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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75화 (174/250)

175화

그 말은, 마치 이도하에게 찬물을 흠뻑 뒤집어씌운 것 같았다. 핵심은 없이 두루뭉술하고 은근하게 그를 죄여오는 것 같던 압박감이 와장창 깨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도하가 할 말을 다 한 것처럼 돌아서려는 레무스 비숍을 붙잡았다. 옅은 푸른 눈동자와 까만 눈동자가 비슷한 눈높이에서 가까이 마주쳤다.

“이 이상?”

이건 잘못 이해할 수도 없는 아주 간단한 단어였다.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레무스 비숍은 답이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는 조금 낭패스러운 얼굴이었다.

“알고 있는 거죠.”

이도하가 말했다.

“우르슬라.”

이도하를 바라보는 긴 눈매가 순간 움찔했다. 레무스 비숍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도하가 독일에 갔을 때 우르슬라를 만났었다는 건 드리시니언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이 사실에 놀랄 이유도 없다. 이도하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오류’를 알고 있다.

<…만난 적이 있습니다.>

레무스 비숍이 대답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달음박질친다. 세계의 오류는 세계 안에서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다. 시오한이 짚어주기 전까지는, 이도하 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부러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도 잊게 된다. 세계에 뭔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엉켜버린 시간을 잊고 그냥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이도하를 두렵게 했다. 여태 시간이 그렇게 엉켜버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제가 모르는 새에 또 무언가 그런 오류가 일어날까 봐. 혹시나 그렇게 돼서….

제가 또 시오한을 잊어버리게 될까 봐.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드리시니언에게 뭔가 지시하듯 서 있으면서도 시선은 이도하에게 향해 있던 시오한이 화답하듯 가볍게 웃음기를 띈다. 이도하는 손목에 감긴 리본을 매만져보았다. 그 작은 움직임이 미약하게 전달되어 길게 늘어진 푸른 리본이 잘게 흔들린다. 그 끝에 시오한이 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이도하도 조금 웃어 보였다.

<그녀가 그렇게 되기 전에. 내게 도움을 청하러 왔었습니다.>

“…당신한테?”

<‘---’>

레무스 비숍이 입을 뗐다. 독일어다.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축축한 습기, 숨 막히게 답답하던 공기, 붉게 타오르던 벽난로, 적막한 어느 숲속 오두막, 잊고 있던 기억이 순간 이도하를 덮쳤다. 우르슬라의 기억을 읽었던 밤, 와락- 이도하를 붙잡았던 싸늘한 손. 코앞까지 다가와 시야를 가득 채웠던 연푸른 눈동자.

‘---’

달싹였던 그녀의 입술이, 레무스 비숍의 입 모양과 겹쳐진다. 귓바퀴를 긁어내리며 싸늘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던, 문장조차 제대로 맺지 못했던 그 가엾은 여자의 목소리가, 레무스 비숍의 목소리와 겹쳤다.

<그를 죽여 달라고.>

‘죽여.’

그런, 말이었구나.

“…왜.”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우르슬라는 계약주를 살리려고 거듭해서 시간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전부터, 계약자가 최초로 죽기 전에 이미 누군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승현이 말했는데. 그런데 왜, ‘도와줘’가 아니지?

“누군데요. ‘그’가 누군데?”

<모릅니다.>

레무스 비숍이 대답했다. 허,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도하가 뭔가 더 말하기 전에, 레무스 비숍이 먼저 말했다.

<말하지 못했습니다. 뭔가, 제약이 걸린 사람처럼.>

“……”

<이미 썩 정상은 아니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띵하다. 이도하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눈꺼풀이 뻑뻑하게 각막에 달라붙었다 진득하게 떨어진다. 말하지 못하는 제약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마누엘 뮬러….

으드득, 이도하가 이를 물었다. 그 때 그냥 아주 뒤집어 엎어버리든가 했어야 했는데. 이쯤 되니 시오한의 말마따나 정말 제가 마음이 약한 게 맞는 거 아닌가 싶다. 그때도 이미 썩 정상은 아니었다는 우르슬라는 이제 완전히 미쳐버렸으니, 완전히 폐허가 된 그녀의 기억을 손수 맛본 장본인으로서 이도하는 그녀에게서 그게 누군지 알아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시간에 간섭하는 특기자인 데다, 나는 수사관이라 상대를 가늠하고 사건의 앞뒤를 정렬하는 게 일상에 가깝습니다. 말했듯이, 세계에 좀 더 예민한 편이기도 하고.>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도하는 레무스 비숍이 뭔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수사관이었고, 그런 오류를 알았다면 파헤쳐 보려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이도하가 궁금한 건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돼요. 이대로 나눠도 되는 건지, 아니면….”

<모릅니다.>

레무스 비숍이 대답했다. 여태 마주하고 있던 시선이 느리게 비껴 나갔다.

<…그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밖에는.>

“……”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정하건대, 그건 가장 먼저 이도하의 머리를 스친 방법이기도 했다. 컴퓨터를 껐다 켜고, 배터리를 갈듯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이건 경고이자 조언이었다. 이도하는 그가 무엇을 시도해 보았는지 묻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말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저….>

처음으로, 레무스 비숍이 미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잠시 더 말을 고르던 그는 마뜩잖은 얼굴로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점점 더. 그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르슬라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뒤엉킨 시간은 그녀의 특기로 인한 것이며, 지금도, 이 이후로도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 한다. 그런데 그 느낌이란 건 점점 더 좋지 않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게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벌어지고 치달아가기만 한다.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헛바퀴만 돈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암담함에, 이도하가 조금 숨이 막혔다.

누구였을까. 왜 우르슬라는 제 주변의 누구도 아니고, 미국의 레무스 비숍까지 찾아갔을까. 계약주를 살려달라는 부탁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군가를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구하려는 사람을 죽인 가해자이기 때문일 테였다. 우르슬라의 계약주를 살해한 이가 ‘그’라고 생각하면 쉬운 문제였다. 그러나 왜 그걸, 굳이 레무스 비숍에게? 그는 계약자도 아닌데.

‘그를 죽여 달라고.’

‘죽여.’

또 왜, 제게.

우르슬라가 생각하기에, 레무스 비숍이 죽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제가 죽일 수 있는 사람. 계약주를 구하기 위해서, 죽여야 하는 사람. 그녀의 계약주를 죽일 사람. 오즈에 있는… 계약주를.

…계약자?

‘불꽃’ 레무스 비숍. 인소더블인 이도하. 그들이어야 죽일 수 있는 사람. 강력한 계약자.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꽤 그럴 듯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

우르슬라의 계약주는, 천 년 전의 사람이다.

우르슬라는 아이라의 연구원이었으니 만약 그녀가 레무스 비숍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이건 오히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상대가 강력한 ‘계약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생각하기에 레무스 비숍과 이도하가 천 년 전의 시간에 닿을 수 있을 만한 특기자라고 여겼다면. 이게 오히려 더 그럴 듯하지 않나? 이도하는 생각했다.

당장 저만 해도 천 년 전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직 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지만, 확실히 이도하는 그걸 단 한 번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핑계로 쓰여 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데.>

레무스 비숍의 말이 이도하를 깨웠다. 시오한을 두고 그 오르페노스 황제가 아니라, 사실 레무스 비숍이다, 했던 아이라의 눈 가리고 아웅식 핑계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금 이 문밖에 기자들이 드글드글 포진을 하고 있다고 하니, 코미디에 가까울 불꽃 연기를 한 번 펼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도하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시오한은 어느새 궁이 가져다준 것 같은 의자에 자연스레 앉아 있었다. 신성호는 그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또 눈이 마주치자, 시오한이 이번에는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이도하는 시선이 드리시니언이 좀 더 가지런하게 널브러뜨린 사람들에게 멎었다. 아이라의 특기자들, 최윤석.

“왜 굳이 이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특별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혼란을 원하지 않아서.>

혼란. 이도하가 그의 말을 곱씹었다. 가만히 이도하를 지켜보고 있던 시오한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시오한. 생각해 보니까, 날 아무도 몰랐던 저쪽이랑 다르게 여기 사람들은 이미 당신을 다 알고 있잖아. 당신, 팬클럽까지 있거든.”

“팬클럽?”

시오한이 되물었다. 그게 뭔지는 전혀 모르겠는 눈치였다. 이도하와의 의사소통에는 전혀 무리가 없어도, 확실히 계약자와 계약주간의 언어 특혜와는 다르다.

“당신을 모르는 게 무식한 거라고.”

시오한이 누군지 몰라 한심한 날라리 취급을 받은 적이 있는 이도하가 말했다.

“근데… 굳이 당신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나.”

제 경우와는 다르다. 오즈에서의 이도하는 명백한 이물이었으며, 침입자였다. 이도하가 잊혔던 건 그가 그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였기 때문이었다. 더해 계약자도 아닌 이도하가 특기를 써 대고, 활동하며 더 많은 흔적을 남기면 남길수록 그 세계의 섭리를 비틀었기 때문에. 그래서 청소하듯이, 어서 지워져야만 했기 때문에.

그러나 이 세계는 이미 모든 이들이 시오한을 알고 있었다. 이도하의 존재만큼이나 그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곳에서, 특기자도 아닌 시오한이 괴리를 남길 일은 없지 않나? 시오한의 존재가 정말로, 이도하가 그랬듯 이 세계에 침입이며 오류라고 하면, 그렇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적은 이들이 이곳에 들어온 그의 존재를 깨닫는 게 좋다고 한다면.

“그럼 사실 이미 엎질러진 판 아니냐고.”

사실 당신들이 본 사진은 레무스 비숍이다, 하는 핑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최윤석과 신성호의 말처럼 아이라와 정부에도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누군가는 알게 되어 있다. 그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건 누군가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입장밖에 되지 않을 뿐이고, 그걸 위해 어떤 불리함과 무례를 감수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게 아이라가 된다면, 이도하는 차라리 엎질러진 판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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