진짜 뿔이 달리고 손톱이 뾰족하더라,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 사람이랑 아주 똑같이 생겼더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 가엘이 불러냈다는 어떤 존재를 진짜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무튼 도리안 감옥이 피바다가 되었더라 하는 것만은 진짜였다. 감옥의 관리인이 잔뜩 겁에 질려 창백해진 채 성에 들려다 그를 이상하게 생각한 성문의 경비대에게 붙잡혀 털어놓은 일이니. 검은 눈의 남자가 묘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장은 그 눈 밑에 새겨진 묘한 글씨에 잠시 시선을 사로잡혔다. 가늘게 새겨진 글씨가 몹시 독특하다.

“그런 일이 흔해요? 마법사들이 악마를 불러낸다거나, 뭐 그런 일이요.”

“예? 아유, 그랬으면 가엘이 임금님에게 불려갔게요? 마법사들이 워낙에 호기심도 많고 별짓을 다 하니까, 사실 아무도 모르기는 하죠. 연구실에서 마법사들이 뭘 하는지는. 그놈의 마법을 가능하게 해 보겠다고 손대면 안 되는 곳까지 손을 대서 언젠가 한번 일을 칠 거라는 얘기는 있어요. 진리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런 걸 마음대로 건드려 보겠다고 그러니까 아무렴, 그렇지 않겠어요?”

검은 눈의 남자가 조금 인상을 썼다. 별로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 남자가 아무래도 마법사랑 무슨 일인가 있었던가 보다, 하며 주인장이 잠깐 눈치를 보았다. 늘 북적이는 이 펍에서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고 술에 취하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그 많은 이야기들은 대다수 주인장의 귀로 들어가 다시 입으로 나왔다. 남자가 무엇을 물어보든 그가 해 줄 수 있는 얘기는 몹시 많았다.

그런데 황금빛 눈의 남자가, 심기가 좀 불편해진 것 같은 이 남자에게로 손을 뻗어 턱 아래를 받치더니 고개를 숙였다. 까만 눈을 한 남자의 얼굴이 가려지고 동그란 검은색 뒤통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억! 주인장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소리 없는 술렁임이 한차례 펍을 휩쓸었다.

주인장은 여기저기서 의자가 들썩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아주 가까이서 꼭 뭔가 속삭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입을 맞춘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는 분명히 둘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을 것이다.

남자가 고개를 드는 순간 주인장은 가벼운 마찰음 소리를 들은 게 분명히 착각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얼굴이 드러난 까만 눈의 남자는 옅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할 말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줄을 서 있었는데, 주인장은 모든 말을 잃고 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렸다. 까만 눈의 남자가 다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웃음기라고는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전이 잠깐 착각이었던 것처럼 남자의 독특한 까만 눈동자는 무심하고 무섭기만 했다.

“먹을 건 없나?”

황금색 눈의 남자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가벼운 안줏거리를 원하는 건지, 아니면 제대로 된 식사거리를 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냥 알아서 눈치껏 갖다 바쳐야 할 것 같다. 주인장은 저도 모르게 잽싸게 움직여 주전부리를 내왔다. 밀가루 반죽을 잘게 뜯어 튀긴 데다가 꿀을 바르고 설탕을 뿌린 흔한 안줏거리였다. 주문을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주인장은 대령했다. 남자가 그걸 가볍게 집어 까만 눈을 한 남자의 입에 넣어 준다.

“그 포어 레펜스의 첫째 공자님도 마법사라는 얘기가 있던데.”

자연스럽게 이 과자를 받아먹으며, 까만 눈의 남자가 말했다. 홀린 듯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주인장은 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인장이 한껏 몸을 낮췄다.

“그 마녀 얘기를 듣고 그러시는군요?! 그 얘기는 정말 조심해야 해요, 공작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 사달이 나거든요.”

그러면서도 주인장은 흥미진진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포어 레펜스 공작이 임금으로부터 불사의 방법을 찾아오란 왕명을 받았다는 소식이 벌써 한철 뉴스가 된 건, 바로 이 이야기 때문이었다. 금지옥엽 귀한 포어 레펜스의 천재 공자님이 가문을 구하려고 어디선가 마녀를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

“공자님이 마법사라고 떠들어 대는 것들은 뭘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주인장이 으스대며 말했다. 그는 그 포어 레펜스의 공자님과 제법 친한 사이라고 자부하고 다녔다. 말도 몇 번 섞어 봤고, 실제로 종종 이 펍에 다녀가기도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공자님이야 우리 같은 것들은 이해도 못 할 기재(奇才)이신 데다가, 워낙에 궁금한 것도 호기심도 많으니 마법쯤이야 취미로 하시는 수준이라니까요. 마법사들이랑 잘 어울리시기는 하는데, 아무튼 마법사라고 할 수는 없죠. 공자님이야 공작가를 이어야지.

그런데 왜 그런 얘기가 도냐 하면, 공작가에서 일하는 정원사 랜콕이 나무의 가지를 치다가 언뜻 봤다는 거예요. 공자님 방에 푸른빛이 번뜩이더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공자님 방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 뭔가 눈짓이 오갔다. 보통 이 대목에서는 다들 좀 더 격한 반응을 보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시시한 반응에 주인장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들이 눈짓을 나누는 모습이 꽤 멋져 보였으므로 일단 이야기를 이었다.

“글쎄 그냥 갑자기, 번쩍, 하고요. 혹시나 잘못 봤나 싶어서 여기저기 슬쩍 물어봤는데, 공작저에 아무도 그런 여자가 오가는 걸 본 사람이 없다 그랬다지 뭡니까? 어우.”

소름이 돋는다는 듯 주인장이 팔을 쓸어 올리며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헛것을 봤나 하기도 했다는데, 제 눈으로 똑똑히 본 걸 어떻게 잊겠어요. 그 푸른빛이 눈에 선하다 하더라고요. 애초에 갑자기 웬 푸른빛이 번쩍이기에 본 거라고. 그러니 그런 소문이 도는 거죠. 공자님이 마법을 관심이 많으시기도 하고, 마법사들과도 어울리시니, 공작가를 구하려고 마녀를 부른 거라고 말이에요. 악마도 불러냈다는데 마녀가 뭐 대수겠어요.”

“그러니까… 가엘이라는 마법사가 악마를 불러내서 임금님에게 불려갔고, 공작이 왕명을 받았고, 그다음에 공자가 마녀를 불러냈다고?”

까만 눈의 남자가 물었다. 주인장이 짝, 손뼉을 쳤다.

“그렇죠!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두고 요새 제도가 아주 떠들썩하답니다.”

까만 눈의 남자가 흐음, 하더니 옆의 남자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 가엘이라는 마법사, 그 사람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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