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79화 (178/250)

179화

“시오한!”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잡아 올렸다. 흠뻑 젖은 데다가, 이도하도 꽤 키가 큰 편이니 무거울 텐데도 그대로 쑥 딸려 올라갔다.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물속에서 이도하를 건져 올린 시오한이 한 번 더 검을 길게 휘둘렀다. 별로 힘도 주지 않고 성의 없이 그은 것 같았으나, 거대한 벽에 좌에서 우로 푸른 금이 쫙 그어졌다. 휴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회색 벽이 타들어 갔다. 푸른 수조의 빛이 일렁이며 비치는 가운데 불씨가 휘날렸다.

“잠깐-”

이도하가 덥석 그의 팔을 잡았다. 시오한이 이곳에 존재하는 원리가 정말 계약자가 오즈에 소환되는 원리와 같다면, 이렇게 그가 제 특기를 끌어 쓰는 것도 다 마력을 소모한다는 뜻이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여태 멀쩡하던 시오한이 잠깐 특기를 쓴 것만으로도 사라져가고 있으니, 틀림없었다.

이도하는 프레스에 심장이 낀 것처럼 마음이 조여드는데, 시오한이 잠깐 시선을 마주하더니 검을 위로 던졌다. 거의 쏘아 올린 것 같았다. 또다시 그들 위로 떨어져 내리던 벽을 검이 그대로 자르고 지나가 콰직!! 천장에 박혔다. 반으로 잘린 거대한 벽은 완전히 타들어 가 푸른 불씨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고, 검을 이루고 있던 물은 흩어져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화이람, 내가 그동안 한 번도 투정은 하지 않았는데….”

이도하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그가 수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주변의 물이 빨려 들어가며 소용돌이치더니, 다시금 검의 형태로 솟구쳐 올라 시오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대를 소환하는 건 굉장한 마력을 필요로 하거든.”

젖은 얼굴, 속눈썹에 물방울을 매단 채 한쪽 눈을 찡그린 시오한이 씩 웃었다. 푸른 불티가 휘날리는 사이로, 기이한 푸른 빛- 섬광으로 완전히 물든 선연한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마치 제 눈을 마주한 것 같다. 이도하가 사로잡힌 듯 그 시선을 응시했다.

“정말 엄청나게 말이야.”

그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단아한 턱 선을 타고 조르륵 미끄러진 물방울이 턱 끝에 매달렸다. 시오한이 그 물방울을 훔쳐냈다. 손가락 끝까지, 완전히 제 모습을 찾은 손으로.

“게다가 마력 조절은….”

“당신이 한 수 위라고.”

이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이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가 손에 든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두 번 크게 휘두르니, 옆과 뒤로 거대하게 선 벽에 어김없이 푸른 선이 죽죽 그어진다. 아이가 낙서를 한 것처럼 가차 없이 그어진 선부터 회색 벽이 불티를 휘날리며 타들어 갔다. 잠깐이나마 웅장하게 그들을 가두었던 벽은 타다 남은 종이처럼 조각조각만 남긴 채 이제 모두 불티로 흩날리고 있었다.

“사실 두 수쯤 위지.”

물론 범인에 비해서야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지만, 그대처럼 마르지 않는 샘은 아니라. 시오한이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러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아껴 써야 한다. 스스로 자신하건대, 그는 그런 일에 누구보다도 도가 텄다.

“잘났다.”

이도하가 비로소 픽 웃었다. 쾅-!!! 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그들을 후려쳤다. 전조 없는 굉음에 이도하는 흠칫 놀라고 말았으나, 시오한은 그런 그를 보고 나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도하도 시오한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문을 부술 듯 박차고 무시무시하게 무장을 한 일련의 무리들이 신속하게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위협적인 총기류로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고글과 발라클라바를 써서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고 정확하게 움직이며 총구를 그들에게 향하던 무리들 사이로 잠깐 흐트러짐이 스쳤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의 여파에 아직도 출렁거리는 수조와 침입자를 가두기는커녕 흔적만 남은 회색 벽, 사방에 가득하게 흩날리는 푸른 불티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중심에 선 이를 보고 가장 당황한 듯 주춤거린다. 가장 앞에 선 누군가가, 당혹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도하?”

이도하? 당장이라도 이도하를 벌집으로 만들 기세로 칼 같이 서 있던 총구들이 미끄러져 내렸다. 술렁임이 그들 사이를 한 차례 휩쓸었다. 이도하? 이도하라고? 와 진짜네. 좆 됐잖아- 하는 수군거림이 인간미라고는 없는 것 같은 이들 사이에서 수군수군 흘러나왔다. 믿기지 않는 듯, 그들 중 한 명이 고글을 벗어 올렸다. 잔뜩 찌푸린 눈이 이도하를 보고, 시오한을 보았다. 한 번 휘둥그레 진 눈이 뭘 잘못 본 것처럼 몇 번이나 깜빡거린 뒤에야 다시 이도하를 보았다.

“진짜 이도하??”

“진짜 이도하요. 그냥 가죠, 괜히 힘 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진짜 이도하네.”

남자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총구들이 그들의 전의처럼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어디에 가서도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는 아주 대단한 이들이었다. 특수부대 출신이 아닌 이들이 없었고, 하나같이 외국에서 용병을 뛰던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이도하를 상대로는 특수부대든 유치원 부대든 다 같았고, 그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야… 야, 2팀 대응 중지하라고 해! 무전 때려, 대기하라고!”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이미 신호 갔을 텐데요.”

“시발 닥치고 일단 때리라고!”

“뭐… 뭐 하는 겁니까? 미쳤어요?”

그러나 대응할 수 없는 건 없는 거고, 이도하가 에너젠의 마력 수조에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엄청난 사실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도하는 제가 어째서 스스로 마력을 풀어낸 수조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침입을 했는지, 그리고 얌전히 대한민국에 이바지할 에너지가 돼야 할 마력을 왜 제가 다시 쏙쏙 뽑아가고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매우 난감하다.

“…내가 다시 사려고요.”

잠깐 머리를 굴린 이도하가 말했다. 제가 말하면서도 참 개소리다 싶었으나, 달리 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시오한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게 웃음을 참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이도하는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이도하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기가 막힌 개소리였던 게 틀림없었다. 남자가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고, 고글과 마스크로 가려진 나머지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해 보인다.

“계좌도 동결됐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요?”

“예?”

마음이 좀 진정되자 이도하는 여유를 찾았다. 그가 다소 바보처럼 반문했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특별법 통과 이후로 동결된 거 모릅니까?”

아, 그거. 그랬구나. 이도하는 그제야 이해했다. 마력 매개로 받은 돈은 특별 계좌라고 따로 만들어서 제가 원래 쓰던 계좌에는 용돈밖에 없을 텐데, 그럼 윤윤형 돈은 어떻게 갚는담. 이도하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게 상황에 참 안 맞는 소리라는 건 남자의 동료들도 생각한 모양이었다. 누군가 남자의 허벅지를 툭 쳤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여기 있는 마력을 가져가겠다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죠.”

이도하도 제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그렇구나, 그런가 보다- 하리란 기대는 아예 없었다. 그냥 어차피 저들에게, 저들은 물론이고 누구도 이도하를 제압할 방법이라고는 없으니 별수 없다, 하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사실 그것도 별로 기대를 걸 만한 건 아니었다.

“미친… 어쩌려고요? 진짜 배신이라도 할 셈이에요?”

남자의 눈길이 잠깐 시오한을 향했다.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신성호의 입으로 그런 소문이 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하면서도 불쾌한 기분이 복잡하게 들었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지 모르겠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고, 어찌 됐든 처음부터 이 사람 마력이고 내가 매개한 거니까 도로 가져가겠다고요. 그냥 그렇게 알고 가주지 않으면 매우 때릴 수밖에 없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뭐 돈도 뺏어갔다며? 줬다 뺏기 하자는 거 아니에요? 그럼 나도 돌려받아야지. 이치에 딱딱 맞네요.”

“아니, 당신이 그렇게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는 게 아니라고요!”

이도하는 슬슬 정말 기분이 나빠졌다. 저들이 이래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하고, 제 말에 순순히 수긍하지 않으리란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렇게 말하니 몹시 빈정이 상했다. 더 길게 말해 봐야 제 기분만 더 바닥을 칠 것이다. 이도하의 눈에 푸른 섬광이 돋았다. 우웅- 특유의 이명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남자들이 숨을 들이켜며 재깍 총구를 들어 올렸다.

탕-!! 총성이 울렸다. 탕탕-!! 산발적으로 여러 발이 더 쏘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하가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무형의 힘이 남자들을 강타했다. 거대한 손이 떨어진 밥풀을 치워내듯 남자들을 문밖으로 한 번에 쓸어버렸다. 뭉치고, 넘어지고, 뒤엉키고, 부딪치며 그들은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쾅!!! 박차고 열렸던 문도 닫혔다.

“어이가 없네.”

허공에 멈춘 총알이 후두둑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쩡-!!!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파장이 사위를 뒤흔들었다. 타격당한 거대한 종의 내부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진동했다.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웅, 잔상처럼 남은 진동이 잘게 떨린다. 역장이었다. 이곳에, 이 거대하고 복잡한 에너젠을 완전히 감싸고 어떤 역장이 펼쳐졌다.

그가 황급히 시오한을 보았다. 곧게 선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얼굴이 매우 불쾌해 보였다. 다시 이도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시오한의 눈은 어느새 본래의 황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손을 들었다.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원래대로, 완벽하게 형체를 이루었던 그의 손이 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옷소매가 팔꿈치 언저리에서 아래로 푹 꺾여있다.

시오한이 절 구성하느라 쏟았던 마력, 한때 저를 구성했던 마력, 제 몸을 샅샅이 파고들었던 마력이 녹아내린 수조 위에 서서, 그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이도하는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힘의 흐름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오즈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시오한은 ‘계약주’였다. 특기자도 아니며, 세계를 오가는 ‘계약자’도 아니다. 이대로 두면, 시오한은 그대로 흩어져 버린다. 원래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모두 흩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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