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이도하가 즉시 시오한의 손을 낚아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형체가 희미하게 사라졌음에도 이도하의 손에 잡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의 손을 구성하던 마력은 이미 전부 흩어져 버린 것이다. 느낌이 이상하다 했더니, 이 역장은 특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역장이었다. 아주 희귀한 특기였다.
막대한 마력을 보관하고 있는 만큼 에너젠의 보안 체제는 여태 한국에 없던 수준으로 살벌하다고 언뜻 들은 것 같긴 하지만, 이 정도 크기의 역장을 펼칠 수 있는 특기자라면 정말 엄청난 수준이었다. 꼭 잠잠한 소리가 나는 소라 껍데기 안에 답답하게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일어나려는 몸을 위에서 꽉 내리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어지간한 특기자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상대가 인소더블 정도가 아닌 경우에야.
우우웅--!! 이명이 사위를 흔들었다. 섬광이 인 이도하의 눈이 점점 더 새파란 빛을 띠며 달아올랐다. 쩡- 쩡- 타격당한 종이 거세게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울렸다. 공기가 부르르 떨린다. 당장이라도 형체를 가지고 깨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날 선 유리처럼 살갗을 긁는다. 정점에 달하는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모든 게 멈춰 버린 것 같다가, 팡-!!!! 대량의 공기가 폭발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창문 하나 없는 실내에 열기를 가진 바람이 몰아쳤고, 쾅!! 특기의 충돌을 견디지 못한 듯 실제로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시오한이 재빨리 이도하를 붙잡았다. 수조의 물이 거세게 출렁거린다. 벽 한 겹 너머 웅웅대며 울리던 경보음이 한층 더 커졌다.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에서 촥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르릉-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멀리서 났다.
“어이쿠.”
시오한이 위기감이라고는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이쿠는 무슨 어이쿠야. 보자!”
대량의 스프링클러가 쏟아 내는 물에 얼굴을 훔치며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을 확인했다.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소매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손의 형태가 흐릿하게나마 테두리를 찾았다. 시오한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게 보였다. 비로소 이도하는 짧은 숨을 터트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스프링클러의 물을 맞으며, 흠뻑 젖은 시오한이 다정하게 눈을 접으며 조금 웃어 보인다. 말없이 그 얼굴을 보던 이도하가 다시 시오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벌써 형태도 색도 찾고 거의 원래대로 돌아왔다.
“며칠 정도나 있을 수 있지?”
그 손을 만지작거리며 이도하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역장이 깨어진 여파인지, 아니면 지금쯤 이 마력 수조에 침입한 게 이도하라는 게 알려져서인지 지금은 조용해진 듯하다. 그러나 이건 잠깐의 소강상태였다. 곧 무슨 일이든 일어날 터였다.
“글쎄. 아마… 꽤 오래.”
“되게 끌린다.”
이도하가 말했다. 이 수조에 제가 쏟아 냈던 마력을 모조리 다시 가져가면 시오한은 아마도, 꽤 오래 이곳에 있을 수 있다. 그건 정말 강렬한 유혹이었다.
사실 이도하도 알고 있었다. 그저 제 일이라며 신경 끄라는 듯이 말했지만, 시오한이 이곳에 있다는 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일이라는 의미라는 걸. 귀찮고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은 한두 개가 아닐 것이며, 레무스 비숍의 말처럼 또 어떤 ‘오류’를 일으킬지 모르는 위험성까지 있다는 것도, 마음이 급해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긴 했지만, 지금 이게 ‘좀 골치 아픈’ 정도나 ‘시끄러운’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오한이 조금만 더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걸었던 길, 제가 바라보며 자란 곳, 제 손때가 묻은 물건, 제 공간. 평소에는 별생각도 없던 그런 것들에 시오한의 눈길이 닿고 손길이 닿고, 그가 존재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 버렸기 때문에. 그러나 제 바람만큼이나, 이도하는 또 알고 있었다.
시오한은 돌아가야 한다.
시오한의 마력과 제 특기가 한데 어우러져 가득한 이곳에서 이도하는 본능처럼 깨달았다. 지금이라면, 지금 이곳이라면 시오한을 돌려보낼 수 있다. 그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화이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잔잔하게, 이제 출렁거림이 좀 가라앉은 수조의 물이 흔들리며 푸른 물그림자를 비추는 것 같은 목소리에 이도하가 언뜻 웃었다. 시오한은 종종 이렇게, 꼭 많은 말을 담은 것처럼 저를 부르곤 했다. 커다란 손이 이도하의 뺨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이 그의 눈 밑을 가만히 매만졌다. 한숨을 내쉬며, 이도하가 조금 더 그 손에 고개를 기대었다.
“기분 이상하네.”
이건 돌발적으로 일어난, 아주 특이하고 특별한 상황이었다.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시오한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정상적으로 이도하를 소환할 수 있고, 이도하도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소환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처럼, 이도하는 저와 시오한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걸 실감한 적이 없었다.
“그냥 여기에 있을까? 그대 곁에.”
“마음에도 없는 소릴.”
이도하가 픽 웃었고, 시오한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진심인데.”
“아서. 스위스 촌구석에 가도 당신은 이 세계에서 조용히 못 살아. 세상이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걸.”
세상이 널. 이도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는 제 세상이 얼마나 파급력이 끝내주는 세상인지 새삼스러울 정도로 깨달은 참이었다.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좋겠지. 그대가 있는데 무엇이 문제겠어.”
시오한이 부드럽게 말했고, 이도하가 혀를 찼다. 이리 달게 말하니 이것 봐라, 또 진짜 그냥 그래도 괜찮을 것 같지. 그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이도하는 이미 꽤 저 좋을 대로 실컷 행동한 참이었다. 거의 막무가내로 여 보란 듯이 막 나갔다. 그동안 이도하가, 제가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후련하긴 했지만, 이제 뒤처리가 남아 있었다.
“진짜 망종 된다니까.”
제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보고도, 한데 엮여서 그 난리를 겪어 놓고도 용케 저런 소리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봐야, 시오한은 ‘그대는 아주 귀여웠지’ 따위의 소리나 할 걸 알아 이도하는 그냥 이렇게 툴툴대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꼭 어리광을 부리듯 시오한의 손에 이마를 문지른 이도하가 툭, 그의 가슴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말했지만, 겨우 이 정도로? 화이람, 그대는 진짜 망종을 못 봤어.”
“어, 당신도 내 눈에는 엄청 귀여워.”
이도하가 스스럼없이 말했다. 솔직한 말로 시오한이 귀여운 얼굴은 아닌 걸 제가 모르겠는가 말이다. 시오한은 어떻게 수식어를 대기가 좀 그런, 그냥 눈이 좀 의심스러워지는 기적 같은 얼굴인 걸 매번 볼 때마다 느낀다. 시오한이 소리 없이 웃고 있는지 기댄 가슴이 흔들렸다. 그 움직임이 좋아 이도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우리 부모님을 못 보여 줘서 좀 아쉽네.”
“…….”
처음에는 집을 비워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오한이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면 꽤 재밌는 광경이 됐을 것이다. 제 어머니가 그를 퍽 궁금해했는데 통화라도 한번 시켜 줄 걸 그랬다. 그러고 보니 전화를 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못 했다. 하기야, 아쉬운 걸로 따지면 한두 개가 아니다.
“화이람.”
시오한이 그를 불렀다.
“기억해. 그대는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이 사람이 정말 제 버릇을 단단히 망쳐 놓으려는 셈인가. 제가 준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라를 굴릴 에너지가 될 마력을 탈취한 현장에서. 기물 파손에, 폭행에, 무단 침입까지 아주 다채로운 범죄를 저지른 현장에서 자꾸 이리 말하니 뭐가 좀 이상해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쪽, 입을 맞춘 그가 말했다.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고, 의무가 아니야. 태어났다는 이유로 의무와 책임이 주어지는 건 불공평하지.”
“…뭔 소리야?”
“그대는 나만 책임지면 된다는 소리야.”
시오한이 다정하게 웃었다. 푸른 섬광이 언뜻 비치는 황금색 눈동자에 푸른 수조의 불빛이 일렁거린다. 그 차가운 빛이 다정한 황금빛과 섞여 잔잔히 흔들린다. 장난스레 말하면서도, 마치 걱정하고 염려하는 듯한 얼굴이다. 이도하로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내가 늘 그대의 행복을 염려하고 있으니.”
“시오한, 왜 그래?”
“…그냥. 험한 세상에 그대를 두고 가려니 참 힘드네. 그대는 그동안 어찌 그리 나를 두고 갔지? 매정해라.”
“…아니, 험한 세상은 무슨… 갑자기 딜 넣기 있냐. 언제는 마음이 약해 걱정이라며.”
하하.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깊이 끌어안았다. 딜이고 뭐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도하가 퍽 당황스러워하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늘 그대를 염려하고 걱정해, 화이람. 그대를 생각하는 게 내 일인걸.”
“인소더블을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하는 건 당신밖에 없을걸.”
툴툴거리면서도 이도하가 그를 마주 안았다. 쏴아아아- 여전히 스프링클러의 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멀리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뭐가 타고 있는 건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알면서도 걱정하는 게 마음이라.”
“그럼 가서 곧장 불러. 나 좀 탈출시켜 주라.”
이도하가 말했다. 이 수조의 마력을 몽땅 시오한에게 돌려주면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애교 정도로 만들어 줄 게 틀림없었다. 도망이야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아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만큼 마음 편한 방법은 없을 터였다. 어쨌든 이대로 있다가는 영영 못 보낼 느낌이라, 이도하가 먼저 그를 놓고 물러섰다. 그러나 마음을 먹고 수조를 바라보는 순간,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문득 떠오른 것이다.
천 년 전으로 돌아가는 방법.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오한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되, 사용하면서 제 특기를 더하는 것. 어쩌면 세계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서. 지금이, 기회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