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콩깍지라니.”
그런 건 없다는 것처럼 시오한이 웃었다. 콩깍지보다는 다른 말에 더 집중한 게 틀림없다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범이 꼬리를 물어대는 강아지를 밟아 죽이지 않는다면 그건 관용이고 자비라고 하겠지. 화가 난다면 굳이 이해할 필요도, 참을 이유도 없는.”
그가 이도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악인은 아니기 때문에, 그저 자신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황이 그럴 뿐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그대가 이해하고, 또 그런 이유로 그대가 굳이 스스로의 분노까지 참아내는 건 그런 저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허니 어찌 마음이 약하지 않다고 하겠어? 그대는 좋은 사람이야, 화이람.”
이도하가 움찔했다. 시오한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짚었다. 그러나 고작 그런 이유들로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민망했다. 특히나 눈을 가려 보이지는 않아도 앞에 쓰러진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앞에서 그렇게 들으니 더 그랬다. 시오한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이도하도 한 대 치기는 할 셈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말하니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알고 있었어?”
“음.”
‘악인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긍정하며, 시오한이 이도하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이도하는 차가운 머리칼이 어깨로 스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허탈해졌다. 물론 죽어라고 숨기려고 했던 것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웬만하면 시오한은 몰랐으면 좋겠다, 정도였지만 애초에 알고 있었다니. 하기야, 이곳에도 암군이 있다 하니 그런 일이 시오한의 귀에 안 들어가는 게 더 이상하겠다.
“괜히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거야. 이러니까.”
제 눈을 가린 시오한의 손을 붙잡고 이도하가 투덜거렸다.
“뭐 옛날처럼 쬐끄만 꼬맹이도 아니고. 다 컸으니까 손 좀 놓죠.”
“그대가 마음을 다칠까 봐.”
“…어우 간지러워.”
이도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키도 크고 인상도 서늘한 편인 데다가, 날 때부터 특기자였으니 이런 취급은 난생처음이었다. 생경한 느낌에 이도하가 몸서리치자 시오한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아주 천천히 손을 뗐다. 비로소 보이는 풍경에 이도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났던 것도 이틀 된 밥처럼 식어버렸다.
베란다로 통하는 커다란 창은 산산조각 나서 온 거실에 흩어져 있었고, 베란다 끝에 처박힌 남자는 미동도 없어 보였다. 대기하듯 기다리고 선 서련의 발치에 쓰러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우드득,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엄청났는데, 설마 턱이 아주 박살 나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또 수줍어하는 서련은, 신성호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
이 사람을 잠깐 잊고 있었다. 이도하는 조금 민망해졌는데, 올해 사십 후반쯤 되었을 신성호는 가련하게도 거의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겁에 질려 본인도 주체할 수 없는 듯 벌벌 떨기까지 한다. 그 경황에 이도하가 하는 말 같은 건 단 하나도 듣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서련이 발로 그를 툭, 건드렸다. 친 것도 아니고 민 정도에 불과했는데 신성호가 무너지듯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고개와 더불어 시선도 떨어졌다.
그래도 40대에 수석 연구원을 할 정도로, 그것도 그 아이라에서 인소더블 연구팀을 맡을 정도라면 꽤 산전수전 겪었을 텐데 이 정도로 이렇게까지? 이도하가 좀 의아할 정도였다. 아니면 반대로 공부와 연구밖에 못 해본 사람이라 이런 주먹이 코앞에 있는 상황은 처음 겪어본 걸까. 그때 시오한이 손을 움직였다. 티비 위에서 최윤석을 끌어내 곱게 눕혀놓던 드리시니언이 그걸 보고 움직였다. 눈동자에 순식간에 푸른 섬광이 달아올랐다. 신성호의 머리에 손을 올리려던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물었다.
<저기 미스터. 그냥 기절할래요? 그게 그쪽도 나도 편할 텐데.>
신성호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궁이 말했다.
<어차피 또 깨워야 할 걸.>
<아, 그렇네. 그럼 좀 아파도 일어나 있는 게 낫겠다.>
절 두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신성호는 그냥 혼자서도 기절할 것 같았다. 그가 버럭 외쳤다.
“이, 이건 부, 불법이에요. 도하군, 범죄라고요. 특수범죄란 말이에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꽉 잠겨 거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말했다. 힘 있게 외쳐보려고 했으나, 실패한 것 같았다.
“폐, 폐하는 잘 모르시겠지만 도하 군이 말씀드려서, 여기서는 이러면 안 된다ㄱ-”
<미스터, 폐하께는 허락 없이 말 걸면 안 돼요. 혼나요.>
“도하 군-!”
신성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몰랐는데, 드리시니언이 누군가의 기억을 읽는 것은 별로 볼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신성호의 눈동자는 드리시니언과 같이 푸른색으로 물들었으나, 일반적인 특기자들의 섬광과는 달리 이 푸른빛은 동공까지 전부 덮어버렸다. 이를 악물고, 괴롭게 신음하며 감전당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떤다. 딱히 그에게 동정이 가는 것은 아니나, 뇌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던 불쾌한 감각이 떠올랐다. 그때 이도하의 어깨에 팔을 얹고 있던 시오한이 부드럽게 그의 몸을 돌렸다.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자각 없이 시오한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이도하가 말했다.
“도움이 되네, 드리시니언.”
“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보지 못 했는데….”
별 희한한 일을 다 본다는 듯 시오한이 말했다.
“저 자가 그대에게 탄원을 했어?”
“내가 제일 만만한가 보지.”
정확히는 탄원과 협박 사이의 무엇인가였다. 눈앞에서 맨몸으로 사람 뼈를 아작 낸 사람은 뒷목을 잡고 서 있지, 하나는 기억을 뽑아낼 것 같지, 또 하나는 그 일을 시킨 다른 세계의 황제지, 그래도 와중에 그나마 어렸을 적부터 봐 온 제가 제일 만만했을 수도 있다. 아무렴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이도하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 기이하다 싶더라니. 점점 가관인걸.”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말했다. 묘한 얼굴이었다.
“늘 스펙타클하지. 기억은 왜?”
드리시니언이 암군이라지만, 그 전에 그는 FBI 요원이기도 했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상관까지 같이 온 자리에 FBI 요원이 정말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이도하는 흘긋 눈치를 보게 되었다. 레무스 비숍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뭘 보는지 모르지만 얼핏 봐도 화면에 글씨가 아주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다고 했는데.
“알아둬서 나쁠 게 없고,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무슨 확인… 아.”
이도하는 일련의 소란으로 잠깐 잊고 있던 것을 번뜩 떠올렸다.
“전쟁 중이라고?”
“응?”
“이리스티리움, 전쟁 중이야?”
“이리스티리움이?”
시오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이었고, 누가 보면 영락없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할 얼굴이었다. 아주 뻔뻔했다. 지그시 쳐다보자, 그가 태연히 말했다.
“이리스티리움은 늘 전쟁 중인걸.”
이도하가 그의 양 뺨을 꽉 눌렀다. 살도 없는 시오한의 볼이 꽉 찌그러졌다.
“내가 바보냐?”
“음.”
시오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퍽 애교스럽다. 이리스티리움은 순수 면적으로만 따지면 복속된 위성국을 제외하고도 러시아와 미국을 합친 것보다 좀 더 거대하다. 그만큼 광활한 영토라면 국경이 맞닿아 있는 나라도 한두 개가 아닐 테니 자잘한 분쟁쯤이야 늘 있는 것도 사실일 테였다. 그러니 시오한이 태연하게 하는 저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도하가 물은 진실에서 떼어낸 퍼즐 한 조각 정도의 사실일 뿐이어서 그렇지. 결국 시오한이 실토했다.
“화이람, 그대가 염려할 정도는 아니야.”
“어쨌든 전쟁 중이긴 하다는 거잖아.”
“그렇지?”
“가벼운 분쟁 정도도 아니고.”
“아니고.”
“…언제부터?”
“좀 되었어. 그대의 탓이 아니야, 화이람.”
황제인 시오한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생긴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전혀 몰랐다. 쯧, 혀를 차며 이도하가 손을 놓았다. 그가 짜증스레 제 머리를 헤집었다. 러시아의 깡패들에게 들은 게 있으니 영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 하나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오즈에 전쟁이 나면 폭력이 늘고, 기원도 늘며, 계약자도 늘어난다.
“시오한, 설마 암군이 여기에도 있는 이유가…?”
“꽤 유구한 역사지. 정말 그대와는 관련이 없어.”
결국 이 세계에서 오즈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공작이 있기는 하다는 말이다. 심지어 아주 오래되었고, 만연하기까지 하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보았을 때처럼 불쾌감이 들었으나, 그 말은 또 의외로 정말 이도하에게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때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드리시니언이 머쓱한 얼굴로 턱을 긁적이고 있었다. 발치에 쓰러진 신성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어깨가 움칠거렸고, 끅끅, 하고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설마 우나? 눈이 마주친 드리시니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누가 봐도 덩치가 건장하고, 신성호는 나잇살도 붙은 중년에다 덩치도 왜소하니 모양새가 좀 이상하기는 했다.
<리, 폐하께 별거 없다고 좀 전해줘요. 아니라고.>
“어… 아니라는데.”
“아. 과연.”
시오한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뭐가?”
“화이람, 이전에 그대를 불러냈던 사형수를 기억해?”
“…잊을 수가 없지.”
시오한이 조금 미안한 얼굴을 했다. 손을 뻗은 그가 헝클어진 이도하의 머리를 단정히 정리해주었다.
“그때, 계약자가 있다고 했었지. 정신 조작, 착란, 환각, 최면, 그러한 능력으로 그 사형수가 ‘가장 강한 계약자’를 거느린 계약주가 될 수 있다는 허황된 착각을 심어준 자가 있었다고.”