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숨기는 게 없으면 켕기는 것도 없다고 했다. 거실에 가지런하게 널브러진 사람들, 그리고 어느새 다시 무릎을 꿇고 앉은 신성호를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게 정말 범죄이고 특수폭행이긴 한데, 그렇게 따지면 어차피 이도하는 이미 불법 출국에다가, 따끈따끈하게는 어젯밤에 신나게 폭행 현장을 벌인 범죄자였다. 지난밤에 그는 특기라고는 쓰지 않았지만 주먹질을 하기는 했다. 그러니 좀 더 막 나간다고 해도 뭐 어쩔 텐가 말이다. 기왕 주먹 쓴 거 한 놈 팬 거나, 두 놈 팬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오한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도하의 ‘막 나가기식’ 다짐이 퍽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뭐든 하고 싶은 건 다 해라- 하는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이도하는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정말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제가 늦게라도 슬슬 망종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곧 그것도 다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불법이니 어쩌니 했던 방금 전의 과거가 약간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이래서 그동안 참 용케도 준수한 준법정신을 가지고 살았다. 이도하가 핸드폰을 꺼냈다.
엄마 - 아들, 시간 되면 엄마한테 전화 한 통만 해.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의 알람이 떠 있다. 멈칫한 이도하가 잠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몇 번 화면을 건드리지 못하고 위만 맴돌다, 이내 메시지 함을 열었다.
주승현 - 밥상 잘 정리되고 있어요. 곧 기사 날 거예요. 마음에 드는 결과였으면 좋겠네요.
주승현 - 그리고 은호 그 아이는 제가 후원하기로 했어요. 혹시 궁금할까 봐.
김똘 - ㅇ이도하씨 ㄱ시사 뭐에요 어떠ㅎ케거에요
김똘 - 전화돔받아봐요
경영대 윤윤형 - 이모형 이거 뭔 일이야???? 너 학교 왔었어?????
경영대 윤윤형 - 야야야야야 뭐야 너 괜차늠??????
이주연 - 선배 아까 과 애들도 몇 명 있었는데 곤란한 일인 거면 우리라도 잘못 본 걸로 하겠대요 진짜 눈 깜짝할 새였고 원래 이런 일은 한 몇 명이 아니라고 입 모으면 헷갈리잖아요.
아빠 - 도하야, 위험한 일 아니지??
01038615392 - 안녕하십니까, 이도하씨. 아이라 한국지부 사무차장 최윤석이라고 합니다. 전화 몇 번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메시지 남깁니다. 정신없으실 거 알지만 이번 일 관련해서 말씀 나눠야 할 게 있으니 연락 부탁드립니다.
김똘 - 이도하씨 미쳤어요? 뭐해요??? 지금 실시간으로 사진 다 뜨고 있다고요!!!!
김똘 - 미쳐버리ㅔ싿 ㅇㄹ이도하씨 제발ㅈ 전화 왜 ㅕ있어요 왕가 악
경영대 윤윤형 - 도하야, 이도하야. 폐하께 누추한 집을 보여드려서 정말 죄송하고, 뵙게 돼서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꼭 전해 주라. 야 진짜 너 임마… 너 진짜… 와… 새끼 잘해라.
경영대 윤윤형 - 난 편견 없다.
경영대 윤윤형 - 근데 폐하 진짜 그냥 놀러 오신 거임? 관광? 삼겹살 꼭 먹어라.
경영대 윤윤형 - 야 근데 너 지금 사진 다 찍히고 웬 너튜버 라이브에도 뜨던데 이거 괜찮은 거 맞음??
01056761928 - 안녕하세요, 이도하씨. STB 김연지 기자입니다, 어제 있었던 일로 인터뷰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전화로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01038615392 - 이도하씨,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아 부득이하게 방문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라는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촉각을 세우고 있는 일이라 미룰 수가 없습니다. 되도록 더 이상 외출하지 말아 주십시오. 실례지만 미리 양해 구하겠습니다.
며칠 사이 다사다난했던 일들이 무슨 역사처럼 쌓여 있었다. 작정이 있어 핸드폰을 꺼냈던 이도하는 잠시 미간을 모았다. 새벽녘에 온 주승현의 문자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밥상이란 건 아마 제가 말했던 레드 마피아의 자료를 말하는 걸 텐데, 뒤져봐도 그 이후로 산처럼 쌓인 메시지들 중 주승현의 것은 없었다. 고작 하루 정도 사이에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걸 다 추려낸 것 정도는 놀랍지도 않지만… 김윤혜는 진작부터 난리가 났고, 만사태평한 윤윤형까지도 걱정인데 웬일로 주승현이 조용하지?
“화이람?”
액정 위로 금실 같은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찝찝하네.”
“무엇이?”
“주승현.”
그러고 보니 시오한에게는 주승현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못 했다. 못 했던가, 안 했던가… 어차피 계약 양도 실험에 제가 끌려 들어간 데에 의도적인 조작이 있었다는 건 시오한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니까. 이건 뭐랄까, 좀 더 촘촘하고 세밀한, 굳이 시오한까지 신경 쓰이게 할 필요 없는 제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맹약에 관한 단서를 내게 흘린 여자.”
이도하가 담백하게 말했다. 시오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저번에 이올라라고. 맹약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했던 사람. 천 년 전의 계약주와 계약을 한 것 같다고 했던. 그 이올라가 남긴 기록을 내가 보게 만든 게 그 여자야, 주승현.”
“그대가 맹약을 알게 했다고?”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걱정했다나 뭐라나.”
그 이올라, 우르슬라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를 시오한에게 말하자니 좀 꺼림칙하다. 부끄러움과 비슷한 것 같다. 시오한이 이 세계를 신기해하는 것이야 일견 당연하긴 한데, 몇 번에 걸쳐 기이하다, 하는 말을 들으니 더 그랬다.
“당신이 아까 말한 그 정신조작 특기를 가진 계약자, 그 계약자랑 한패야.”
최준원. 김윤혜와 만났던 날 이후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재벌 3세 새끼. 한패라고 표현하니 몹시 저렴하게 들린다.
“아.”
시오한은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 아까도 뭔가 형체와 얼굴을 정확히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 같은 기색이더니, 이번에도 그렇다. 그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로 행방이라고는 알 수 없는 점이라거나, 암군이 이 세계에도 있다는 점. 설마?
“시오한, 당신 그 새끼 만났어?”
이도하가 물었다.
“잡았지.”
“…….”
시오한이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이도하가 입을 딱 벌렸다. 예상했던 대답이긴 한데, 그래도 막상 들으니 좀 당황스러웠다. 이상하게 변하는 이도하의 표정을 본 시오한이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김윤혜가 아주 싫어하고,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놈이기는 하지만 이도하도 심지어 그 재벌 3세가 약간 불쌍해졌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려는 즈음, 시오한이 점잖게 말했다.
“그랬는데, 도주했어.”
“도주했다고?”
“능력이 좋던걸. 도와주는 이들도 있었다지. 어차피 더 잡고 있어봐야 별 의미도 없었고.”
“…사지 멀쩡하게?”
이도하가 물었다. 시오한은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건 상상에 맡기겠다는 식이다. 이도하도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뭐가 나왔는데?”
“그다지. 그자의 능력이 최면이었는데… 자기 자신에게도 걸 수 있었던 모양이야. 드리시니언과 키누엘이 제법 뒤졌는데도 별로 나오는 게 없었으니. 전부 두루뭉술했지. 원래 머릿속이 좀 가뿐한 자인 것 같기도 하고.”
가볍게 말하며, 시오한은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차갑게 식어있던 손이 따뜻하게 감싸지자 이도하가 약간 손가락을 오므렸다. 시오한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화이람, 주승현이라는 자를 만난 거야?”
“어, 응.”
“그대에게 맹약에 대해 알려주었어?”
“자기도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는 눈치던데.”
눈가를 찡그린 이도하가 대답했다. 돌이켜 보니, 그날 주승현은 우르슬라에 대해 꽤 많이 떠들어댔지만 그건 전부 그녀가 왜 그렇게 됐는지 구구절절한 사연뿐이었다. 맹약이 뭔지, 왜 그녀가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심지어 그녀가 미국까지 레무스 비숍을 찾아갔던 일 같은 건 일언반구도 없었다. 몰랐던 건가? 다른 건 둘째 치고, ‘맹약’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는데도 왜 말 한 마디가 없었을까. 주승현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 똑똑한 여자가 독일어를 몰라서, 혹은 그냥 깜빡했다고 하면 그건 참새도 안 믿을 소리였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저 이도하가 맹약을 파고들다 우르슬라를 찾아내길 바란 걸까, 아니면….
원하는 게, ‘맹약’이었나?
“…쯧.”
기분 나쁘다, 기분 나쁘다 했더니. 경고니, 걱정이니 하는 말은 처음부터 이도하에게 씨알도 먹힌 적이 없지만 그래도 한층 더,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대놓고 의뭉스러운 주제에 숨기는 건 하나도 없는 척 행동하는 게 도통 의도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후회할 거예요, 도하군.
신성호였다. 목소리는 작았고, 꽉 잠긴 것처럼 억눌려 있었으며 발음도 불분명했다. 그냥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이도하는 무시하려 했다.
“알키오라 꼴이 날 거라고요.”
전혀 생각지 못한 이름에,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장 고해성사라도 할 것처럼 서럽게 흐느끼던 신성호는 이제 그래도 좀 제정신을 찾은 것 같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으나, 그래도 멀쩡해 보이기는 한다. 수치스러워하는 기색도 있었다.
“…무슨 헛소리예요. 갑자기 그 양반이 왜 나와.”
“알키오라가 왜 죽었는데.”
알키오라. ‘간직하는 기억.’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오즈의 모습을 이 세상에 전했던 특기자. 그는 살해당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알키오라는 집에 침입한 어느 강도에 의해 죽었다. 강도는 탄창이 다 빌 정도로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고, 알키오라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도하가 알기로 강도는 정신병에 걸린 남자였다. 단순 사고였다.
“사고인 것처럼 알려져 있고, 모두가 그게 사고인 줄 알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도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