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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78화 (177/250)

178화

시오한의 손가락 너머 제 손등이 흐릿하게 보인다. 건드린 적 없는 푸른 리본이,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황급히 손을 뻗어 리본을 잡은 이도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번져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내려앉는 소리도 없이 그냥 심장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이런, 화이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따뜻한 손길이 이도하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새하얗게 질린 이도하가 허겁지겁 그를 끌어안았다. 그보다 조금 더 크고, 보기보다 단단한 몸이 손과 팔, 온몸으로 와 닿았다. 아직 여기 있다. 여기 있다. 헉, 비로소 숨통이 트인 이도하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대를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시오한이 곤란하게 중얼거렸다. 얼른 시오한의 품에서 벗어난 이도하가 그의 손을 확인했다. 손끝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손가락 뿌리와 손바닥은 불투명하게 색을 잃어버리고 그 뒤가 비추어진다. 사라져가는 그의 손은 형체가 흐릿해졌음에도 이상하게 이도하에게는 분명 쥐여 졌으나, 손목에 묶어놓았던 푸른 리본은 마치 그 자리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흘러내린 것이다.

“왜, 왜 이래? 왜 이래?”

“마력이 모자랐나 봐.”

아주 찰나, 이도하가 느꼈던 대로 그 찰나를 만들었던 건 딱 그만큼의 마력이었을 테니까. 이도하는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어쩔 줄을 모르고 시오한의 손만 붙잡았다. 이대로 사라지면 오즈로 돌아가나? 하지만 오즈에서의 그는, 성벽에서 떨어지고 있었는데. 역소환은 소환되었던 장소로 돌아간다. 아니지, 저쪽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궁도, 드리시니언도, 하여간 암군도 있고 그 외 다른 계약자들도 있으니 어떻게든 미리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즈로 돌아가는 게 아니면? 그냥, 사라져버리는 거라면? 그를 이 세계에 구성하는 마력이 모자라 그대로 흩어져 버리는 거라면.

어느새 덜덜 떨리는 이도하의 손을, 시오한이 다른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 손마저 희미하게 형체를 잃고, 지워지듯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아이고. 시오한이 중얼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화이람, 나 여기 있어.”

이것 봐. 이렇게 아직 잡히기도 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손을 꽉 쥐는 게 느껴진다. 이미 그 손가락은 형체를 잃어, 보이는 것은 손목과 손바닥 언저리 즈음까지였다. 언뜻 기괴하기까지 한데, 시오한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대가 이리 꽉 쥐고 있잖아?”

“마력이라며. 당신 마력은?”

“그런 건 이곳에 없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왜 없어. 그럼 에너젠-”

에너젠이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뭔데. 그렇게 말하려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마력. 시오한의 말처럼 마력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런 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계약자들이 그들을 구성했던 일부로서 담아 돌아오는 것밖에는. 오즈의 마력은 계약자를 통해 이 세계의 것으로 바뀌고… 그래서 ‘매개’한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도하는 이유도 모르고 그저 당연하게 쓰던 표현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시오한의 말대로라면, 그를 이 세계에 구성하고 있는 건 계약자들이 오즈에 가는 원리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오한이 이도하의 특기를 쓰자 남은 마력이 바닥난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시오한을 구성하는 건 이도하에게 건넸던 스스로의 마력이라는 것뿐.

시오한이, 이도하를 구성했던 마력. 이도하가 이 세상에 매개했던 그의 마력.

있다.

“에너젠.”

이도하가 말했다. 이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에너젠에 가서 매개했던 마력. 에너젠은 시오한이 실제로 쓴 마력을 다 감당하지도 못했다. 그들이 받아낸 마력은 고작 절반이나 간신히 넘는 정도였지만, 그것도 이 나라를 일 년은 거뜬히 굴릴 수 있는 양이라고 했다. 그 마력을 실제 쓸 수 있는 에너지로 변환하는데도 시간이 꽤나 걸린다고 했으니, 아직 태반은 수조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우웅- 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잠깐 사위를 채운다 싶더니, 이도하와 시오한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과 암군, 그리고 레무스 비숍뿐이었다. 레무스 비숍만 좀 떨떠름할 뿐 나머지는 주인도 없는 집에 졸지에 남겨지고도 조금도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시오한과 이도하의 부재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처럼 그들이 태연히 시선을 마주한다. 그 낌새를 읽은 레무스 비숍이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합시다.>

드르시니언이 가볍게 말했다. 손을 놓자 신성호가 바닥으로 툭 꼬꾸라졌다. 어지간히 필요한 말은 다 떠들었고, 그게 뭐든 이도하와 시오한이 하는 대화는 이 자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다는 일방적인 판단하에 신성호는 기절한 지 오래였다. 서련이 한 번 더 시계를 확인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레무스 비숍은 궁을 보았다.

어느새 파랗게 섬광이 오른 눈을 하고 있던 궁이 미간을 모았다.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레무스 비숍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푸른 눈동자가, 방금 전까지 시오한과 이도하가 있던 자리에 잠깐 머물렀다.

***

첨벙-!!! 물이 튀는 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싼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도 주변에 가득하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꺼지듯 사라진다.

몸은 가라앉고, 머리카락과 옷이 부유하여 휘감기는 그 묘한 감각. 중력으로부터 조금 벗어난 것 같은, 차갑고 싸늘한 뱃속으로 꿀꺽 삼켜졌으면서도 부드럽게 떠받쳐지는 듯한 기이함. 빈틈없이 무언가로 감싸지는 그 기이함에 사뭇 아늑함까지 느껴지는 그 속에서, 유일하게 단단하게 힘을 줘 붙잡아오는 손길. 이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선명하게 푸른 물속에서, 황금빛 머리칼이 찬란하게 펼쳐져 있다. 한 올 한 올의 경계 없이 부드럽게 퍼진 것 같은 머리칼은 빛줄기 같기도, 불꽃같기도 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이도하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다. 그는 이도하의 아래에 있었다. 깊은 수조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수면 밖의 붉은 조명이 그를 비춘다. 빛이 닿지 않아 컴컴하게 보이는 수조 아래와 빛의 경계에 그가 있었다. 이도하의 손목으로부터 늘어진 푸른 리본이 그 경계처럼 길게 유영한다. 이도하가 손에 힘을 주고, 그를 끌어올렸다.

“푸하-!!!”

수면 밖으로 올라온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수조 속의 물만큼이나 싸늘한 공기가 폐부로 확 빨려 들어갔다. 먹먹했던 귀로 요란한 알람 소리가 고막을 다 찢어놓을 것처럼 왱왱거리고, 눈부신 빛이 번쩍거렸다. 잠깐 사이에 마력이 아니라 정신까지 다 빠질 것 같은 요란함이었다.

콜록콜록, 그사이 시오한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이도하가 얼른 그를 받쳐 올리려 했으나, 시오한은 무거운 납이라도 단 것처럼 축축 늘어지고 가라앉았다. 게다가 엄청나게 무겁기까지 했다. 물론 그가 보기보다 훨씬 무거운 편이라는 걸 이도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나, 그래도 그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

“옷-!”

“응?”

“옷 벗어, 시오한!”

가라앉고 있는 주제에도 태연한 시오한이 반문하는 사이 이도하는 이미 그의 코트를 벗기고 있었다. 그러나 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은 잘 벗겨지지도 않았고, 긴 머리칼이 손에 달라붙고 엉겨들어 쉽지 않았다. 시오한이 스스로 벗어낸다면 그나마 쉬울 것이나, 이도하는 이미 그가 수영 같은 건 할 줄 모른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버둥거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번쩍거리는 빛에, 고막을 다 터트릴 것 같은 경보음에, 정말 딱 미쳐버리기 직전에 이도하는 마침내 검은색 코트를 벗겨버리는 데 성공했다. 제 점퍼까지 벗어버린 이도하가 시오한을 안고 수조가로 향했다. 거의 도달해 시오한의 손이 수조가에 닿은 것을 확인한 이도하가 눈을 들었다. 순식간에 푸른색 섬광으로 달아오른 눈동자가 높은 천장에서 어지럽게 번쩍거리고 있는 경보기를 노려보았다.

팡-!! 경보기가 폭죽처럼 즉시 터져나가며 부스스 불씨를 떨어트렸다. 연이어 이도하의 눈이 닿는 곳에 있는 경보기란 경보기는 모조리 다 터져나갔다. 사이키처럼 번쩍거리는 빛은 사라졌으나 멀리서는 여전히 경보음이 울린다. 붉은 조명은 사라지고, 어른거리는 수조의 푸른빛이 사위를 잔잔하게 물들였다.

“수영은 또 처음이네.”

“아무렴, 당신이 처음 하는 건 다 나랑 하는 거잖아.”

푸르르,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 이도하가 바로 시오한의 손을 확인했다. 그러나 투명하게 사라진 손끝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히려, 방금 확인했던 것보다 조금 더 사라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물에 흠뻑 젖었는데, 등골이 그보다도 더 싸늘해진다.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수조는 분명 이도하가 마력을 풀어낸 그 수조였다. 에너젠 본사의 가장 크고, 가장 깊고, 가장 거대한 수조. 이 푸른 수조 안에 마력이 가득 차 있으니 일단 담그기부터 하고 보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 쾅!! 굉음을 내며 거대한 벽이 수조로 떨어졌다. 옅은 회색의 얇고 단단한, 정말 말 그대로 거대한 벽이었다. 솟구쳐 오른 물이 쓰나미처럼 이도하와 시오한을 덮쳤다. 쾅!! 그들을 중심으로 연이어 벽이 떨어졌다. 사방을 감싼 벽은 수조를 부수고 수조 밖 바닥을 다 깨부술 듯했으나, 두부에 박히듯 수조 겉면에는 일절 손상 없이 바닥에 그대로 쑥 밀고 들어가며 그들을 가두었다.

쾅-! 마지막 벽이 그들 사이로 내리 찍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이도하는 요동치는 물결에 밀려 쓸려 나갔다. 뒤에 내리 찍힌 벽으로 밀려나는 이도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잘려나간 푸른 리본이었다. 그의 손목으로부터 늘어져, 잘린 뱀의 꼬리처럼 짧게 수면 위에 떠 있는 푸른 리본의 모습이 이도하의 눈을 찔렀다.

“…….”

우우우웅- 이명이 사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달아오른 이명은 순식간에 높아졌다. 주변을 모두 부수어버릴 듯 완전히 달아오른 것 같은 순간, 이도하의 눈앞에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사방을 막아 그를 가둔 거대한 벽 중, 눈앞에 벽에 푸른 금이 그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래에서 위로, 다시 푸른 선이 쫘악 그어졌다. 전류와도 같은 불꽃이 화려하게 터졌다. 절대 부수지 못할 것처럼 거대하게 서 있던 벽이 그어진 자리부터 종잇장처럼 그대로 타들어 갔다.

“아주 무례한걸.”

그는 수면 위에 올라서 있었다. 물 위를 밟고서. 흠뻑 젖은 머리칼을 짜내는 손에는 어느새 긴 검이 들려 있었다. 투명한 테두리에 갇힌 것처럼 물결이 요동치고 있는 검은, 마치 물속에서 그대로 쑥 뽑아내 검으로 빚어낸 듯한 모양이었다.

“어떡할까, 화이람.”

이도하를 향해 손을 내밀며, 푸른 섬광이 달아오른 눈동자로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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