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무려 천 년 전인 데다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왕국의 어느 귀족가 이름을 시오한이 기적처럼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떠본 것이 분명했다. 이도하는 저들이 시오한의 얼굴에 홀렸다는 데 제 특기도 걸 수 있었다. 저 얼굴로 방긋방긋 부드럽고 친절하게 웃어 주는데 어느 누가 암요, 그럼요, 그래요, 맞습니다- 하고 고개나 끄덕이는 것 말고 다른 것을 할 재간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집문서라도 갖다 바치지 않는 게 다행이지. 언젠가 한번 생각했지만, 시오한은 황제가 아니어도 나라를 하나 이상은 해 먹었을 게 틀림없다.
“겨우 옷인데 간절까지야. 미인계가 아주 그냥….”
“그럼. 그렇게 다니면 위험하잖아, 화이람.”
눈 뜨고 사람 코를 베어 온 수준으로 옷을 훔쳐 온 주제에 또 옷을 입을 줄은 모른다. 참 손 많이 간다, 하며 이도하는 시오한의 옷을 여며 주고 있었다. 그라고 이 시대의 옷을 입는 법을 알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시오한의 정복 수준으로 복잡한 게 아니라면 팔 들어가고 머리 들어가고, 옷이 다 거기서 거기다.
“당신이 있는데 누가 날 봐.”
“그러니까, 내가.”
아니 이 양반이? 이도하가 좀 기가 막혀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코앞에서, 아주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그 말이 그 말이구나. 그래,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꿀꺽, 침을 삼킨 이도하가 어렵사리 주르륵 시선을 내렸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의 눈에 사로잡힌 것처럼 쉽지 않았는데, 내리고 보니 매끈한 목선이 또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게 아닌가. 아니 여기 옷은 왜 이렇게 목이 파여 있담. 반득한 쇄골까지 언뜻 보이자 이도하는 자꾸 입이 말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무렴. 중요하지, 옷.”
이도하가 얼른 그에게서 손을 뗐다. 요즘 들어 그는 제가 충동에 매우 약한 편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이러다간 길에서 뭔가 저지를 것 같다.
“레펜스는 뭐야?”
이도하가 물었다. 그 옷 가게의 직원들은 시오한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레펜스, 레펜스 운운을 했고 시오한은 단 한 번도 부정하지 않았더랬다.
“포어 레펜스.”
시오한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슬쩍 들어 보였다. 녹은 황금 덩어리 같은 그의 머리칼은 슬슬 말라 가는 이도하의 머리와는 달리 좀처럼 마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뭉쳐진 채로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게 참 불편해 보여 이도하가 어설픈 솜씨로나마 엉기성기 땋아 놓은 참이었다. 아까 보았던 그 아이의 머리에서 착안한 것이기도 했다.
“포어 레펜스 공작가. 황금의 가호를 받는 가문이라는데. 아름다운 데다가 공작은 공정 무사하여 인망이 두터운 나라의 제1기사이며, 하나뿐인 공자 역시 천재로 소문이 자자해 앞으로도 황금 길만 걷게 될 나라의 미래라고.”
휘황찬란한 미사여구에 이도하가 얼굴을 구겼고, 시오한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내 조상이 맞는 것 같지?”
“그럼 아까 그 애가?”
“엘하시온 포어 레펜스. 공작가의 귀하신 첫째 공자님이라는 모양이야.”
“…설마 했더니.”
이도하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우르슬라의 망가진 기억 속에서 언뜻 봤을 때도 혹시나 했다. 그러나 아까 본 그 아이는, 엘하시온은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다 하면서 봐도 분명 시오한과 닮아 있었다. 황금의 가호니 뭐니 하는 건 손발이 다 오그라들지만 확실히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저 머리칼은 일반적인 금발과는 남다른 부분이 있다. 게다가 이 눈동자까지도.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시오한의 선대일 줄이야. 그러니까 이 포어 레펜스 공작가가, 엘하시온의 가문이 훗날 이 나라를 반역으로 뒤엎어 멸망시킬 가문이라는 뜻이다. ‘마녀사냥과 악마 숭배가 횡행하고, 왕은 불사를 꿈꾸다가 아들과 딸들을 죽이기에 이르렀으며, 보다 못한 어느 공작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엎었다….’ 고작 몇 줄 정도 남아 전해진다던 그 신화와 전설을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참 기분이 묘하다.
“…이거 가발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시오한을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황금색 머리칼, 황금색 눈동자. 누가 봐도 아까 그 아이와 빼닮은 얼굴이니 제가 아니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데에도 어색함이라고는 없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리 거리에 나서는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뜻일 테니 더 좋지 않다. 어딜 봐도 공작가의 피를 이은 게 틀림없어 보이는, 누가 봐도 훌륭한 성인이 난데없이 퉁 튀어나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선하다.
이곳은 기억이나 흔적 따위도 아니고,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온 천 년 전의 시대였다. 시간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도하는 이 시간의 무슨 일이든 티끌 하나 건드릴 생각 없었다. 시간은 이미 꼬여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머리를 잘라야 할 텐데.”
시오한이 말했다. 그는 가발 따위에 거부감은 없어 보였고, 써야 한다면 정말 그냥 미련 없이 머리를 자르고 쓸 기세였다. 눈이 번쩍 뜨인 건 이도하였다.
“아, 아니. 그건 아니지.”
“자르지 않고 이 머리칼을 다 감추자면 몹시 흉측해질 거야, 화이람. 이렇게….”
시오한이 뒷머리가 한참이나 부풀어 오른 시늉을 했다. 이도하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하지 마, 하지 마. 상상만 해도 우습기 짝이 없다.
“힘을 쓰기가 껄끄러워서 그래, 화이람?”
시오한이 물었다. 이전에도 이도하는 머리칼을 가지고 장난을 친 적이 있으니 머리 색이나 눈 색을 바꾸는 것쯤은 정말 별게 아니라는 걸 시오한은 알고 있었다. 아주 쉬운 일이고, 마력 소모도 별로 없을 터였다.
“괜찮을 것 같은데.”
시오한이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의 얼굴이 묘해졌다. 시오한에게 마력이 소모되는 감각은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아래가 깨진 모래시계처럼 미세한 조절을 통해 조금씩, 지속적으로 마력이 새어 나가는 이 감각은 그에게는 이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는데 그는 지금 평소와 뭔가 다른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당신한테 다 돌려주고 있거든.”
“…응?”
그가 되물었다. 좀 놀란 것 같은 얼굴이, 그간 보지 못한 드문 표정이었다. 이도하가 씩 웃었다. 그건 정말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기가 막힌 발상이었던 것 같다.
“당신 마력, 내가 다 다시 돌려주고 있다고.”
계약주에게서 받은 마력은 그대로 흩어져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든가, 특수 처리를 한 에너젠의 수조에 풀어 에너지로 변환시키도록 한다. 지금까지는 그게 당연한 이치였다. 이도하가 알고 있던 선택지는 그 두 개뿐이었고, 그게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에 이도하는 마력으로 뭔가 다른 걸 할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저를 구성했던 마력이 제 세계에서 다시 시오한을 구성했다. 이 발상은 거기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제가 받은 마력을, 다시 돌려준다는 발상.
그래서 이 일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무려 천 년 전으로 돌아오면서도, 시오한이 과한 마력 소모로 골로 가는 일 없이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일이.
“이게 무한 동력이다.”
이도하가 한껏 뿌듯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시오한은 좀 멍해 보였다. 이건 그조차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인 것 같았다.
“화이람, 그 말은….”
“근데 특기는 쓰기가 좀 그래.”
이도하가 말했다. 한때 시오한의 마력을 생각 없이 남발했던 그는 이제야 마력의 흐름을 좀 느끼고 있었는데, 특기를 쓰면 이 간단한 순환의 과정이 좀 더 복잡해졌다. 존재를 세상에 짓눌러 머무르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힘까지 행사하게 하려면, 계약주는 더 많은 마력을 소모해야 한다. 해서 계약자는 특기를 사용하면 할수록 더 많은 마력을 매개하게 된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반 상식이었다.
그러니 특기를 사용함으로써 소모되는 마력 또한 고스란히 제게 머무르는 게 맞긴 한데, 이도하의 느낌으로, 그건 꼭 사용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특기를 아주 쓸 수 없는 건 아니겠으나 대단위로는 아무래도 좀 힘들었으며, 특히나 천 년 전으로 돌아와 있는 지금은 괜한 모험이 될 가능성이 매우 컸으므로 별로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진짜 그냥 고양이 된 거지 뭐… 시오한?”
시오한은 여전히 멍해 보였다. 이거 엄청 좋은 일인데. 너무 감격한 건가. 이도하가 떨떠름하게 제 가슴을 문질러 보았다.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대로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올 것 같다. 그는 제게 시오한의 감정이 흘러들어 온다는 걸 대체로 잊고 있는 편이었다.
시오한은 어느 때든 감정 변화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간혹 큰 변화가 생길 때만 그는 문득문득 깨닫곤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도하는 제 것이 아닌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가 시오한의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생각처럼 엄청나게 쿵쾅거리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시오한이 고장 나는 걸 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닌지라 이도하는 흐뭇하게 그의 모습을 지켜보려 했다.
그때 시오한이 그를 당겼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밀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시오한을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심장이 엄청나게 뛰고 있었는데, 이제는 귀로도 들리는 것 같은 이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엉켜 들렸다. 생각해 보니 꽤 오래간만이었다. 이도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몸이 좀 달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각하지 못한 기갈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갈증이 느껴졌고, 한 뼘이라도 더 그에게 닿아야만 했다. 입술을 빨고 혀를 문지르며 타액을 삼키는 이 행위에 그대로 질식할 것만 같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귓가를 자극하자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 이도하가 조금 더 그에게 몸을 붙였다. 숨이 가쁘게 달았다. 먼저 입술을 뗀 건 시오한이었다.
미끄러지듯 뺨에 입을 맞춘 그가 이도하를 끌어안고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등에 손을 올린 이도하가 헐떡거렸다.
“…그러면 안 돼, 화이람.”
“뭐가?”
“내가 더 욕심내게 만들지 마.”
시오한이 말했다. 작은 목소리는 뭔가 눌러 참은 것처럼 아주 꽉 잠겨 있었고, 꼭 신음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도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시오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저도 정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