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시오한. 당신이 말했던 그 천 년 전의 이름 없는 왕국 말이야. 이올라라고 했던 여자의 계약주가 살았던 시대일지도 모르는 왕국.”
이도하가 덥석 시오한을 붙들었다. 최초의 계약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때. 오랜 풍요를 누리다 못 해 안으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마녀사냥과 악마 숭배가 횡행하며 불사를 꿈꾸던 왕이 아들과 딸을 죽인 왕국이 어느 공작의 반란으로 멸망한 때. 우르슬라가, 붙잡고 놔주지 못하고 있는 시간.
“그댈 믿어.”
시오한이 간단하게 말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이도하가 씩 웃었다. 우웅- 다시 이명이 울리고, 그의 눈이 푸른 섬광으로 물들었다. 수조의 푸른 물이 그에 반응하듯 기이한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바닥이 거무스름하게 보일 정도로 깊은 수조에 가득 찬 방대한 양의 마력이 휘몰아친다. 연기가 피어오르듯,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사위가 달아오른 푸른빛으로 잠식되었다. 마치 수조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소환진이 된 것 같다. 가닥 가닥으로 갈라지고 흩어진 푸른빛이 누에고치를 감듯 그들에게 휘감겼다. 사위가 하얗게 번진다. 푸른 수조의 빛에 물든 벽도, 천장도, 문도, 빛에 삼켜져 사라졌다.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누군가 이도하의 어깨를 탁, 치고 지나갔다. 얼결에 밀려나면서도 이도하가 그를 잡았다.
“아이고, 미안합니… 다?”
상대방이 괴상하게 말끝을 올렸다. 시오한이 아니구나. 누군가 옆에서 그를 당겼다. 손을 잡은 채였는데, 돌아보니 시오한이다.
“난 여기 있어, 화이람.”
옅은 분홍 머리 남자가 사과하려다가, 이상한 눈초리로 이도하를 보고는 어쨌든 마저 고개를 숙이고 갈 길을 재촉했다. 이도하는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이리스티리움의 흔한 복식 같기도 한데, 아주 미묘하게 뭔가 달랐다. 그런 사람들이 길가에 가득 다니고 있었다.
마차도 다니고, 말도 다니고, 하여간 사람 사는 곳이다. 사람들은 참 희한하다는 눈초리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시오한을 보고 멈춰 서거나, 발이 걸려 휘청거리거나, 짝짝 박수를 치는 것도 모자라 옆 사람을 때리면서 달려가 버리거나, 여러 번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개 중 누구도 시오한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 말과 마차가 다니는 곳이 이도하의 세계일 리는 없고, 시오한을 못 알아보니 이리스티리움일 리도 없다.
“이올라! 으아, 망했다!”
누군가 소리쳤다. 이도하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는 17살쯤 되어 보였다. 키가 이도하보다 한 뼘은 작았으며 아주 호리호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옷에, 뺨에는 보기 좋은 혈색이 돌고,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인물도 좋았으나, 그보다는 눈길을 끄는 활기와 생기가 있었다. 느슨하게 땋아 놓은 머리칼은, 시오한과 아주 똑같은 찬란한 황금빛이다. 아이가 옆에 선 누군가에게 뭔가 말하느라고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가 재빨리 달려 나가다 누군가를 붙잡았다. 이도하의 눈이 그를 좇았다. 붙잡힌 사람이 돌아본다. 짧은 갈색 칼단발이 흔들렸다. 갸름한 얼굴에, 젊고 단아한 얼굴. 안경 너머 화가 난 것 같은 푸른 눈동자.
‘독일의 인소더블로 잘 알려져 있던 우르슬라 발터가 계약자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오늘 오전 10시경, 지난 16일 밤….’
우르슬라를 거론할 때면 주야장천 우려먹던 자료 화면, 플래시 세례 속에서 가운을 입고 잠깐 얼굴을 드러내며 짧게나마 웃던 모습. 그 얼굴이다.
우르슬라.
“미안해, 화내지 마. 응?”
“엘, 약속했었지. 다시는 무모한 실험 하지 않겠다고. 이게 네가 신뢰에 보답하는 방법이야?”
엘. 저 아이가, 우르슬라의 계약주다.
엘하시온.
“무모한 게 아니었어! 정말이야. 이올라도 제대로 보면 알 거라니까? 진짜야. 걱정시켜서 미안해, 응?”
엘하시온이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고개를 숙이자, 느슨하게 묶은 황금빛 머리칼이 뱀처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보면 볼수록 정말 시오한과 똑 닮은 빛이었다. 쿠르릉-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가 시끄럽게 지나갔다. 우르슬라가 뭔가 또 차갑게 말하고, 엘하시온이 고개를 흔든다. 그가 밝게 웃으며 우르슬라를 이끌었다. 조금 얼굴이 풀린 것 같은 우르슬라가 뚱한 얼굴로 그를 따랐다.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가려다, 우르슬라가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녀가 절 알아볼지는 모르겠으나,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기도 했다.
“화이람, 눈에 띄지 않으려면 일단 옷부터 어떻게 할까?”
덩달아 길가에 쪼그리고 앉게 된 시오한이 속삭였다. 이도하가 돌아보니, 그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시오한이 여전히 이도하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양팔을 벌려 보였다. 과연, 머리는 흠뻑 젖어 축 늘어져서 바닥에 수묵화라도 그릴 기세고, 검은색 니트와 바지만으로도 이미 굉장히 이질적인데 그게 또 몸에 딱 달라붙어 있다. 헉, 이도하는 잠시 상황도 잊고 숨을 들이켰다. 당장 뭐라도 벗어 걸쳐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도 딱히 사정이 다르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 옷부터.”
시오한은 안 그래도 시선을 끄는데, 이래서야 정말 여기 좀 보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큼, 목을 가다듬은 이도하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가만히 있던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누군가의 발에 툭 차여 저 멀리 사라졌다.
이도하가 애매한 얼굴로 눈썹을 긁었다. 일단 시오한의 말처럼 어디서든 옷을 구해 와야겠다. 이도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일어서 보았다. 엘하시온과 우르슬라는 보이지 않았다. 짧은 갈색 머리칼이 인파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 같기도 했으나,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저기!”
이도하가 마침 가까이 지나가던 행인을 붙잡았다. 붙잡고 보니 이제 갓 20살은 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본 아이가 이도하를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이도하가 물었다. 확인 사살이었다.
“어, 저기 그게. 여기가 어디… 게요.”
“네에?”
난데없는 퀴즈에 아이가 이도하를 한번 훑어보더니 말끝을 올리며 되물었다. 이게 아닌데. 말주변 없는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아이는 괴상한 질문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이나,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걸 보더니 그냥 밤새 뭔가 아주 재미나고 방탕한 일을 한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앙그라엘이요!”
이도하가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아이의 팔을 잡고 있던 이도하의 손을 잡아 내리며 시오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들어본다, 하는 몸짓이다.
“어, 정답.”
“엄청 쉬운 질문이네. 상품은 없어요?”
정말 편견이라고는 없다. 이 또라이는 뭔가 하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데 되레 상품을 묻다니. 막 나가던 나라라고 하더니 과연 사람들도 좀 범상치 않은 것 같다.
“…오늘 하루 행운이 가득할 거예요.”
이도하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무슨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저도 어이가 없는데 아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오빠네! 고마워요!”
아이는 별 미련도 없이 좀 재미있어하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한번 더 바라보고 다시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이도하가 다시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황당해하는 시선을 받은 시오한이 말했다.
“재밌는 나라네.”
우르슬라.
엘하시온.
이리스티리움의 전신. 이름 없는 왕국. 어쩌면 맹약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시대.
앙그라엘.
정말로, 왔다. 천 년 전으로.
***
“도둑질도 수준급이시네요, 폐하. 진짜 못 하는 게 없네.”
“간절하면 뭐든 잘하게 되는 법이지.”
조금 불퉁하게 말하는 이도하에게 시오한이 눈에 웃음기를 담고 말했다. 눈에 띄지 않는 옷을 구해야 하긴 하는데, 그들 수중에 돈이라고는 단 한 푼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시오한도, 이도하도 몹시 부자인 동시에 알거지인 신세라, 돈이 될 법한 것이라고는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시오한이 원래 입고 있던 정복이었더라면 꽤 값이 나갔을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현재는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착용한 게 없는 데다가 이도하도 몸에 뭘 걸치는 편이라 아니라 둘은 이보다 더 빈털터리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나. 이도하가 설거지 따위를 생각하는 동안 시오한은 그를 이끌고 어느 옷가게에 아주 당당하게 들어갔다. 푹 젖은 데다가 난생처음 봤을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을 보고 직원은 일단 반색했고, 시오한을 보고는 두 번 반색했다. 아마도 꽤 현란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을 직원은 그에게 이 옷 저 옷을 신나게 물어다 주었고, 시오한은 아주 사근사근하게 웃어 주며 자연스럽게 직원이 가져다주는 옷들을 건네받는 것은 물론 이도하에게 입어 보라는 말까지 했다.
빈털터리 이도하는 약간의 죄책감과 소심한 불안감을 안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나와 보니 시오한은 어느새 자연스레 앉아 시중을 받고 있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말솜씨가 그렇게 좋은 것을 처음 알았다. 모르는 이에게 그리 너스레를 잘 떠는 것도, 잘 웃는 것도, 거짓말인 듯 거짓말 같지 않은 말을 그렇게 태연스레 잘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느 정도로 자연스럽고 태연했는가 하면, 시오한이 듣도 보도 못한 어느 귀족가의 이름을 대며 그들이 값을 치르지도 않은 옷을 입고 가게를 떠나는데도 직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배웅까지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