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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74화 (173/250)

174화

“재벌새끼 친구?”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아주 예전에 카페에서 만났던 그 무슨 재벌 그룹 손자. 김윤혜가 재벌새끼 친구라고 일컬었던, 이름은 기억도 안 나는 하여튼 재수 없었던 놈. 김윤혜가 그를 만나러 갔다가 이태학에 관한 녹취본과 그가 계약 양도 실험에 연루되어 있다는 서류를 받아온 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주승현을 만나고도 잊고 있었는데, 시오한이 이렇게 거론하니 이도하에게는 아주 뜬금없었다.

“그래, 행색이 꽤 부유했다고 들었어.”

시오한이 작게 웃었다. 꼭 본 것처럼 말한다.

“혹 그런 자를 만났었나 하여.”

“…시오한. 난 잘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도하는 몹시 헷갈렸다. 그 재벌 친구 놈도 재수 없고, 신성호도 분명 유구하게 쭉 밥맛이 없어 왔던 인사임은 분명하나 그 외에 둘의 상관관계는 전혀 없어 보였다.

“화이람, 내 눈에는 꼭 이 자의 두려움이 거세된 것처럼 보이거든.”

“…뭐?”

“정신 조작, 환각, 최면, 그런 힘으로 인하여.”

이도하가 다시 신성호를 보았다. 드리시니언에게 기억을 읽히는 것은 물론 불쾌한 느낌임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년인이 저렇게 어린애처럼 웅크리고 흐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좀 미친 것 같긴 하지만, 시오한이 그걸 보고 하는 말은 아닐 테였다. 도대체 어느 면에서?

“화이람, 저 자는 어렸을 때부터 그대를 담당했던 연구원이라고 했지.”

시오한이 말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신성호에게 향한 시선이 몹시도 서늘했다. 그 말을 내뱉는 게 불쾌한 것처럼.

“연구원이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그대의 힘을 더 잘 알 테지. 헌데 그대가 인소더블인 것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그대를 대하기는 몹시 평범한 사람을 대하듯 하잖아?”

“…….”

이도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혹시 이게 아까 그 콩깍지의 연장선인가 했으나, 그저 콩깍지라고 하기에 시오한은 정말 진심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물어보긴 했었다. 어째서 아무도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며. 당시 이도하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도하가 말을 골랐다. 신성호도, 최윤석도, 그러니까 아무도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정신 조작이나 착란에 의한 조작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니 어떻게 그에게 어떻게 이걸 설명해야 할 지 모호했다. 정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이도하는 처음 깨달았다. 오즈와 이곳은 생리가 다른 곳이니, 보는 시선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제가 알았어야 했는데.

“…그게, 불법인데.”

그러나 이도하는 말솜씨가 썩 좋지 못한 편에 속했다. 시오한이 순간적으로 아무 말 없이 이도하를 보았다. 웃는 낯이 약간 찌그러진 것이, 역시 제가 영 개소리를 했나 싶은데 갑자기 그가 입술을 앙 다물었다. 눈 밑에도 힘이 들어가 봉긋 솟아오른다. 망할, 웃겼구나. 이도하는 이제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쓰읍, 그러니까, 아 요즘 같은 때 누가 쟤 졸라 세다 그러면서 무서워해? 막말로 깽값이란 게 있는데. 서로 상식, 아 웃어라. 웃어. 웃으세요.”

“하하.”

시오한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이도하가 투덜거렸다.

“내 말은, 그렇잖아. 특기자나 주먹 좀 쓰는 사람이나 같은 맥락이라는 거지.”

몇 마디 더 해보려 했지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이도하는 그냥 그쯤 하기로 했다. 더 뭘 갖다 붙이려고 해 봐야 횡설수설만 늘어놓을 것 같다. 그런 그를 빤히 보던 시오한이 말했다.

“누가 그대를 이리 키웠지?”

웃음기가 눈에 가득 남아있다.

“…난 더 할 말이 없다.”

시오한이 가볍게 이도하를 끌어안았다. 차분히 뒷머리를 감싸 아이를 달래듯 하며, 시오한이 말했다.

“그래, 그대의 말이 다 맞아. 하지만 내 말을 믿어, 화이람. 그대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선하고, 마음도 여리지.”

“음, 그만해 줄래?”

이도하가 괴롭게 말했다. 싫지는 않은데, 정말 괴로웠다.

“콩깍지가 아니야.”

“알겠어.”

이도하가 시오한의 등을 두드렸다. 그도 애정표현에는 스스럼이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세 명이 기절해 있고 나이가 제 삼촌뻘 되는 사람이 흐느끼고 있는 데다가 여긴 제집 거실이었다. 제발 그만하라는 것 같은 몸짓에도 한동안이나 그를 가만히 안고 있던 시오한이 말했다.

“그대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네.”

“어?”

“‘불꽃’이.”

시오한이 그를 놔주었고,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레무스 비숍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상황과 좀 동떨어진 이 일련의 행위 같은 건 전혀 관심 없어 보였다. 떨떠름해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일반적으로 할 법한 어떤 반응도 없다. 반면 그 뒤에 있던 궁은 적극적인 관람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즉시 딴청을 피웠다. 팝콘이라도 쥐여 줬으면 맛있게 먹었겠다, 하며 이도하가 그에게 다가갔다. 시오한은 따라오지 않았다. 리본은 충분히 길었다.

<……>

그가 이도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어볼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대답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이도하에게 머물러 있었다. 잠시 후에야 그가 시선을 움직였다. 또 망설이는 것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엉터리 번역 앱 같은 게 영 믿음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달리 방법도 없었다. 특기도 없이 이도하가 그가 하루아침에 말이 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건의 특기를 알고 있습니까?>

“로건?”

그게 누구야. 레무스 비숍이 궁을 가리켰다.

<‘떠도는 사냥개’입니다. 특기의 흔적을 찾아 특기를 감별해 내고, 소유자를 찾아내며 흔적을 되짚을 수도 있는데… 그건 대체로 그가 하는 업무이고, 본질적으로 따지면 특기의 흔적을 짚어내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고, 번역 앱 도움에다가 12년 교육 과정의 힘을 보태 이도하는 얼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런데 제가 맞게 잘 이해한 건지는 헷갈렸다.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레무스 비숍이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궁의 특기를 설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당신이 오르페노스 황제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때, 그곳에 로건이 소환됐었습니다.>

레무스 비숍이 말했다. 피곤이 드리운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지만, 옅은 푸른 눈동자가 이도하를 찬찬히 살핀다.

<당신의 흔적과 함께… 이곳의 흔적이 느껴졌다고 하더군요. 이 세계의 향이 났다고.>

두근, 심장이 뛰었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게 무슨 뜻이지? 이도하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시오한의 시야를 통해 바라보고 있었고, 그가 성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잠깐이지만, 넘어갔었나?

들켰나?

“…그래서요?”

SCU- 특별 범죄 분석팀, 레무스 비숍. ‘불꽃.’ 사람들이 심심할 때면 거론하는 특기자 랭킹에서 빠짐없이 이도하를 상대할 만한 특기자로 점쳐지는 사람. 이도하의 시선을 묵묵히 받던 그가 말했다.

<특기자들이 계약자로서 오즈에 소환되는 건, 계약자의 이름으로 존재를 덮어씌우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속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흔적 같은 건 그 세계로 침입하지 못하니까. 사람도, 물건도 아닌, 세계 그 자체의 흔적이 남는 건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줄 알았는데요.”

<내 힘은 ‘불꽃’입니다.>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남자의 특기가 불꽃이라는 건 이도하가 인소더블이라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궁의 특기를 소개하는 것도 모자라 난데없이 이렇게 자기소개까지 하니, 그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불을 다루는 특기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힘에 가깝습니다.>

그가 손을 들었다. 손끝에 희미하게 빛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불꽃으로 투명하게 흩어질 듯 일렁인다.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손가락이 불꽃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해서는 아니었다. 광범위한 불꽃을 제한 없이 자유자재로 다룰 만한 특기를 가진 건 레무스 비숍뿐이지만, 손가락 끝이 불꽃으로 변하는 것쯤은 초등학교 애들이나 짝짝 박수를 칠 일에 불과하다. 그게, 특기라면.

그러나… 이건 특기가 아니었다.

<설명하기가 좀 힘든데… 좀 특이하게 태어난 편이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사람과 불꽃 사이의 무언가라고.>

여기가 제 세계가 맞았었나. 갑자기 판타지로 변하는 현실에 이도하는 잠깐 혼란스러워졌다. 제 특기도 꽤 말이 안 되는 편이긴 한데, 이 사람도 만만찮은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세계를 좀 더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갔었습니다, 아이라 건물, 그 옥상에. 로건은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했지만, 신경이 쓰여서요.>

레무스 비숍이 말했다.

<꼭 구멍이 뚫린 것 같더군요.>

두근, 또 심장이 뛰었다. 이도하가 숨을 깊이 쉬었다. 구멍이 뚫려?

<이 세계가 그곳으로 스며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구멍이 뚫려, 누수가 일어난 것처럼.>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말했다. 레무스 비숍의 시선이 이도하를 비껴 그의 뒤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알고 있는 겁니까?>

“…내 특기,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대답하는 대신, 이도하가 말했다. 차분한 옅은 푸른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가 대답했다.

<대충은.>

“그래서 경고하러 온 겁니까?”

<…알고 있는지 물어보러 온 겁니다. 말했다시피 그건 느낌에 지나지 않았고, 뭐라 뚜렷이 형체화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더군요.>

그가 다시 물었다.

<당신도 알고 있는 겁니까?>

“…아뇨.”

이도하가 대답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곤두박질치려고 하는 것 같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게 차가워졌다. 구멍? 레무스 비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좀 더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이상 오류를 만드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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