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내게 어디까지 허락해 주려고 그래?”
“…허락이 어디 있어.”
이도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는 몰라.”
시오한이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도하는 약간 정신이 들어 그를 밀었다. 조금 저항하는가 싶던 시오한이 순순히 밀려났다. 그는 좀 놀라고 말았다. 시오한의 눈가가 발갛게 되어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질거리는 게 꼭 물기가 어린 것 같다. 웃고 있었으나,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어지간히 알걸.”
까딱, 고개를 기울인 이도하가 쪽- 입을 맞추며 말했다. 떨어지는 입술을 따라와 가볍게 물었다 놓는다. 코앞에 보이는 시오한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가 눈을 감았다. 이마가 닿았다.
“난 당신 거고, 당신은 내 거고, 그런 거지 뭐. 이제 완전히.”
이도하가 말했다. 그러니까, 흔히 연인 사이에 하는 그런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우리 원래 도장 찍은 사이긴 하잖아, 자기야.”
“세상에.”
장난스러운 이도하의 말에 시오한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이건 웃는 게 분명하다. 이도하가 제 가슴을 문질렀다. 심장이 아주 따뜻한 것에 닿은 것 같았다.
“화이람.”
“어.”
“화이람.”
“응.”
“화이람.”
“…응. 기분 이상하네.”
“죽을 것 같아.”
“그러면 안 되지.”
“안아 줘, 화이람.”
…이것 참 엄하게 들린다. 생각만 하며 이도하가 그를 안았다. 시오한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옛날에… 그러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래도 둘이서 특기로 꽤 재미를 봤으니 아쉽긴 하지만, 이도하는 알았다. 어차피 저는 이제 여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오즈에서는 특기를 못 쓴다. 그래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애초에 제가 시오한의 곁에서 이렇다 하게 특기를 쓴 일도, 쓸 일도 없었으니. 이도하가 만족스럽게 슬그머니 웃는데, 시오한이 말했다.
“그런데 화이람, 그러면 머리를 잘라야 하긴 하겠어.”
약간 묘한 감정에 젖어 있던 이도하를 와장창 깨트리는 말이었다.
“뭐?”
시오한이 나지막이 웃었다.
“가발은 티가 날걸. 분명히 눈치채게 될 거야. 괜히 들켜서 일이 꼬이는 것보다 그냥 염색을 하는 게 나아.”
“아니, 잠깐인데!”
“머리는 다시 자라, 화이람.”
이도하도 그건 알았다. 그래도 이건 제가 집착하는 게 아니라, 시오한의 머리칼을 한 번이라도 만져 본 사람이라면 분명 저와 똑같을 것이라고 이도하는 장담할 수 있었다. 평생 머리칼에 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는 저도 이게 아까운 건 안다! 나라 잃은 것 같은 얼굴을 한 이도하를 보며 시오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안 돼!”
이도하는 몹시 낙심했다.
***
앙그라엘의 제도는 오랜 풍요와 평화에 길든, 몹시 번화하고 번잡한 도시였다. 하루에도 별의별 진기하고 희한한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났으며, 수백 명씩 낯선 이들이 들락거렸다. 게 중에는 정말 온갖 사람들이 있었다. 제도의 사람들은 정말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늘 어디서 뭔가 아주 재미있고 자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귀를 쫑긋 세웠으나, 하도 온갖 일에 길들여지다 보니 이제 통 그런 일이라고는 없었다. 가정이 있는 옆집 남자가 제 아들과 놀아났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콧방귀나 좀 뀌고 말 정도의 소식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수십 년째 이어진 평화 시대에, 제도에서 태어나 모자람이라고는 없이 자란 이 펍의 주인장도 그런 전형적인 제도인이었다. 한데 그는 벌써 몇 시간 전에 들어온 손님 둘에게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둘이 들어와서 고작 맥주 하나 시킨 데다가, 이들이 의자 두 개와 함께 가장 좋은 테이블 하나를 해 먹었는데도!
딸랑- 문이 열렸다. 펍에 자리한 사람들의 눈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옷을 털며 들어온 것은 키가 아주 큰 남자였다. 짧은 검은색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막 자른 것처럼 여기저기 길이도 안 맞게 삐죽 솟아 있었으나 그것마저 거친 야생의 늑대처럼 근사하기만 했다. 눈을 깜빡이자 긴 검은색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같이 우아하게 흔들렸고, 내리깐 속눈썹 아래 황금색 눈동자는 우수에 찬 것 같았다. 다문 입술도, 매끈한 뺨도,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의 조형 하나하나가 기가 막혀 보고 있으면 그냥 막 심장이 두근거려 죽을 것 같다. 펍에 앉은 모든 이들이 입을 꾹 다물고 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이람.”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은 듯 부드럽게 표정이 풀린다. 그건 마치 기적을 목도한 순간과 같았다. 누군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고, 바에 턱을 괴고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주인장도 그렇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바 가장 끝에 또 다른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까마귀 깃털처럼 똑같이 새까만 머리를 한 이 남자는 표정이 아주 복잡해 보였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황당한 동시에 짜증이 나면서 또 좀 웃기기도 한, 아주 복잡다단한 얼굴이다.
“몇 번째냐, 벌써.”
“재밌는 나라고, 재밌는 동네네. 통 지칠 줄을 모르는걸.”
“이 새끼들 맞고 어디 가서 소문내는 거 아니야? 번호표 뽑아서 대기하나….”
“그럴 수 없을 텐데.”
펍을 가로지른 남자가 자연스레 이 또 다른 남자의 옆에 앉으면,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다. 주인장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앙그라엘의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다. 아름다운 것은 늘 모자랐고, 보고 있어도 부족했으며, 아름다운 둘이 붙어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그러고 있으니까 뭐 좀 어떻게 해 볼 만할 거 같은가 봐. 확실히 막 환상적인 느낌은 좀 사라지긴 했지….”
“그대의 솜씨인데.”
황금빛을 담은 눈매를 휘며 빙그레 웃은 남자가 맥주를 넘겼다. 투박한 맥주잔에, 고작 맥주일 뿐인데도 손놀림 하나하나 남달랐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는 귀족이 분명하다. 오뚝 솟았다가 내려가는 새하얀 울대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주인장은 새까만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잽싸게 시선을 내렸다. 이를 드러낸 늑대와 시선을 마주한 것 같았다.
“끔찍했으니까 두 번 다시 시키지 말아 주라.”
“그럼 다른 사람을?”
“…그것도 말고. 그냥 앞으로 당신 머리카락에는 손을 안 대는 걸로.”
주인장이 흘끔 시선을 올렸다가, 얼른 또 딴청을 피웠다. 남자는 좀 서글픈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서슬 퍼런 시선은 여전히 절 향하고 있었다. 이상도 하지. 여태 둘에게 시비를 걸고 수작을 부렸던 이들로 테이블을 두 쪽 내고 의자를 으스러트리고 하여간 절단을 냈던 건 매번 금안의 남자였는데, 저 까만 눈의 남자도 눈이 마주치면 오금이 다 저렸다. 도대체 둘의 정체가 뭘까. 주인장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 음. 임금님이랑 공작이 벌써 사이가 안 좋다고?”
임금이랑 공작은 뭐냐, 국밥이랑 피자 같은 조합이네. 남자가 중얼거렸다.
“향락을 누리고 싶은 임금에게 절제와 정도를 말하는 고지식한 신하가 곱게 보일 리 없지. 더군다나, 아까 그 옷 가게에서 말했던 것처럼 공작이 인망이 두터운 모양이던걸. 공자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공작? 주인장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절제와 정도를 알고, 인망이 두터운 공작이라면 포어 레펜스 공작밖에 없다. 그리고 포에 레펜스가의 공자라면 과연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활기차고 사랑스러운 공자는 이 거리의 유명인이었다. 또닥또닥, 생각에 빠진 검은 눈의 남자가 바 위로 손톱을 두드렸다.
“임금이 마탑의 한 마법사를 불러올려 부쩍 가까이하는 일로 며칠 전에 공작이 간언을 올렸다지. 화가 난 임금이 공작을 벌하려고 명령을 내린 모양이야.”
아, 그 일! 그 일은 제도를 한때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었다. 앙그라엘의 제도답게 그 일은 벌써 며칠 전의 지난 소식이 되어 버려 요즘 또 거론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시들시들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심심치 않게 안줏거리가 되고는 했다. 주인장은 입이 근질근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나 왜 알 것 같지.”
“‘불사’의 방법을 찾아내라는 명령. 120일을 주었고, 오늘로 오십 일 정도가 지났대.”
절대로 지킬 수 없는 명령. 반드시 어기고야 말게 될 명령. 그래도 어려서부터 공작을 봐 온 정이 있는 데다가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신하가 또 없는 걸 알아 공작을 내치지는 못한다던 임금이 기어이 일을 치고야 만 것이다.
“하여간 왕이란 새끼들은. …아, 미안.”
황금빛 눈의 남자가 곱게 눈웃음을 지었다. 세상 순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히야… 주인장은 또 소리 없이 감탄했다. 앙그라엘은, 그게 뭐든 아름다운 걸 정말 사랑한다.
“마법사는 또 뭐람….”
까만 눈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맙소사. 마법사가 뭔지 모른다니! 주인장은 정말이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마법사는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죠! 진리를 비틀고 부수고, 재정립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보려는 자들이요.”
마침내 주인장이 말했다. 불쑥 끼어든 그에게 놀란 듯 까만 눈의 남자- 화이람이라고 불린 남자가 좀 더 인상을 썼다. 이크. 주인장은 겁이 나서 다리가 한차례 떨렸지만, 그래도 이 두 남자가 정면으로 절 바라보니 꽤 특별한 기분이 느껴졌다. 부러워하는 시선이 분명히 느껴진다. 조금 어깨가 으쓱해진 주인장이 두려움을 이기고 말했다. 게다가 그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뭘 알고 싶은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는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주인장은 장담할 수 있었다.
“상처를 좀 더 빨리 낫게 하고, 통증을 없앤다거나, 저 바다 건너에 있다는 레페의 환상적인 풍경을 직접 가지 않고도 보게 해 준다거나, 항상 좋은 꿈만 꾸게 해 준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에요. 말로는 뭐, 나라를 좀 더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라지만 사실 다 귀족 나으리들을 위한 것들이죠.”
주인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두 남자가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이 제 얘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자 주인장은 신이 났다.
“그리고 그건 대외적인 자잘한 것들이고, 사실은 임금을 위한 불사와 불로를 연구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죠. 포어 레펜스 공작이 곁에 두지 말라고 간언을 올렸다는 그 마법사 말이에요, 임금님이 그를 불러올린 이유가 그거거든요. 그 마법사가 불사의 비밀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주인장은 한껏 자세도 목소리도 낮추었다.
“근데 그 방법이란 게, 글쎄 악마를 불러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