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딱딱하게 굳은 이도하의 눈길을 받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알키오라를 죽인 강도? 경찰에 붙잡힌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이가 둘이 있었으며 가계도 안정적이었죠. 사소한 전과도 하나 없고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특기나 계약자와 관련된 어떤 접점도 없었고. 기껏해야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뉴스로 소식 몇 개 보는 게 전부다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알키오라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유도 없었다죠. 그냥. 주변에서는 그저 연예인 싫어하는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해요. 그때는 확실히 지금보다 계약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좀 있었으니까.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평범한 남자가 총기를 구해, 40여 분을 운전해 가서 알키오라를 그런 식으로 죽일 거라고는. 경찰에 체포된 남자는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다고 하죠. ‘죽여야만 했다. 그는 죽어야 했다.’ 남자는 그 말밖에 안 했다고 알려져 있죠?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남자는 정신병으로 판명이 났다. 조현병, 망상장애, 남자는 단 한 번의 정신병 이력도, 상담 이력도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저 갑자기 그랬을 뿐이라는 시시한 주장 같은 건 재미도 없고,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니까. 모두가 아는 결말은 알키오라를 죽인 남자가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사형 당하고 몇 년 후, 아이라의 어느 말단 연구원 하나가 그 사건을 깊이 파고들었다.
“정신병, 꽤 그럴 듯하죠. 드라마틱하고.”
신성호가 비꼬듯 말했다.
“알키오라가 활동할 즈음에는 계약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었죠.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모두가 열광하고 선망하는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어요. 그래서 알키오라가 더 애를 썼고. 오즈의 소식과 이야기를 전하고,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 명이라고 인식을 바꿔보려고 했죠. 멋있고 환상적인 것들뿐이잖아요, 알키오라의 사진들. 그때는 아무것도 썩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런데 알아요? 알게 모르게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모두 알키오라가 죽고 나서예요. 유성호 사건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공교롭다고 할 만하죠.”
이도하가 굳은 얼굴로 떠드는 신성호를 응시했다.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냥 좀 닥치라고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개 너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형체가 조금씩,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또, 진득하게 불쾌한 기분이 그를 감쌌다.
“알키오라가, 오즈를 이곳으로 간직해 넘어왔기 때문이에요, 도하군.”
‘간직하는 기억.’ 알키오라의 특기.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연구원은 그런 가설을 세웠어요. 그가 오즈의 일부를 간직해 와 이 세상에 퍼트렸기 때문이라고. 서로 마주 봐서는 안 되는 두 세계가 충돌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세계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인 게 아닌가 하고.”
알키오라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신병 이력은 물론이고 증상조차 없던 남자가 난데없이 알키오라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 이유. 알키오라가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계약자들을 적대시했던 사회.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야, 거짓말처럼 서서히 달려졌던 분위기.
“증명할 것들이 모호하고, 타이밍이 워낙에 몹시 공교롭긴 했기 때문에 그저 가설에서 그쳤지만, 이도하군. 우린 지금 그 가설이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세계가, 그를 죽인 거라고요!”
이도하는 상상도 못할 거라는 것처럼, 신성호가 외쳤다.
“…….”
“전쟁 중인 제국의 황제가 인소더블을 거느리고 넘어왔다고. 침략의 전조고, 전쟁의 전조고, 배신의 전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알아요? 맹세컨대, 우리가 조장한 게 아니에요.”
말이 없는 이도하의 앞에서, 신성호가 호소했다. ‘이 이상 계약자에게도, 특기자들에게도 불리한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은 이런 뜻이었나?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 도하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고집부릴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함께 알아나갈 수 있단 말이에요. 고칠 수 있을지도-”
눈물까지 비추며, 신성호가 이도하의 다리에 매달렸다. 이도하가 짜증을 내며 그의 멱살을 잡아 밀쳤다.
“우리는 무슨 우리, 아저씨랑 내가 왜 우리예요. 헛소리하고 있어.”
아저씨. 어렸을 때부터 봐 온 덕에 그 호칭이 입에 붙어버렸다. 짜증스러운 불쾌감에 이도하가 거칠게 손을 털어냈다. 왜 이들이 그렇게 처음부터 어디에 불붙은 것처럼 안달을 해 댔는지 이제 알겠다.
이 세계는 이미 오즈와 100여 년이나 교류한 세계였다. 직접 세계를 넘나드는 건 계약자뿐만이라고 해도, 다른 세상의 존재에 대해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동경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런 와중에 그 다른 세상의 존재가 넘어왔다고 해서 무턱대고 당장 뭔가 엄청나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처럼 굴 이유가 없었는데. 이래서였다.
“그 말대로라면 누구든 시오한이나 날 죽이려 들겠네.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말을 떠드는지 정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저씨. 누구 앞에서 떠들고 있는지 잊었어요? 어디 한 번 와보라고 하던가.”
이도하가 서슬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먼지 한 톨 안 남게 다 찢어 버릴 테니까.”
헛소리고, 정말 개소리다. 누가 들어도 시나리오 쓰고 있다고 코웃음이나 칠 얘기다. 저따위로 끼워 맞추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상상력도 풍부하지. 그렇게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럴 수 없었다. 세계라는 게 어떤 식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지 그는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였다. 그러나….
“시오한은 어차피 돌아가야 한다고.”
그런 게 아니라도. 중얼거리듯 말한 이도하가 물러서며,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그가 입을 딱 벌렸다. 이도하가 돌아보는 거의 동시에 시오한이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연히 그를 보았고, 시오한의 뒤에 가까이 서 있던 궁이 모기라도 쫓듯 시선을 돌리며 물러났지만, 이도하는 분명히 보았다. 분명, 푸른색이었다. 시오한의 눈에, 섬광이 돋아 있었다!
“시오한!”
“응?”
이도하가 기겁을 해서 외쳤고, 시오한이 시치미를 잡아뗐다. 저건 빼도 박도 못하게 시치미였다. 제가 분명 봤는데! 이도하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쳐 올라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가 와락 시오한의 멱살을 잡았다.
“미쳤어?!”
“음.”
이도하가 와락 화를 내자, 시오한은 매우 난감해했다. 제 멱살을 쥔 이도하의 손을 곱게 잡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잘못했어.”
“이-”
냅다 사과해 버리니 이도하는 갑자기 말문이 탁 막혔다. 그런데 말문이 막히니, 분노가 오갈 데 없이 속에서 부글부글 제 속을 다 태웠다. 이도하가 빠득 이를 갈았다. 저는 지금 혹시라도 시오한이 어떻게 될까 봐 숨 쉬듯 쓰던 특기를 무의식중에라도 쓰지 않으려 뭐가 빠지게 애를 쓰고 있는데. 도약도 못 하고 집에 갇힌 데다가 이 외국인들 틈에서 번역기 앱으로 씨름을 하고 있는데, 시오한이 뒤에서 제 특기를 끌어다 쓰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잘못했어, 화이람. 용서해 줘.”
시오한이 몹시 불쌍한 얼굴로 말했다.
“미쳤냐고, 뭔데?!”
“조금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대가리에 총 맞았냐, 내가 그 말을 믿게?!”
나도 모르게?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말이 저것보다는 신빙성이 있겠다. 아찔할 정도로 열 받은 와중에도 이도하가 빠르게 그를 살폈다. 귀가 축 내려앉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그는 여전히 어이가 없을 정도로 예쁘고, 황금색 머리칼도 그대로였으며, 손발도 무사히 달려 있었다. 창밖에 비가 오는 것 같지도 않고, 갑자기 우박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신성호나 여전히 기절한 최윤석이나, 하여튼 누군가가 갑자기 눈이 홱 돌아 달려들어 공격하지도 않는다. 일단은 괜찮아 보였다.
“정말인데… 게다가 알아냈어.”
“뭐-”
뭘 알아냈든 그게 지금 상황에 뭐가 중요하겠는가 싶었는데, 시오한이 말했다.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이유 말이야, 화이람. 내 마력이야.”
“뭐?”
“그대에게 주었던 내 마력. 써 보니까 알겠네.”
“…당신 마력?”
이도하가 스산하게 미간을 좁혔다. 와중에도 그는 시오한답지 않은 이 대책 없고 앞뒤 없는 무모한 짓에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그러나 곧 시오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자, 그는 이 새까만 분노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당신 마력?”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스산했던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얼굴에 시오한이 안심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제 멱살을 쥔 이도하의 손을 살살 잡아 펴 그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그의 마력이라 함은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소환되면서 오즈에 그를 형성했던 마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도하가 인소더블인 덕에, 혹은 그 탓에, 고작 반나절 남짓 정도만 소환된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굴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가 되는 양의 마력. 자칫 까딱하는 사이 몇 번이고 시오한을 골로 보낼 뻔했던 양의 마력.
그런데 그게 있을 턱이 있나? 제가 마지막으로 소환되었던 건, 마지막으로 소환되었던 건… 이도하가 잠깐 미간을 구겼다. 돌이키려니 까마득한 게, 정말 꽤 오래되었다. 마지막 소환은 그가 그 지하 감옥에서 천 년 전 소환진의 흔적을 읽었을 때였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소환을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서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했을 때. 그건 이도하가 첫 소환 이후로 시오한의 마력을 가장 많이 썼다고 할 만한 때였지만, 그래도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으니 다 흩어져 버렸어야 정상이었다. 남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무슨 마력.
“완전한 소환은 아니었으나… 우리, 몇 번 닿기는 했었지.”
시오한의 손가락이 손가락 안쪽의 여린 살을 스치며 길게 들어왔다. 마침내 빈틈없이 꽉 맞닿아, 부드럽게 그를 감싸 쥔다. 이도하도 손이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시오한은 손가락이 길어 그의 손을 전부 감쌌다.
“…아.”
그래, 그런 적이 있었다. 독일의 그 호텔에서. 그리고 우르슬라의 오두막에서. 분명 소환진이 펼쳐지기는 했지만, 그건 소환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넘어간 것도, 넘어가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느낌. 마치 제 존재가 흩어지고 다시 뭉쳐지는 그 중간의 어디에선가 멈춰선 느낌. 아주 찰나라고 할 만한 순간이었고, 그래서 소환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음, 그런데 조금 큰일 나기는 했어, 화이람.”
솟구쳤던 화도 까맣게 사그라들고, 이도하는 묘한 감동 비슷한 것에 휩싸여 있었다. 시오한이 아까보다도 한층 더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내지 마- 하고 속삭이는데, 한번 화르륵 불타올랐던 이도하는 제가 또 무슨 화가 나겠는가 싶었다. 시오한이 깍지 낀 손 하나를 그의 눈앞으로 들기 전까지는.
이도하의 손등을 감싼 그의 손가락이, 투명하게 투과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